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부조리가 가장 바라지 않는 부조리 -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 [연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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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고도를 기다리며>와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
<고도를 기다리며>는 누구나 제목은 들어봤을 법한 베케트의 희곡이다. 제목 그대로, 두 인물이 ‘고도’를 기다리는 이야기다. 그게 다다.
부조리가 무엇인지 궁금하다면 이 희곡을 읽으면 된다. 현실적인 부조리(갑질, 이간질, 하극상, 모함, 소문)는 겪어봤을지 몰라도 이런 '본질적인' 부조리는 낯설 것이다. 왜냐하면 정확히 무엇이 잘못된 건지 모르겠기 때문이다.
희곡으로 읽어도 좋고, 연극을 볼 기회가 온다면 연극도 좋다. 작년에 이 희곡을 읽었던 나는 이번에 연극을 한다는 소식에 그런 기회가 온 줄 알고 예매를 했다. 그러고 잊고 있다가 공연 당일 급하게 찾아가서 티켓을 받았을 때서야 알았다. 제목이 약간 다르다는 걸.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
제목이 좀 더 길었다. 작년에 박근형 배우와 신구 배우가 <고도를 기다리며> 연극을 했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이번엔 배우가 다르다고 하길래, 그냥 배우가 다르구나 생각했다. 현대적 재해석이 들어갔다는 얘기에 아, 그렇구나 했다. 그런데 이게 뭐지. 연극을 보기 전 <고도를 기다리며> 희곡을 복습하려 했다가 실패한 나는 잠시 혼란에 빠졌다가, 오히려 다행이라고 고쳐 생각했다. 생각해 보니 더 흥미로웠다. 기다리는 이야기를 기다린다니.
메인 스테이지 ⇔ 백 스테이지
암전. 공연이 시작되자마자 극장이 깜깜해진다.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들린다. 처음엔 스태프들의 큐사인이다. 이게 왜 들리지? 하는 순간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의 목소리도 들린다. 관객인가? 시작부터 이런 일이 생기다니... 그때, 무대에 불이 들어온다.
오른편엔 조명이 달린 거울, 베토벤의 흉상이 놓인 책상과 나무 같이 커다란 스탠드가 서있고 가운데에는 벤치와 그 뒤편으로는 어딘가로 이어지는 계단이, 왼편에는 커다란 테이블, 바위 같은 나무상자, 수많은 옷들이 걸려 있는 행거가 있다. 뒤편으론 마구 어질러진 물건들이 보인다.
작지만 신경 쓰인 그 대화 소리는 관객의 소리도 아니고, 무대에 누군가 하는 목소리도 아니다. 스피커에서 나는 소리다. 그것은 ‘진짜’ 무대에서 상연 중인 <고도를 기다리며>의 소리다. 그럼 지금 눈앞에 나타난 무대는? 이 무대는 <고도를 기다리며>의 제2대기실이다.
관객은 배우들이 관객 앞에 서서 연기하는 ‘무대’가 아니라, 배우들이 분장을 고치고 옷을 갈아입고 잠시 쉬기도 하면서 극에 다시 자신이 호출될 때까지 잠시 대기하는 공간, ‘대기실’에 초대된 셈이다. 메인 스테이지에 가려진 백스테이지가 홀연 우리 앞에 등장한 것이다.
이 무대에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낸다. ‘에스터’(곽동연 배우). 에스터는 흉상을 들고 기도를 한 뒤 책상 의자에 앉아 자기 발보다 작은 구두를 신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때마침 대기실에 ‘밸’(박정복 배우)이 들어와 에스터에게 커피를 건넨다. 그들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눈다. 그런데 잠시만, 무대가 시작됐는데 이들은 왜 여기서 한가하게 대화를 하고 있는 거지?
<고도를 기다리며>는 등장인물이 둘이다.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 (사실 둘만 있는 건 아니고 고도의 전갈을 전해주는 소년이나, 포조, 럭키 등이 더 나오긴 하지만) 에스터와 밸의 행색으로 봐선 그 둘인 게 틀림없다. (스피커로 들리다시피) 진짜 무대는 공연이 한창인데 이들은 누구인가.
기다리며 연습 또 연습!
이들은 그 공연을 위한 언더스터디, 즉 대역 배우이다(에스터는 에스트라공의 대역, 밸은 블라디미르의 대역이다). 그들은 대기실에서 자신들을 진짜 무대로 불러줄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주인공들이 ‘고도’라는 모호한 대상을 기다린다면, 이 극, 백스테이지의 주인공들은 보다 분명한 걸 기다린다. ‘진짜’ 무대에 오르는 것. 직장을 관두고 배우의 길을 가게 된 밸은 메리 이모에게 자기 공연을 보여주고 싶어 한다. 남다른 예술혼을 가진 선배 에스터는 무대에서 연기하는 걸 열망한다. 그들은 무대 조명이 떨어지거나 하는 상황이 일어나 자신들이 투입되기를 바라면서 기다린다.
에스터는 신참인 밸에게 선배(혹은 꼰대)로서 배우 생활에 대해 아는 바를 줄줄이 늘어놓는다. 그러나 그 또한 밸과 같이 무명 배우다. 소속사와 계약을 해서 성공하는 배우의 삶을 침 튀기며 말하는 그는 은근히 그 기대로 얼굴이 한껏 상기되어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지금 바로 뒤, 진짜 무대에서 상연 중일 <고도를 기다리며>에 언제 투입될지 모르니 그들은 연습, 또 연습에 매진한다.
하지만 에스터는 에스트라공(역할이 신어야 하는) 구두가 작아 신을 수가 없다. 그래서일까, 그는 연극 대사도 자꾸 까먹기 일쑤다. 에스터는 밸이 보여주려고 내민 대본을 내팽개쳐두고 밸에게 연기에 대한 기초적이면서도 중요한 조언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무언가 딱 오는 순간이 있다고 하고, 다양한 감정 연기를 펼친다.
밸이 그의 조언을 듣고 열심히 따라 하지만 에스터는 자꾸 아니라고, 아니라고 한다. 뭐가 아닌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설명하지 못하면서. 이 장면은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진지하게 느껴지는데, 예술이 가진 ‘가치’의 속성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어떤 그림을 보고 누군가는 감탄하지만 누군가는 저게 뭐라고 저렇게들 호들갑을 떤담, 생각한다. 예술은 그저 호불호의 영역인 걸까. 호가 불호를, 불호가 호를 이해하지 못하고서 서로의 간극만을 느끼게 되는 영역인 걸까.
연기 VS 연출
연기 강의와 논쟁에 한창인데 무대조감독 ‘로라’(정재원 배우)가 대기실로 찾아온다. 로라는 그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기회, 무대에 올라설 기회가 왔음을 알려주려 온 걸까? 아니다. 로라는 구두를 찾으러 왔을 뿐이다. 무대 배우가 신은 구두가 너무 커서 다른 구두를 찾으러 온 거다. 로라는 그들의 존재를 아예 몰랐는지, 그들을 보고 아저씨라고 부른다.
자기 발보다 작은 구두를 신으려고 그토록 안달했던 에스터는 구두를 찾아 대기실을 뒤지던 로라가 그의 구두에 주목하자, 초인적인 힘으로 구두를 멋지게 신고선 기억해 낸 대사로 짧은 열연을 펼친다. 연기로 마치 그 구두가 자기 것임을 증명할 수라도 있다는 듯이. 그 구두가 자기 구두임을 증명함으로써 자신의 배역을 지켰다고 생각하는 듯이.
로라는 그들에게 신경을 끄고 다시 대기실을 뒤진다. 그들은 로라에게 다가가 자신들이 언제쯤 투입될 거 같냐고 묻는데, 로라는 모른다고 답한다. 로라는 구두를 찾지 못한 채 할 수 없이 나가려다가 그들에게 말한다. 연극에서 중요한 건 연출이지, 연기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거 아니냐고. 그만, 그들의 심기를 건드리는 발언을 하고 만다.
기겁한 에스터는 보여주겠다며 혼신의 고릴라 연기를 선보인다. 처음엔 우습게만 여겨졌던 고릴라 연기는 <노트르담의 꼽추>, <햄릿> 같은 다른 극 중 인물의 연기로 변주되면서 관객을 감탄하게 만든다. 앞에서 불분명하게 느껴졌던 예술의 가치가 확실히 ‘호’로 증명되는 순간 같다. 진심으로 예술을 한다면 그 가치가 증명된다고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누구에게나.
로라는 에스터에 맞대응하고자 무대연출이 실제 무대 뒤에서 하는 일, 속사포 무전 실력을 눈을 아주 반짝여가며 뽐낸다. 알아들을 수 없는 은어들의 향연, 깔끔한 딕션과 무대 공간에 대고 지시할 때마다 달라지는 동작들. 로라의 진심도 만만치 않다.
마치 연기와 연출의 대결을 보여주는 듯한 이 장면에서 로라는 연출이 무대를 관장하는 신임을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관객은 모르겠지만 신이 뒤에서 무대를 꾸미고 있다. 신이 관장하고 지켜보는 무대에서 연기하는 배우, 인간은 정해진 것만 따르면 된다. 배우는 연출에게 구속받는, 정해진 대사와 동작을 취해야 하는 극의 소품에 불과하다.
하지만 에스터의 예술혼과 고릴라 연기를 돌이켜 보면, 연기란 과연 정해진 대사를 내뱉고 동작을 취하기만 하면 되는 ‘수동적인’ 영역인가 의문을 품게 된다. 연기는 노력과 연습에 따라 그 역할이 요구하는 연기보다 훨씬 웃도는 능력치를 보여줄 수도 있는, ‘능동적인’ 영역이지 않은가. 그리고 애초에 연극은 ‘관객’이 있어야 한다. 그 관객은 인간이다. 현실의 인간(관객)은 무대 밖 객석에 앉아 무대의 인간(배우)을 바라본다. 관객은 연출 보단 배우들의 연기에 감동받을 것이다. 그렇다면 오히려 연출이 연기를 도와주기 위한 실감 나는 소품, 장치에 불과한 걸지도 모른다.
연출과 연기 모두 극에 꼭 필요하기 때문에 결론은 나지 않는다. 에스터와 논쟁하며 잠시 구두 찾는 것을 잊고 있던 로라는 연출의 호출을 받고 급히 자리를 떠난다. 로라는 무대의 신이 아니라 그의 대변인이었던 거다. 이렇게 로라도 에스터와 밸이 기다리던 ‘기회’가 아닌 걸로 판명된다. 누구도 아닌 무대의 신만이 그들이 기다리던 기회를 줄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아니라면 누가, 혹은 무엇이 그들에게 기회를 줄 수 있는 걸까.
로비
에스터는 긴장이 풀린 건지 구두를 벗고 슬리퍼로 갈아 신고서는 대기실에 붙어있는 화장실을 간다. 에스터가 벗어놓고 간 구두를 재미 삼아 신어본 밸은 구두가 자신에게 딱 맞는 걸 보고 놀란다. 그 순간 또한 화장실이 급해진 밸은 에스터가 나오는 걸 기다리다가, 다른 화장실을 찾아 밖으로 나간다.
화장실에서 나온 에스터는 밸이 없어진 것보다 자기 구두가 없어진 것에 놀라고 슬퍼한다. 이제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간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때 밸이 기뻐하는 얼굴로 대기실로 돌아온다. 그의 손에는 서류가 들려 있다. 밸은 로비의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소속사 대표를 우연히 만나 캐스팅된 것이다. 그것도 전속 계약. 이 놀라운 소식, 기쁨의 소식을 전하려고 에스터에게 다가간 밸은, 에스터가 구두를 잃어버렸다고 난리법석인 걸 보며 자신이 구두를 신고 있다고 말한다. 밸의 말에 집중하지 못하던 에스터는 그제야 구두를 목격하고 그가 캐스팅되었다는 소식도 알아듣는다. 에스터는 그 구두를 벗기려고 밸과 씨름하다가 그만 흉상을 깨뜨리고 만다.
에스터는 혼란에 빠진다. 그토록 연습하고 매진했던 자신은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데, 규칙을 어기고 로비 화장실에 간 밸이 아주 우연한 기회로 캐스팅이 되었다니. 그는 섭섭한 한편으로 절망과 분노에 휩싸인다. 규칙을 어겼다는 것, 그리고 신참을 알아주었다는 것 때문에.
예술혼을 불태우던 에스터가 실은 예술에 매몰된 원칙주의자이며 개개인이 가진 능력과 가능성이 아닌 선후배라는 위계를 중시하는 인물인 걸까. 사실 그것보다도 이 장면은 자유를 추구하는 예술계의 꽉 막힌 속내를 드러내는 것 같이 느껴진다. 그러나 (에스터가 분명히 선배지만) 밸이 나이가 더 많다는 게 밝혀져 그들의 관계는 애매해지고, 결국 반말을 쓰게 된다. 차분해진 에스터는 떠나려는 밸을 설득하기 시작한다. 소속사를 가지는 것이 진정한 꿈이었냐고. 우리는 지금 저 무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게 아니냐고. 특히나 메리 이모가 기다리고 있지 않느냐고.
기다림의 끝
설득된 밸은 계약 서류를 찢고 다시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에스터와 같이 어떤 상황이 벌어져서 자신들에게 기회가 찾아오기를 바란다. 기다린다. 그때 에스터가 맥베스의 저주를 내리자고 제안한다. 어느 연극이든 맥베스! 하고 외치면 무슨 일이 생긴다는 저주, 그걸 지금 해보자고. 그들은 대기실 바깥을 향해 크게 외친다. 맥베스. 맥베스!
그러자 놀랍게도 무슨 상황이 벌어진다. 로라가 다시 돌아와서는 연극이 중단되었다고 알린다. 저주가 통한 것이다. 무대의 신이 아닌 미신(迷信)이, 미신(未神)이 기회를 준 거다. 무슨 일이냐는 말에 로라가 관객 중 한 명이 돌아가셨다고 답한다. 순간 불안감에 휩싸인 밸은 그 관객의 신상에 대해 묻는다. 설마, 설마? 밸은 울부짖으며 대기실을 나가려고 한다.
그런데 에스터가 막는다. 에스터는 간절하게 말한다. 드디어 기회가 온 거라고. 메리 이모가 기회를 준 거라고. 설득한다. 죽음이 기회가 된다는 아이러니, 비극이 희망이 된다는 아이러니 속에서, ‘진짜’ 무대로 올라갈 기회를 기다리다 ‘진짜’ 무대가 사라져 버린 상황에 이른 에스터와 밸은 그토록 기다리던 공연을, 지금까지 계속 있던 그 자리, 백스테이지에서 선보인다. 로라는 스탠드를 제외한 모든 조명을 끄고 나가며 그 또 다른 극의 시작을 알린다.
극장을 나서며
이랬다 저랬다 하는 식으로 적어 혼란스러울 수 있겠지만, 본질적인 부조리가 바로 이런 특성을 가지고 있다. 다르다고 생각했다가 같은 걸 발견하고, 옳다고 생각했다가 잘못된 걸 발견하는 게 본질적인 부조리다. 거기서 끝나지 않고 이도 저도 아닌 기분을 느꼈다면, 본질적인 부조리를 ‘느꼈다’고도 할 수 있다.
누군가는 에스터와 밸이 진정한 예술가라고 생각하겠지만 누군가는 주목받지 못하는 안타까운 예술가로 보일 거다. 누군가는 메리 이모의 죽음을 받아들이겠지만 누군가는 너무하다고 생각할 거다. 누군가는 밸이 소속사 계약 서류를 찢어버린 거에 안타까워하겠지만 누군가는 만족감을 느낄 거다. 단순히 하나에 몰두하지 않고 동시에 생각하고 몰두하는 게 우리가 할 수 있는, 부조리가 가장 바라지 않는 부조리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내가 했던 사소한 오해, 연극 제목에 대한 오해 덕에 이 극을 더 잘, 충격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게 아니었으면 나는 이 극을 지금보다 더 많이 오해했을 것 같다.
어렵고 모호하게 느껴지는 <고도를 기다리며>의 부조리를 보다 현실적인 차원, 예술가의 차원에서 생각해 보게끔 만든 각색과, 각색을 뒷받침하는 배우들의 열연(엄청난 양의 반복적인 대사와 실감 나는 액션)에 박수를 보낸다. 재해석과 오마주가 모두 느껴지는 연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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