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새로운 운명으로 나아가는 두 사람 - 오페라 '투란도트'

글 입력 2024.10.25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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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투란도트>를 10년 전 쯤에 본 적이 있다. 학교에서 단체로 보러 갔던 그 공연이 인생의 첫 번째 오페라 관람이었다. 고백하자면, 오페라만이 아니라 뮤지컬이나 콘서트도 몇 번 본 적 없었던 그때의 나는 뭔가를 특별히 느끼기보다 지루하다는 감상이 더 컸던 것 같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나 전례없는 규모로 열리는 <투란도트> 공연 소식을 알게 되어 궁금해졌다. 지금 본다면 10년 전과 어떤 다른 것을 느낄 수 있을까.


지난 10월 12일부터 19일까지 올림픽체조경기장에서 열렸던 <투란도트>는 '아레나 디 베로나'의 첫 번째 내한이라는 점과 그 장대한 규모로 이목을 끌었다. 실제로 입장해 무대를 볼 때만 해도 현실감이 나지 않다가, 징 소리와 함께 수많은 출연진이 입장해 자기 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할 때에야 그 규모가 실감났다.


거대한 무대를 사람들이 가득 채우고, 오케스트라의 음악과 함께 본격적인 공연이 시작되었다. 무대 위 군중은 정해진 자리에 가만히 있지 않고 저마다 일사분란하게 움직인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무대에 서서 각자 또 따로 움직이는 모습은 무대가 아니라 투란도트가 군림하는 나라의 한 조각을 떼어다가 갖다 놓은 것 같았다. 대규모의 무대와 출연진이 있었기에 할 수 있었던 연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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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수수께끼를 맞추지 못한 투란도트의 구혼자들은 처형당해야 하는 상황, 인파 속에서 칼라프와 그의 아버지인 티무르 왕, 노예 류가 등장한다. 서로 생사도 모르고 살아온 이들은 뜻밖의 재회로 기뻐한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투란도트 공주에게 매혹된 칼라프는 자신도 구혼자가 되겠다고 선언한다. 일단 결심을 한 다음에는 아무도 그를 막아설 수 없다. '주인님, 들어주세요(Signore ascolta!)'로 애원하는 류에게 칼라프는 '울지 마라 류(Non piangere Liù)'로 화답한다.


물론 공주에게도 사정이 있다. 구혼자를 족족 처형시키는 투란도트의 이야기는 '이 황궁에서(In questa reggia)'로 전해진다. 이는 극중 투란도트가 처음으로 길게 부르는 아리아로, 배역을 맡은 올가 마슬로바의 역량을 잘 보여줬다. 그 후 이야기는 예상대로 진행된다. 칼라프는 투란도트가 내는 수수께끼 세 개를 받고, 여느 이야기 속 주인공이 그러하듯 아무도 풀지 못한 수수께끼를 지혜롭게 풀어나간다.


이방인에게 강한 증오심을 가진 공주가 수수께끼를 다 맞췄다고 해서 순순히 칼라프를 남편으로 받아들일 리 없다. 서약을 이행하기를 거부하는 공주에게 칼라프는 새로운 제안을 한다. 다음날 동이 틀 때가지 자신의 이름을 공주가 알아낸다면, 서약과 상관없이 죽음을 맞이하겠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3막의 시작과 함께 그 유명한 '아무도 잠들지 말라(Nessun dorma)'가 시작된다. 작품을 대표하는 아리아답게 관객 반응이 가장 뜨거웠던 순간이다.


칼라프는 이 노래를 부르며 승리를 확신하지만, 자신의 제안 때문에 가까운 사람의 피를 볼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투란도트가 칼라프의 이름을 알아내기 위해 류를 고문하고, 류는 입을 여는 대신 자결을 택하기 때문이다. 이때 류가 부르는 아리아 '얼음으로 뒤덮인 그대여(Tu che di gel sei cinta)'는 칼라프와 투란도트 관계의 전환점이면서 '아무도 잠들지 말라'에 가려진 3막의 또 다른 하이라이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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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의 희생적인 사랑에 마음이 움직인 공주는 칼라프를 남편으로 받아들이고, 두 사람이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며 막이 내린다. 어찌 보면 <투란도트>는 차가운 마음으로 온 나라를 공포에 떨게 한 군주가 사랑에 감화되어 행복한 결말을 맞는다는, 전형적인 사랑 예찬 이야기다. 하지만 2024년에 이 작품을 보는 관객으로서는 결말에 이르러 갑자기 마음을 돌린 투란도트보다 류의 희생에 더 마음이 갔다. '얼음으로 뒤덮인 그대여'가 피날레보다 좀 더 감동적이었던 이유다. 고난이 닥칠 걸 알면서도 자신의 사랑과 신념을 지키는 류의 모습은 숭고해 보인다.


같은 맥락에서 가장 크게 마음을 흔들었던 지점은 <투란도트> 하면 누구나 언급하는 '아무도 잠들지 말라'가 아니라 1막의 막바지, '울지 마라, 류'를 끝마치고 합창과 함께 징을 치던 칼라프의 모습이었다. 징을 친다는 것은 죽음을 감수하고 투란도트의 구혼자로 지원하겠다는 의미다. 앞뒤 가리지 않을 만큼 투란도트에게 푹 빠졌다고 볼 수도 있지만, 나는 이 모습이 알 수 없는 미래에 도전장을 내민 것으로 보이기도 했다. 망국의 왕자로, 떠돌이로 살아갈 운명이던 그는 투란도트에게 청혼함으로써 운명을 바꿔 보겠다 선언한 것이다.


칼라프의 징 소리는 1막의 끝과 2막의 시작을 알리고, 2막이 시작되며 뒤편의 화려한 무대가 열린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는 변화를 택했고, 새로운 세상(무대)을 열었다. 칼라프가 운명을 개척해 가는 이 장면이야말로 가장 극적이면서 가장 오페라다운 순간으로 꼽고 싶다.


그렇다면 투란도트의 마지막 선택 역시 단순히 사랑에 설득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운명으로 나아가기를 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투란도트는 고집을 버리고 이방인을 받아들임로써, 알 수 없는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기로 한다. 그런 의미에서 <투란도트>는 주어진 굴레에서 벗어나 미지의 세상으로 나아가려 용기를 내는 두 사람의 이야기로 볼 수도 있다. 이 작품에는 새로운 운명을 열어젖히는 힘이 있다. 그것이 10년 전과는 다른 내 감상이다.


마지막으로, 이번 공연을 보며 합창의 힘을 느꼈다는 점도 덧붙이고 싶다. <투란도트>를 비롯해 많은 오페라가 주요인물이 부르는 특정 아리아로 알려져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번 공연에서 돋보였던 것은 합창이었다. 무대에서 각자 존재하던 이들은 중요한 순간마다 합창으로 웅장함을 더했다. 그럴 때마다 오페라라는 것이 새삼 수많은 사람의 힘으로 만들어지는 종합예술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그렇게 내게 2024년의 <투란도트>는 유명한 하나의 아리아가 아니라 수많은 이들의 합창 소리로, 그리고 기대하지 않았던 몇몇 장면으로 기억에 남을 것이다.

 

 

[김소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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