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은 폭력에 쉽게 노출된다. 그들은 폭력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자 하지만 그럴수록 배척되는 아이들의 삶. 그중에서도 나는 ‘아람’과 ‘강이’의 삶이 더 눈에 들어왔다. 약자의 위치에서 어떻게든 자신의 삶을 지키려는 노력이 소설에 그려졌기 때문에 소설에 빠져들수록 그들의 미래가 궁금해졌다.
1. 아람
‘강이’와 ‘소영’의 친구인 ‘아람’은 소설에서 가장 입체적인 인물이었다. 가정폭력의 피해자로, 아빠를 피해 서울로 가출하지만,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의 폭력은 피하지 못했던 인물이다. 동시에 ‘강이’와 ‘소영’이 싸운 후 유일하게 ‘강이’ 곁에 남은 인물이지만 고양이를 위해 ‘강이’를 배신한 인물이기도 하다. 소설에서 보인 ‘아람’의 행동이 쉽게 이해가 가지 않으면서도 끝끝내는 그녀를 이해하게 되어 그녀의 삶이 더 나은 삶이 되길 바랐다.
‘강이’, ‘소영’과 함께 서울로 가출했을 때, ‘아람’은 술집에서 일한다. 그녀는 서울에서 많은 남자를 만나게 되는데 그곳에서 만난 남자들은 ‘아람’에게 친절하지 않다. 아이인 ‘아람’을 만나는 남자 어른들은 그녀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하지만 ‘아람’은 폭력의 피해자가 되면서도 그들과의 만남을 쉽게 놓지 못한다. 나는 그녀의 그러한 행동이 이해되어 슬펐다. 아빠에게 가정폭력을 당한 피해자이기 때문에 ‘아람’은 자신이 받은 폭력에 무디다. 아무렇지 않은 듯 굴고 그럼에도 남자 어른이 자신을 사랑한다고 생각한다.
누구도 ‘아람’을 보살펴주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을 쉽게 대하는 타인에게 사랑을 배우려는 아이의 모습이 기억에 오래 남았다. 가출이 끝나고 다시 동네로 돌아가서도 ‘아람’은 아빠에게 맞는다. 하지만 학교에서 ‘아람’을 보호해 주는 어른은 없다. 어디에도 없다. ‘아람’이 더 오래 기억에 남았던 이유는 ‘아람’의 행동에 있었다. ‘소영’과 ‘강이’가 싸워 ‘강이’가 왕따가 되었을 때, ‘강이’에게 다가갔던 유일한 인물은 ‘아람’뿐이었다.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걸고 다가오고 ‘강이’를 내버려두지 않는 친구였다. ‘강이’와 ‘아람’이 함께 살며 술집에서 일했을 때도 ‘강이’가 유일하게 믿는 사람이 ‘아람’밖에 없다고 느껴졌다.
그런 ‘아람’이 ‘강이’와 함께 모은 돈을 들고 사라진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고양이의 치료를 위해서였지만 수술은 그들이 모은 돈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아람’은 그 돈으로 고양이를 묻어주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소설을 읽으며 ‘아람’이와 함께 등장하는 고양이들이 ‘아람’을 상징하고 있다고 보았다.
길고양이는 사람에게 버려진 동물이다. 보호받지 못하는 길 위에서 고양이들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한껏 예민해져 있지만 사람의 공격에 쉽게 다치고 죽어간다. ‘아람’이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아빠에게 맞고 어른에게 맞고 누구에게도 보호받지 못하는 길거리 위로 가출하였다. 그녀는 자신을 치료할 돈도 없고 보호받을 안전한 공간도 없다. 그녀는 약자이다. 보호받을 수 없고 폭력에 무력해진 인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양이를 보며 자신의 모습을 한 번쯤 떠올려보지 않았을까, 싶었다. 사람들은 쉽게 지나치는 아기 고양이를 유일하게 보호하려 했던 인물이 ‘아람’이었다.
보호받지 못하는 아이가 고양이를 자신의 공간으로 데려온 선택은, 아람이 자신이 아빠와 같은 어른이 되지 않으리라는 선택이었다. 사회에서 약자의 입장에 놓인 무언가를 자신의 힘으로 보호하려 했던 아이의 모습이 인상 깊었다. ‘아람’이 ‘강이’와 모은 돈을 훔쳐 사라진 것은 절대 올바르지 못한 행동이었지만 그 돈으로 고양이를 묻어주고도 씁쓸해 보였던 ‘아람’의 모습을 잊을 수 없었다. 그녀의 선택이 그녀의 삶에선 최선이었기 때문이다.
2. 강이
‘강이’는 이 소설의 중심인물로 자신과 다른 ‘소영’을 동경하지만 결국 ‘소영’과 틀어져 왕따가 되고 시간이 홀로 남게 되자 자신의 최선이었던 복수를 결심한 인물이다. ‘강이’는 ‘소영’을 칼로 찔렀다. ‘소영’은 칼에 찔려 사경을 헤매다 살아났고 그녀의 꿈을 이루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강이’의 복수가 ‘소영’의 미래를 도와준 셈이었다. 소설을 다 읽고 난다면 ‘강이’를 무작정 비난할 수 없다. 소설에 드러나는 ‘강이’의 삶이 그녀가 그녀의 자리에서 떠올렸을 최선의 삶이라는 것을 모두가 잘 알기 때문이다.
‘소영’, ‘아람’과 가출했을 때 소설을 읽는 독자도, ‘강이’도 그들과 미래까지 함께 하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종국에는 각자 저마다의 이유로 멀어지고 서로를 헐뜯고 최악의 관계로 넘어선다. ‘강이’는 최선의 결과가 이렇게 흘러가리란 것을 짐작했을까?
‘강이’에게 있어 최선의 삶은 무엇을 의미하는 삶이었을까. ‘강이’가 가출을 선택했을 때,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놀았을 때, ‘소영’과 ‘아람’ 사이에서 고민했을 때, ‘소영’과 싸웠을 때, ‘아람’과 함께 살았을 때, ‘소영’을 칼로 찔렀을 때. 순간의 모든 선택이 ‘강이’가 고른 최선의 선택이자 최선의 삶이었을 것이다. ‘강이’가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선택이자 자신의 범주 내에서 내릴 수 있는 결정이었다.
‘강이’의 부모는 그녀를 걱정하고 보살피는 듯 보이지만 묘하게 어긋나있음을 알 수 있다. ‘소영’ 또한 ‘강이’와 절친한 친구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소설을 읽는 내내 ‘강이’에게 진심으로 다가왔던 이가 ‘아람’밖에 없었다고 생각했다.
다만 ‘아람’ 또한 ‘강이’를 배신하면서 ‘강이’는 정말 세상에 홀로 남겨진다. 최선의 삶을 위해 치열하게 고민했지만, 강제적으로 홀로 남겨지게 된 느낌이었다. 그것이 ‘강이’가 복수를 떠올리게 된 기폭제가 된 것으로 보였다. ‘강이’ 또한 ‘아람’처럼 폭력에 쉽게 노출된 약자였기 때문에, 또 그것에게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큰 폭력으로 ‘소영’에 복수하였다.
그 복수가 옳다고 볼 수 없다. 나는 그 선택이 소설에서 ‘강이’가 결정한 가장 잘못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소설 결말부에서 ‘강이’가 자기 삶에서 더 나은 노력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에 그러한 일을 저질렀다고 느꼈다.
‘강이’는 이제 어떠한 최선의 삶을 살아가게 될까? 자신을 보호해 주는 사람을 만나는 것보다 자신을 스스로 보호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하지 않을까?
소설을 읽으며 등장하는 인물들이 더 잘 살았으면 좋겠고 더 행복해지길 바랐다. 『최선의 삶』은 사회적 약자인 아이들이 힘겹게 성장하는 성장 소설이었다. 그들이 가장 벗어나고자 했던 폭력으로부터, 잘못된 사회에서 벗어나 조금이나마 숨 쉴 수 있는 미래가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