[에세이] ADHD - 2024 F/W 핫한 패션 트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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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대로라면 ADHD 약에 대하여 먼저 이야기를 해야 하지만, 그 전에 도저히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다. 패션에 대하여 지극히 관심이 많아진 시대, 패션 트렌드를 따라가며 함께 이야기할만한 그것. 니트, 스커트, 드레스 같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패션을 넘어선 또다른 차원의 뜨거운 감자로 떠오르는 꾸밈요소. 바로 패션 정신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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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 정신병에 대해 이야기하기 앞서, 나의 유년시절을 잠깐 소개할까 한다. 아주 해맑고 행복했던 나의 어릴적 꿈은 바로 정신병이 있는 여성이 되는 것이었다.
꿈이 충만한 질풍노도 사춘기의 초등학교 고학년, 나는 다른 아이들이 그렇듯 처음으로 인터넷 소설을 접하게 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만화의 세계로 들어가 그 캐릭터들과 함께 생활을 하는 것이 당시 내가 읽었던 주된 소설의 내용이었는데, 대부분의 인터넷소설이 그렇듯 작성자도, 읽는이도 모두 미성숙한 연령대였다보니 그 설정이 소위 이야기하는 '중2병'스럽게 겹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내가 읽었던 소설 플랫폼의 가장 큰 유행은 주인공의 정신적 상처였다. 여주인공은 마음의 상처를 입고 있고, 그것을 주변인들은 알고 있으며, 따라서 주변인들은 여주인공에게 더욱 신경을 쓴다. 그것은 때로는 애정결핍이기도 했고, 때로는 착한아이증후군이기도 했으며, 때로는 우울증이기도 했다. 자살을 하기 위해 뛰어내렸다가 다른 세계로 차원이동하게 되는 경우도 허다했다. 결국 강해보이지만 사실 그 누구보다도 약하고, 그래서 처연해보이고 가녀려보이지만 동시에 그 누구보다도 강한, 모두에게 특별한 취급을 받는 주인공이 그 플랫폼에 우후죽순으로 넘쳐나게 되었다.
사실 소설 뿐만이 아니더라도, 만화 주인공들은 이따금씩 그런 상처를 갖고 있었다. 예를 들어 애니메이션 나O토의 경우 마을 사람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는 외톨이었고, 달O천O의 주인공은 선천적인 지병이 있어 몸이 약했다. 하지만 그들은 곧 특별한 힘을 사용할 수 있게 되고, 그렇게 '주인공'스럽게 된다.
해당 만화의 작가들은 '불행한 사람도 성장할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선물하고자 했을 것이다. 하지만 철이 없어도 너무 없었던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의 나에게는 그 메시지가 잔뜩 꼬이고 꼬여, 행복하지만은 않은 사람이 더욱 '있어보인다'는 메시지로 도착하게 되었다.
당시의 나는 누구보다도 행복한 아이였다. 비록 한부모 가정이었으나 할머니와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았고, 공부도 늘 상위권이었으며, (초등학생이 그래봤자 받아쓰기 100점이었겠지만, 그래도 나름 학교에서 공부 잘하기로 유명했다.), 온몸이 튼튼하여 그 흔한 충치 한 번 생긴 적이 없고, 친구들도 많았다. 그런 나에게 늘 어딘가 아프고, 남들에게 말할 수 없는 상처를 갖고 있는 주인공은 색다른 충격을 주었다.
그래서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만월 아래에서 간절히 기도했다.
'저도 불행하게 해주세요. 힘들어지게 해주세요. 아파지게 해주세요. 그래서 특별해지게 해주세요. 나도 멋있어지고 싶어요.'
그로부터 1N년이 넘게 지난 지금, 나는 온 몸이 아파 매번 골골거리고, 수많은 심리적 어려움을 갖고 살고 있다. 그리고 병원에서 수많은 처방전을 품에 안고 엘리베이터를 내려오던 어느날 나는 문득 깨달았다.
간절히 원하면 꿈은 이루어진다.
나의 철없던 시절의 꿈이 이런 식으로 이루어졌다는 황당한 사실에 대하여 불평하는 것은 나중으로 미루기로 하고, 다시 패션에 대해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패션 OOO'이라는 워딩이 특히 두각을 드러낸 것은 코로나-19 시대였다. 외출하지 못하며 온라인 상의 활동이 굉장히 활발해졌고, 동시에 '나다움'에 대해 찾아가고자 하는 젊은 층의 트랜드가 강해졌다. 그 과정에서 음지에 있던 것이 자연스럽게 양지로 올라왔다.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오타쿠'가 '힙한 것' 내지 하나의 그저 취미로 인식이 바뀌며 사람들 사이에 떠오른 것도 이맘때였고, 동시에 '애니메이션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힙해보이려고 좋아하는 척 한다'는 의미로 '패션 오타쿠'라는 단어가 탄생했다.
그와 동시에 '패션 정신병'도 스물스물 올라왔다. 내가 우울한 것은 질병 때문이고, 게으른 것도 질병 때문이다. 조금만 불편해도 그것을 스스로의 문제가 아닌 외부의 문제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방패로 세우며 '나의 잘못은 없다'고 이야기 한다. 온라인에서 돌아다니는 정확하지 않은 설문지로 스스로를 진단하고 '나는 이 질병이니까 이런 것 뿐이야'라고 핑계를 댄다. 그것은 일종의 도피일 수도 있고, 특별해지고 싶다는 마음일 수도 있다.
이러한 현상은 패션 오타쿠와 같이 '실제로는 아니면서 하나의 패션처럼 자신에게 두르고 있다'는 의미로 '패션 정신병'이라고 불리기 시작했으며 뉴스란에 조금만 검색해보면 '패션 정신병' 내지 '패션 정신질환'에 대한 기사를 찾아볼 수 있다.
이미 어린 시절, 질환을 선망하고 그것을 갖고 싶어 기도까지 했던 나에게 '패션 정신병'은 유독 와닿았다. 아마 그 당시의 나는 패션 정신병을 꿈꾸었더 것이겠지. 스스로의 과거에 대해 알고 있는 만큼 ADHD에 대하여 진단을 받은 후 약 일주일 간 나는 내가 '패션 ADHD'일까봐 무척이나 괴로웠다.
앞선 에세이에서 이야기했듯 나는 스스로의 글러먹음에 대한 경계심이 무척 강하다. 다른 질병을 진단받았을 때도, 무엇보다도 힘들었던 것은 '사실 이 진단은 오진단이고, 그저 내가 나약하고 글러먹었는데 현실로부터 도망치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 때문이었다.
그에 대한 스트레스를 극심히 받다보니 인터넷 설문지만으로 '나 우울증인가봐', '나 ADHD인가봐'라고 결론을 내리는 사람을 단순히 싫어하는 것을 넘어 끔찍해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나는 병원에서 진단을 받았음에도 스스로에 대해 이렇게 의심하는데, 당신들은 왜그렇게 쉽게 핑계거리를 확정지으려고 하는가 하는 마음에서였다. 정말 마음의 여유가 없을 때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기침이 나고 콧물이 흐르니 이것은 감기다'라고 스스로를 진단하는 사람들까지 '더 심한 병이면 어쩌려고 저렇게 안이하게 스스로에게 확진을 내릴까' 불편해지기에 이르기도 했다.
이는 ADHD 진단을 받았을 때도 고스란히 적용되게 된다.
ADHD는 그 증상이 흔히 말하는 게으름과 워낙 유사하다보니 나의 스트레스는 더욱 극심해졌다. '공부에 집중이 안되는데 ADHD일까요', '일 하기 싫은데 ADHD일까요'에 대한 질의응답들을 보며 그 사람들이 내 눈에는 그저 핑계를 찾으려는 사람들로 보였고, 그 과정에서 나 스스로에 대한 의심이 더욱 증가했다. '선생님이 그때 그렇게 이야기했던 것은 내가 ADHD가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일까?', '사실 나는 패션 ADHD가 아닐까?', '어린 시절의 치기어린 꿈이 아직도 이어져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이 끊임 없이 나를 괴롭혔다.
그래서 ADHD에 대한 에세이를 잠시 멈췄다. 다시, 선생님께 자세히 여쭤보자. 그리고 다시 확진을 받으면 그때 ADHD에 대한 에세이를 이어가자고 생각했다. ADHD라고 에세이를 썼는데, 알고보니 그냥 게으르고 멍청했던 것 뿐인 패션 ADHD면 쪽팔리니까 말이다.
오늘 낮, 나는 ADHD라는 이야기를 다시 한 번 들었다. 이상한 안도감이 들었다. 선생님과의 정확한 대화 내용을 똑똑히 기억한다.
"그럼 저는 저의 글러먹음에 대해 걱정하지 않아도 되나요?"
"네."
그리고 나는 곧바로 다시 에세이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패션 ADHD를 주제로 말이다.
[김푸름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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