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인공적인 인간과 자연적인 인간 - 연극 '이야기와 전설'

이야기와 전설 Preview
글 입력 2024.10.29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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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언어로 삶을 정의하고 타인과 상호작용한다. 인간의 정신세계가 의식으로 의식화되고 정교화되는 거의 유일한 통로가 언어이기에, 언어 사용은 가장 인간적인 영역이다.

 

인간은 언제나 인간하고만 언어를 교환해왔다. 온전한 공감이 아니더라도 온전한 의미가 교환되는 것이 언제나 인간뿐이었다. 하지만 놀라운 기술발달로 AI가 새롭게 언어 교환이 가능한 '상대'로 등장했다.

 

AI 친구, AI 상담가, AI 애인. 이미 수많은 사람이 감정을 가진 인간에 대한 기대를 기술과 창의력을 결합하여 다양한 방식으로 아이디어를 쏟아내고 있다. 그리고 실제로 공상과학 소설 수준에만 남아있던 '기계인간'은 이미 우리의 일부로 자리 잡았다.

 

오늘 소개할 연극 '이야기와 전설'은 인공과 인공지능 로봇들이 일반화된 세상에서 인공지능 로봇과 청소년의 생활을 다루는 작품이다. 최근까지도 뜨거운 감자인 인공지능 상호작용과 '이야기'와 '전설'이라는 도발적인 대조를 내건 이 작품은 쉽게 사람들의 이목을 끈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지만, 나는 이 제목이 이미 인간과 인공지능의 차이를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작품의 실제 이야기와 상관없이 나의 연상을 이야기해보자면 이렇다. '자연적으로 인간'인 인간과 '인공적으로 인간'은 '이야기'와 '전설'의 차이만큼 비슷하고 다르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발화되는 것이다. 우리는 읽기와 쓰기 이전에 말하기를 배우고, 구술문화는 모든 말문화의 근간이 되었다. 이야기는 특정한 상황, 발화자에 따라 역동적으로 변화한다. 예를 들어, 채식주의자 소설은 그 하나뿐일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전설'은 사람들이 남긴 것을 근거로 세워지는 것이다.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면서 다양한 변화를 줄 수 있지만, 어떤 전설을 가리킬 때 굵직한 이야기의 틀로 묶여 정의된다. 춘향전이 수많은 이야기로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 것과 같다. 하지만 이야기건 전설이건 인간의 삶을 그대로 녹여낸 서사라는 점에서 이야기를 들을 때는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여기까지 읽었다면 예상했겠지만, '이야기'에 인간의 자리가 있고, '전설'에 인공지능의 자리가 있다. 인간과 AI는 문장을 교환하는 순간에는 비교할 수 없다. 하지만 인간이 계속되는 존재지만, AI는 닫힌 존재라는 점에서 두 존재는 명백히 다르다. 인간은 출력하는 순간에도 변화하지만, AI는 입력된 순간 형성된 연결고리를 통해 거리가 결정된 순간 변화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정말로 인공 '인간'처럼 보인다. 삶의 어느 순간에서 인공인간은 인간보다 인간다운 행동을 할 것이다. 인간으로 보이는 수많은 데이터가 인간과 흡사한 발화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엘 폼므라는 '이야기와 전설'에서 이 미묘한 공존의 지점에 관한 이야기를 작품으로 만들고 싶었다고 설명한다.

 

 

이 프로젝트의 출발점은 어린 시절이었습니다. 더 구체적으로는 자기 자신을 형성하고 만들어가는 시기로서의 어린 시절입니다. 로봇이 일상에 통합된 미래 사회에 대한 아이디어가 어떻게 떠올랐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이 인공적인 정체성이 나에게 어떤 도전을 줄 수 있을지, 그리고 그것이 어린 시절의 주제를 어떻게 비출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었습니다. 인공지능의 위험이나 기계들의 반란과 같은 주제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이른바 '자연적인' 인류와 '재구성된' 인류 또는 인공 인류가 공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실험해보고 싶었습니다. 이 '인공적으로 인간적인' 정체성이 '자연적으로 인간적인' 정체성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있을까요? 이런 질문들에 따라, 나는 단편적인 형식을 채택해 어린이와 로봇들이 교차하는 작은 이야기들을 제안하고 싶었습니다.

 

- 조엘 폼므라

 

 

우리의 청소년 시절에 인공지능 친구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놀라운 기술로 발달한 AI는 분명 인간보다 더 따뜻한 공감을 제공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매일 떠오르는 해마저 혼란스럽게 느껴지는 어린 시절에 흠 없이 따뜻한 친구로 AI가 존재해준다면, 그 누구보다 의지했을 것 같기도 한다.

 

하지만 사랑하게 되면 사랑하게 될수록, 그가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더욱 느끼게 될 것 같다. 인간과 AI 모두 지나온 데이터를 빠르게 취합하여 가장 가까운 거리로 문장을 만들어내지만, 근본적으로 데이터를 쌓아가는 방식이 매우 다르다. 인간은 충동과 수많은 억압으로 채색된 기억을 기반으로 몇 m 남짓한 행동 범위에 갇혀 살아가지만, 로봇은 수많은 글 데이터의 거리만을 계산하여 육체 없이 수집한다.

 

인간과 인간끼리도 진정한 공감에 이를 수 없다곤 하지만, 인간은 약간씩 공감할만한 감정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수많은 오해 속에서도 감정이 연결된다. 하지만 로봇은 육체도, 감정도, 유년시절도 없기에 그는 내가 느끼는 것에 약간의 공감조차 하지 못한다. 하지만 감정으로 얼룩덜룩한 인간보다 로봇이 더 적절하게 행동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사실을 인지하는 순간부터는 인공로봇과 인간과 같은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의지하지 않거나 사랑하지 않게 되지도 않을 것 같다. 우리는 오래된 인형에도 인간성을 상상하며 애착을 두지 않는가. 비록 AI가 진정한 공감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는 상대의 맥락을 해석하여 다양한 관점을 차용하여 맞춰가는 것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도 우리는 여전히 그들에게서 감정을 느낄 것이다.

 

이러한 상상은 '인간성'을 다시 정의하게 한다. 그리고 그것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 '인공인간'과 비교해서는 어떻게 작용할 것인가를 상상하게 한다. 데카르트는 자신이 어제 이어 오늘의 자신이 존재한다는 몸의 감각마저 의심했다. 진 빠지는 의심과 회의 속에서 그는 생각한다는 존재만을 남겼다. 나는 그의 이 유명하고 짤막한 결론이야말로 인간성을 가장 잘 표현한다고 생각한다. 언어를 통로로 삼아 멈추지 않고 느끼고 사고하는 정신이야말로 개인, 나아가 한 인간이 존재한다는 가장 완벽한 증거를 제공한다.

 

하지만 이런 인간의 변화하는 정신은 아름다운 장면 반대편에서 수많은 살인과 비극을 낳아왔다. 사랑이 가치가 되는 만큼, 증오도 그만큼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인간을 닮도록 만들어진 '인공인간'은 이제 어떤 존재로 우리 앞에 나타날 것인가? 조엘 폼므라의 답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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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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