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어느 날 불안이 찾아왔다

마음에 흙탕물이 일었다
글 입력 2024.11.01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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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불안이 찾아왔다.


돌이켜 보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원래도 과도한 긴장과 불안 그리고 알아서 스트레스를 퍼먹고 있으니 예견될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잠시 나아지는 듯하더라니 스트레스를 받으니까 불안이 다시 날뛰기 시작해서 병원을 예약했다. 인생 첫 정신과 방문. 어릴 땐 괜히 무서워서 상담소를 갔었는데 이제는 내가 살고 봐야 하니 자신 있게 예약전화를 걸었다. 친절한 간호사의 접수 응대에 잠시 기분이 좋아졌고 간호사만큼 의사도 좋은 사람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일주일을 기다렸다.


원인은 당연히 스트레스고 근원은 회사였다. 나를 두고 정신없이 돌아가는 회사. 시도 때도 없이 변하는 환경 속에서 홀로 실무를 전담하고 있었다. 일을 잘해서 많이 하면 억울하지라도 않지, 할 사람이 없으니 내가 감내하는 수밖에 없었다. 업무 환경에 불만을 제기했지만, 여기는 원래 그런 곳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개선의 여지는 어디에도 없었고 나는 의욕을 잃었다. 그러게 일찌감치 이직을 준비했어야 하는데 조각난 이력이 흠이 되고 발목이 잡힐까 봐 뭉개고 앉아 있다가 당하고 말았다. 회사 밖은 얼음 폭풍이 부는 빙하기고 여기는 난장판이다. 여기에 들어온 게 잘못이고 섣불리 이직하지 못하는 건 능력 부족이니 모든 것이 내 탓이오.


불안은 불안을 먹고 자란다. 불안을 향해 앞만 보고 달려간다. 정신 차려보면 수렁에 빠져있다. 좌도 우도 모두 불안이 자리하고 있다. 지나온 불안, 다가올 불안. 그렇게 불안 한가운데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이유는 실수를 두려워하는 성격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실수하면 내내 자책하며 불안과 초조와 긴장과 스트레스를 주워 먹고 스스로 파낸 곳에 들어가 눕는다. 내가 나를 몰아넣는데 누가 꺼내줄 수 있으랴. 다른 것 아닌 병이 찾아오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첫 진료에서 의사는 내 상황이 번아웃 같은 거라고 했다. 평소라면 재충전되는데 회복이 되기도 전에 깎여나가서 회복되지 않는다고. 그래서 그냥 지나갈 수 있는 일에도 크게 반응할 수 있다고 했다. 불안장애약이 두 개 처방되었다. 먹고 졸릴 수 있으니 밤에 먹어보고 맞는지 확인하자고 했는데 알레르기약으로 단련되어서 불편함이 없었다. 나이가 들면 경험이 쌓인다더니 약 부작용도 낯설지 않다. 그리고 수기로 작성해야 할 검사지와 인터넷 검사지를 받았다.


불안, 우울, 공황, 스트레스 등에 대한 검사지 총 여섯 개. 작성하는 동안 정상범위를 벗어나 있다는 건 확실히 느껴졌다. 시험명을 검색해서 평균을 알아보고 시무룩해져서 돌아 나오기도 했다.


검사 결과는 예상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제일 심한 건 스트레스라고 했는데 트라우마 수준이라며 정상 가까이 치솟은 그래프가 나왔다. 우울은 우울증을 호소하는 환자들의 평균값과 비슷, 광장공포증 있음, 강박 있음, 무기력 있음. 나의 성향과 기질이 더해져서 나는 사는 게 몹시 힘든 사람이 되어있었다. 뿌리가 어디의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현재 있는 곳은 알게 되었다. 항불안제를 추가로 처방받았다. 2-3주는 먹어야 효과가 나온다고 했다. 현재 절반 정도 먹었는데 아직은 잘 모르겠다.


두 번의 진료 후기를 말하자면 일상생활이 힘들면 병원에 가는 게 맞다. 그곳이 설령 발을 들이기 쉽지 않은 곳이더라도. 정신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은 의료인과 의약품의 도움을 받는 게 맞다. 자가 진단이 아닌 객관적인 수치를 봐야 할 필요도 있다.


우선 필요시 약으로 처방받은 불안장애약은 효과가 좋았다. 나는 주로 저녁에 불안이 심해지고 회사 스트레스다 보니 일요일 저녁~월요일 아침이 특히 힘든데 그럴 때마다 약을 먹었더니 생활 패턴이 달라진 것처럼 불안이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거의 매일 먹고 있지만 약이 없어도 불안하지 않은 밤도 한 번씩 등장한다. 그것만으로도 살 것 같았다.


병원 예약하기 전에는 불안에 늘 쫓기고 있었고 그게 너무 힘들었다. 불안이 저기서 걸어오기만 해도 좋고, 기척을 숨기고 있다가 등 뒤에 따라붙었을 때 갑자기 존재감을 드러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떨쳐낼 수가 없었다. 힘껏 달려서 거리를 벌려두고 숨을 고르는 게 할 수 있는 최대의 휴식이었다.


이젠 불안이 거리를 두고 걸어오다가 속도를 올리면 그때 약을 먹는다. 턱 끝까지 치고 올라올 것 같지 않으면 참아도 본다. 지금 건강하지 못해서 이러지만, 나아지면 이 정도는 견뎌낼 수 있다고 그렇게 조금씩 강해지고 싶은 마음을 품는다.


시간과 노력을 들이더라도 한동안은 남들의 기본값만큼도 되지 않겠지만, 지금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나를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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