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행복해야 하는 상황인데, 행복감을 온전히 느끼지 못 한 적이 있는가? 즐거워야 하는 시간을 누리지 못 해 아쉬웠던 적이 있는가?
이를 두고 '안헤도니아'라고 한다. 안헤도니아는 알랭드 보통의 소설 ‘왜 나는 너를 사랑할 수 없는가’에 등장한 표현이다. 통상적으로 즐거워야 하는 상황에서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마음 놓고 편하게 자야 하는 잠자리도 내일에 대한 고민과 걱정으로 눈 붙이기 쉽지 않았던 날들 또한 안헤도니아로 표현할 수 있을 거 같다. 미래에 대한 불안함으로 행복한 순간도 오롯이 행복이란 감정만으로 즐기지 못하는 청춘들의 우울한 심리에 비유될 수도 있다. 너무 행복할 때 이 행복이 달아날까봐 걱정되었다면 그 순간도 안헤도니아다.
안헤도니아는 양가의 감정을 동시에 느끼는 인간의 복합적인 한 단면을 들춰내는 소중한 표현이다. 우리의 감정의 수 만큼 단어가 존재하지 않기에 인간의 감정은 묘사하기 어렵다. 또 묘사되어도 언어 표현에 한정된다. 같은 하늘 아래 포개어 지는 정확히 똑같은 감정이 존재할까? 인간의 감정은 각자의 경험과 맥락을 반영해 존재한다는 것까지 고려한다면, 그 양상은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할 것이다. 다원화된 사회에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것은 점점 숭고해진다.
인공지능의 영역과 인간의 영역을 구분하기 어려운 시대이다. 인간만이 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던 일들, 분야 곳곳에 인공지능이 침투하여 우리를 능가해서 가치를 창출하고 있다. 다양한 감정의 소유를 전제로 한 '공감'과 ‘창작’은 인간성을 대표하는 영역이었지만 AI가 창작의 영역에 들어온 지 오래다. 이미 2008년 러시아에서 인공지능이 쓴 '트루 러브'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AI가 주체가 되어 쓴 글이 인간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감정까지 알아채는 능력을 가진 것 같다.
인공지능이 인간에게 가져다주는 흥미로움, 어떠한 효율과 이점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절대 가질 수 없는 것은 합리적인 것을 두고도 비합리적인 것을 택하는 인간의 감성이다. AI가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작품을 창작해도 '그들만의'란 수식어를 붙이기는 어렵다. 훌륭한 결과도 인고의 시간 속 축적한 경험과 감정에서가 아니라 학습된 데이터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인지적인 학습의 사고 과정 만으로 인간의 복잡한 감성을 따라올 수 없다.
우연히 '안헤도니아'란 한 미술 작품의 제목을 보며 그 반대말로 완전하고 번영하는 삶을 뜻하는 그리스어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가 떠올랐다. '완벽'은 인간과 가장 멀리 있는 단어이다. 인간이라면 절대 가까워질 수 있는 영역이다. 대신 행복한 상황에서 동시에 행복하지 않음을 느낄 줄 아는, 복잡하고 합리적이지 못한, 이런 불완전한 감정이야 말로 인간을 인간으로 만들어 주는 것임을 생각해 보게 된다.
그동안 인간의 감성은 우리의 삶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해 왔을까? 정의하기부터 쉽지 않은 감정은 인지적인 능력과 대비되는 것으로 해석되어 왔다. 이성은 합리적이며 감성은 합리적이고 도덕적인 판단을 방해하는 프레임으로 설명되곤 한다. 플라톤은 감성을 열등한 것이라고 본 반면, 데이비드 흄은 이성은 열정의 노예라고 보고 도덕성은 감성적인 욕구에서부터 나온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성과 감성은 대립되는 특성처럼 보여진다.
데일카네기의 자기관리론에서 사람들은 이성적으로 사고하기 보다 감정이 주도하는 마음 상태에 따라 행동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이득이 되는 행동을 알면서도 반대로 마음이 가는 대로 행동한 적이 있다면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사람들은 감정과 관련된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가 있다. 이 때문에 예상과는 다르게 즉흥적으로 행동하기도 한다.
정녕 감성은 이성에 항상 열등한 존재로 합리성을 방해하는 것일까? 통제 해야만 할까?
우리의 정서가 인지에 선행하여 욕구를 자극할 때가 많다는 것은 의사 결정 과정에 마음이 끼치는 영향력이 상당히 크다는 것을 시사한다. 또한 교육의 목적은 인지와 정서를 통한 바람직한 인간 행동의 변화로 정의된다. 이성과 감성의 조화를 통해서만 행동이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감정은 이성적인 판단에 대한 다른 응답임을 제시한 신 스토아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은 "좋은 인간이 된다는 것은 세상에 대한 일종의 개방성, 자신의 통제를 벗어난 불확실한 것들을 신뢰할 수 있는 능력을 갖는 것"이라고 말했다. 사람의 정서적인 부분이 긍정적인 행동으로의 변화를 만들 수 있음을 간과하면 안 된다.
무엇이 이성적으로 맞는 것 인지 알면서도 때론 손해볼 줄도 아는 것, 비합리성으로 대표되는 감정이야 말로 인간과 인간이 아닌 것을 구분 지을 수 있는 것이다. 어떤 것도 목적으로 하지 않는 무위함을 가치있다고 여길 수 있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길 바란다. 그래야 즉각적인 효용을 가져다 주지 않는 인문학과 예술의 미학을 재밌게 향유하고 알아보고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의미가 항상 숨겨져 있어 효율성과는 거리가 먼 문학이나 예술 작품들은 이성에 앞서 감성을 선택했던 인간과 맥을 같이한다. 우리 사회가 지나치게 효율과 합리성을 강조할 때 놓치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된다.
"우리의 복잡하고 지저분한 인간성을 받아들이고 그것으로부터 도망치지 않는 것이 인간 사랑의 한 형태입니다." - 마사 누스바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