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성별, 그중에서도 여성으로만 이루어진 극단이 있을까? 일본 사람들에게는 친숙한 ‘다카라즈카’가 그 예이다. 다카라즈카는 일본의 미혼 여성으로만 이루어진 극단으로, 지금까지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에도 여성으로만 이루어진 극단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한국 사람은 드물다. 실제 1948년에 시작되었던 ‘여성국극’은 당시 큰 인기를 끌었으나, 100년도 지나지 않은 지금은 대다수 사람들의 기억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는 거의 사라진 여성국극, 여성들이 남성 역할까지 모두 맡았던 여성국극단에 대한 이야기를 웹툰 <정년이>는 재조명했다. <정년이>는 사라져가는 민족 음악극에 대한 소개를 제시한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작품이다. 과연 어떤 의미와 인기 요소를 지녔는지, 이번 글을 통해 알아보고자 한다.
기록과 상상이 결합해 탄생한 <정년이> 만의 ‘여성국극’ 이야기
<왕자가 된 소녀들> 자료화면, 과거 실제 여성 국극단의 모습
여성국극을 소재로 다룬 만큼, 웹툰 <정년이>의 이야기에는 역사 속 여성국극의 시작부터 쇠퇴의 과정이 반영되어 있다. 특히 1956년이라는 구체적인 연도를 웹툰 내용의 시작 지점으로 설정해 여성국극의 시대적인 흐름을 작품 속에 촘촘히 담아냈다.
‘여성국극’은 박녹주(朴綠珠)를 대표로 한 여성 소리꾼들이 ‘여성국악동호회’를 결성해 1948년 10월에 「옥중화 獄中花」로 시공관에서 창립공연을 가진 것으로 시작되었다. 이후 흥행에 성공하며 여성국극이 알려졌고, 6·25전쟁 중에도 임시 수도였던 부산의 부산극장을 중심으로 공연들이 성황리에 이뤄졌다. 1953년 7월 6·25전쟁이 종전되며 수도가 서울로 돌아오자 본격적인 여성국극 시대가 되었다고 한다. 여성국극에서 주로 다루는 이야기는 야사(野史)·설화·전설을 사랑과 이별을 중심으로 재구성했다는 특징을 지녔고, 대표적인 인기 작품들로는 「공주궁의 비밀」, 「낙화 유정」, 「무영탑」, 「목동과 공주」, 「선화공주」 등이 있었다.
위에 언급된 여성국극의 역사적 사실을 전제로, 웹툰 <정년이>는 소리에 재능을 타고난 주인공 ‘윤정년’이 여성국극단에 들어가 배우로서 성장하는 이야기를 담았다. <정년이>는 당시 여성국극단의 인기뿐 아니라, 남성중심적인 사회가 여성국극단을 바라보는 인식과 여성국극의 쇠퇴 이유 또한 다루고 있다.
예를 들어, 부자가 되는 것이 꿈인 정년이의 ‘여성국극단에 들어가면 돈을 가마니로 벌 것’이라는 생각과 매란국극단의 교습소 앞에서 배우들을 기다리는 팬들을 통해서 당시 여성국극의 인기를 체감할 수 있다. 또한 정년이의 짝선배인 백도앵의 아버지와 그의 주변 사람들이 여성국극단의 공연을 ‘삼류 기생 놀음’으로 폄하하는 부분에서, 여성국극단을 향한 남성중심적 사회의 부정적 시선이 반영되었다. 이 외에도 텔레비전 및 영화 상영, 음반의 발매 등으로 위기를 맞이하는 여성국극단의 모습, 배우들이 연기와 분장을 준비하는 모습들도 역사적 기록들을 참고해 이야기로 풀어냈다.
<춘향전>부터 <쌍탑전설>까지, 실제 여성국극 내용이 녹아있는 극중극
*극중극: 만화, 소설 등 작중에 삽입된 가상의 작품을 말한다.
여성국극단의 <춘향전> 속 장면
<정년이> 속 극중극의 내용을 통해서도 역사적 기록의 반영을 찾아볼 수 있다. 여성국극은 대부분 ‘옛날 어느 나라의 왕자와 공주 이야기’라는 고대사화류(古代史話類)의 주제를 다루었다. 따라서<정넌이> 속에서도 대중들이 잘 알법한 고전 설화의 내용을 차용해 각색한 <춘향전>, <자명고>, <바보와 공주>, <쌍탑전설>등이 극중극으로 공연된다. 유튜브를 통해 공연 영상을 쉽게 접할 수 있는 <춘향전>은 실제 여성국극 속 구체적인 대사와 가사들이<정년이> 속의 국극 <춘향전>에 많이 반영되어 있다.
사랑사랑 내사랑이야 오호둥둥 니가 내사랑이지야
이리보아도 내사랑 저리보아도 내사랑
둥둥둥 내사랑 오호둥둥 내사랑
- 여성국극 <춘향전> '사랑가' 중
나머지 작품들도 원천서사가 뚜렷하다는 점이 큰 특징이다. <자명고>와 <바보와 공주>는 각각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적힌 ‘호동 설화’와 ‘온달 설화’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쌍탑전설>은 불국사의 『화엄불국사 고금역대 제현 계창기(華嚴佛國寺古今歷代諸賢繼創記)』 속 무영탑 전설의 영향을 받았다. 기존 여성국극에서의 인기 작품의 원천서사는 유지하고, 제목에 수정을 가한 것이다. 그러나 <춘향전>을 제외하고는 구체적인 국극 내용과 대본이 많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정년이>의 글작가 서이레는 고전 창극/전설/민담을 찾아 국극으로 직접 만들고 창 대사와 호흡들은 판소리 사설집을 참고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서이레 글작가의 극중극에 흥미를 유발하는 각색은 특히 극중극 <자명고>에서 잘 드러난다. 기존 서사에서 쌈마이(극의 조연)인 ‘구슬아기’를 추가하고, 가다끼(극의 악역)를 왕비에서 ‘고미걸’이라는 남성 캐릭터로 바꿨다. 그리고 새로 생긴 구슬아기와 고미걸이라는 캐릭터 간의 관계성을 추가해 극의 서사를 확장하고, 극중극의 재미를 더했다.
즉 웹툰 <정년이>는 기존의 고전 설화를 차용한 여성국극의 특징을 답습하면서도, 작가들의 상상력과 기획을 더해 <정년이>만의 새로운 서사를 지닌 국중극을 창조해냈다.
당시 여성국극의 중심인물을 모티브로 한 <정년이> 속 캐릭터
극단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기 때문에 당시 유명했던 여성국극 배우들의 모티브가 <정년이> 속 캐릭터들에게 반영되어 있다. 먼저 매란국극단의 단장 캐릭터 강소복은 여성국극으로 이름을 알렸던 임춘앵을 모티브로 했다. 실제 임춘앵이 이끌었던 극단이 가장 인기 있는 여성국극단이었던 것처럼 <정년이>에서 매란국극단의 인기가 독보적인 모습들이 나타난다. 또한 임춘앵이 가진 엄한 모습, 예술인으로서의 자존심 등이 강소복 캐릭터의 성격에 스며들어 있다.
매란국극단에서 여성국극의 왕자 역할을 도맡는 캐릭터 문옥경은 여성국극의 스타 조금앵에서 비롯됐다. 특히 조금앵은 여성팬의 간청으로 여수에서 올렸던 가상 결혼식 일화로도 유명한데, 이 일화가 <정년이> 속에 문옥경이 겪은 일로 언급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작품의 주인공 윤정년이 전라도 방언을 사용하는 것도 국극단 명창들의 출신과 관련 있다. 전라도는 소리의 고장이라고 불리기도 하고, 실제로 판소리 최초의 여자 명창 진채선을 비롯한 유명한 명창들이 남도에서 많이 나왔었다. 정년이가 소리에 재능을 가졌다는 설정은 출신까지도 고려해 부여된 것이다. 이렇듯 <정년이>의 캐릭터들은 실제 국극 배우들의 모습들을 바탕으로 만들어져 작품의 현실감과 몰입도를 높였다.
강정을 굽게 하는 <정년이>의 매력적인 요인들
네이버 웹툰은 ‘쿠키’라는 유료 결제 수단을 가지고 있다. 독자들은 유료 결제를 통해 미리 다음 내용을 볼 수 있지만, 동시에 일주일만 기다리면 다음화를 무료로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흥미롭고 궁금증을 유발하는 웹툰들은 독자들에게 유료 결제, 즉 쿠키를 굽는 행동을 유도하기 마련이다. <정년이>의 웹툰의 내용 특성상 이러한 쿠키를 ‘강정’ 등의 한과로 부르며 다음화를 미리 보며 작품을 감상하기도 했다. 강정을 구워버리면서까지 다음화를 미리 보게 만드는 <정년이>의 매력적인 요인들을 함께 알아보자.
여성서사 갈증을 채워주는 여성집단의 이야기
<정년이>에는 다양한 여성 캐릭터들이 나온다. 이는 대다수의 등장인물이 여성이기 때문에 가능한 결과이다. 좋고 나쁜 역할을 떠나 다채롭게 여성의 이야기를 그려냈다는 점이 인상 깊다. 못된 여성, 야망을 가진 여성, 열등감이 있는 여성 등 그동안 매체 속 익숙한 여성의 캐릭터의 한정적 묘사를 깨고 다양한 여성들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캐릭터들의 성격만큼이나 외관의 모습도 다양하다. 숏컷, 까무잡잡한 피부, 쌍꺼풀 없는 눈을 가진 캐릭터들은 사회적 여성성에서 추구하는 외관과는 사뭇 다르다.
<정년이>는 여성국극의 탄생 계기처럼, 가부장적이고 성차별적 사회에 자신의 방법대로 맞서는 진취적인 여성 캐릭터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당시대의 부조리한 모습을 꼬집는 듯한 캐릭터들의 발언과 행동은 현시대에 살고 있는 독자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자신의 모자람을 인정할 줄 알고 따뜻한 마음씨를 지닌, 꿈을 위해 모든 걸 바치는 주인공 정년이. 그리고 차별적인 시대에도 꿋꿋이 자신의 길을 걸어나가는 여성 캐릭터들. 여성이 주가 되어 주체적이고 다양한 역할을 맡아내는 <정년이>는 그동안 편안하게 볼 수 있는 여성서사 작품에 목말라있던 독자들의 갈증을 채워준다.
가 작품에서 눈에 띄는 점은 ‘여성연대’이다. <정년이> 속 여성들은 각자의 목표를 위해 경쟁하고, 여성국극을 지키기 위해 연대한다. 자신이 원하는 배역을 얻기 위해 정년이와 라이벌 구도로 나타나는 허영서는 기존의 스테레오 타입을 피해가는 여성 라이벌 캐릭터이다. 영서는 이유 없이 정년이를 시기하거나 질투하지 않고, 정년이가 가진 실력을 인정하며 정정당당하게 경쟁을 펼친다. 또한 정년이가 본격적인 여성국극 배우로 활동하며 팬과 배우 관계로 만난 여학교 학생 권부용과의 펼쳐지는 관계도 흥미롭다.
정년이를 중심으로 한 관계성 이외에도 여성 캐릭터 간의 긴밀한 사이가 잘 나타난다. 옥경과 혜랑이 서로를 의지하고 아끼는 모습, 같은 연구생으로서 고민하고 합을 맞춰가는 영서와 주란 등의 관계는 여성 간의 돈독한 우애를 보여준다.
실제 극을 감상하는 듯 생생한 연출
‘소리가 없는 웹툰인데 소리 듣고 소름 돋는 웹툰’. <정년이>의 베스트 댓글에 있는 감상평이다. 이 감상평은 <정년이>의 작가들이 구현한 뛰어난 기획과 연출을 잘 드러낸다. 본래 여성국극은 춤, 소리, 연기 세 가지 요소가 결합된 종합적인 무대 예술이다. <정년이>는 종합예술을 그림이라는 요소로 표현해 내는 웹툰화 과정에서도 극이 가진 매력과 특성들을 반영해낸다. 웹툰의 작화를 통해 같은 역할을 맡아도 배우마다 다른 캐릭터 해석을 적용해 연기한다는 점을 표현하고, 극의 가사와 대사 프레임의 모양에 변화를 줘 차별성을 더한다. 또한 이야기 전개 상 극중극의 중요한 내용이 등장하면, <정년이> 내용을 테마로 만든 비지엠을 적절히 활용하며 독자의 몰입을 돕는다. <정년이>의 극중극을 다룬 화를 보고 나면 마치 실제 한 편의 공연을 감상한 느낌을 받게 된다.
유튜브에 올라와 있는 여성국극에 대한 소개 영상, 무대 영상에서 ‘정년이 보고 왔다’라는 댓글들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정년이>의 서이레 글작가는 여성국극을 알리기 위한 의도로 이 작품을 만들었고, 그런 작품의 의도가 실제 여성국극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 여파로 작년 국립창극단에서는 웹툰 <정년이>를 원작으로한 창극 <정년이>를 올리기도 했다.
사라져가는 여성 문화 예술에 주목하고, 여성들의 이야기를 담아낸 웹툰 <정년이>. 여성 배우가 주연으로 설자리가 부족한 현재 공연계의 상황에서, 1940년대에 ‘젠더프리’ 공연을 실현한 여성으로만 구성된 극단, ‘여성국극단’을 다룬 <정년이>가 가진 의미가 더더욱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