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날씨, 나뭇잎의 색깔 등 계절의 변화를 알리는 수많은 신호가 있지만, 내게 시간의 흐름을 실감케 하는 존재는 일기장이다. 일기장을 한 장씩 빼곡히 채우다 보면 한 해의 변화가 더욱 선명하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기록은 기억을 이긴다’고 했던가. 물론 일상을 기록하기 시작한 게 이런 거창한 이유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지만, 일기를 쓰는 습관은 분명 여러 면에서 나를 긍정적으로 변화시켰다.
일기의 첫 문장
처음 일기를 접하게 된 것은 8살 무렵이었다.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이때부터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공책에 일상을 기록했다.
일기를 쓸 때 부모님께서 당부하셨던 게 한 가지 있는데, 바로 ‘나는’과 ‘오늘은’이라는 단어로 첫 문장을 시작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 단어로 일기를 시작할 경우 그 글은 하루의 일정을 나열한 무의미한 기록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글쓰기에 나름의 욕심이 있었던 나는 일기 작성에 제법 진지하게 임했고, 글의 첫 시작을 여는 다양한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깜깜한 구름과 별이 하늘을 뒤덮었다. (2010년 7월 4일)
일요일이라 모처럼 즐겁게 늦잠을 즐겼다. (2010년 4월 4일)
우리는 많은 어른들에게 파묻혀 살고 있다. (2011년 3월 30일)
‘나는’과 ‘오늘은’으로 일기를 시작하지 않는 것은 간단해 보이지만, 실은 매우 까다로운 원칙이다. 하루를 대충 돌이켜보면 ‘나는 무얼 했다’, ‘오늘은 어떤 음식을 먹었다’와 같은 사실밖에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욱 자세히 파고들면 하루 끝에 내가 잊고 있었던 순간의 감정과 생각들이 조금씩 기억나기 시작한다. 그날의 일과가 아닌 깨달음이나 감정이 글의 주인공이 되면서부터 일기를 쓰는 일은 점점 재미있어지기 시작할 것이다.
반복되는 일상 속 소소한 의미 찾기
영화 <해리포터>는 비교적 밝고 평화로운 분위기의 1편과 달리 시간이 흐를수록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를 띤다.
내가 쓴 일기장도 마찬가지다. 순수한 호기심과 즐거움으로 가득한 초등학생 시절의 일기와 달리 이십대 이후의 일기장은 고민, 후회 등 부정적인 감정으로 가득하다. 대학생이 되고 나서 처음으로 ‘일기장에 뭘 써야 하지?’라는 고민을 했다. 매일 똑같은 하루가 반복될 뿐인데, 여기서 기록할 마땅한 소재를 건지려니 막막함이 앞섰다.
대체 어릴 땐 어떻게 일기를 썼나 문득 호기심이 일어 일기장을 펼쳐봤다. 그때도 드라마틱한 일이라고는 일어나지 않는 평범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그럼에도 일기장에는 작은 일에도 큰 행복을 느끼는 어린아이 특유의 천진난만함으로 도배돼 있었고, 단조로운 일상에서도 소소한 즐거움을 찾아내는 능력 또한 번뜩였다.
어째서인지 이십대의 내게 이 능력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일기를 쓸 때만큼은 그날의 색다른 면을 발견하기 위해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따라서 오늘날의 나에게 일기장이란, 매 순간을 소중하게 여기기 위한 훈련과도 같다고 할 수 있다.
어릴 적부터 여태 일기 쓰는 것을 멈추지 않는 이유는 글이야말로 가장 완벽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글은 사진이나 동영상보다도 기억을 생생하게 담아낸다. 문체, 손글씨 등에는 심리와 감정이 고스란히 나타나고, 일기장의 디자인에서는 당시의 취향이나 관심사를 발견할 수 있다.
무엇보다 글은 내가 어떤 일을 했는지, 누구와 하루를 보냈는지와 같은 단순한 사실을 넘어 내면의 깊은 목소리를 가감 없이 기록한다. 과거의 수많은 ‘나’와 대화를 나누고 공감과 위로를 얻을 때야말로 내가 일기를 쓰기 잘했다고 느끼는 순간이다.
과거를 추억하고 싶어 할 미래의 나를 위해 오늘도 어김없이 일기장을 펼쳐 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