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하게 자란 거 보니 장손이구만!’
처음 이 말을 들은 순간,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 귀하게 자랐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지만, 설령 그렇다한들 그것이 내가 장손인 사실과 무슨 상관인가 싶었다.
친구들에게 조부모님과 어떻게 지내는지 물어봤다. 조금 충격이었다. 할머니 댁에서 받은 애정이 실은 대다수가 받아본 적 없는 보살핌이었음을 깨닫기까지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주변에서 저런 말을 하는 이유가 내가 무언가를 못 해서였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에는 부끄러움이 치밀었다. 대개 설거지 같은 집안일의 일종이었다.
<장손>은 이 같은 장손들의 편을 들어주면서도 애써 피했던 현실을 시사해 그들의 의중을 묻는 도발적인 영화다. 또한, 장손만이 아닌 2030 세대에게 손주이자 자식으로서의 생각을 꽤 직설적으로 질문해 서늘하기도 하다.
영화에서 가장 큰 심적 변화를 느끼는 ‘성진’을 그려내는 방식에서 이를 알 수 있다. 일례로 초반에 ‘성진’은 자신이 오자 에어컨을 틀거나 누나에게는 손도 못 대게 했던 전을 허락하는 할머니 ‘말녀’의 행동에 예삿일처럼 아무런 리액션을 취하지 않는다. 그러나 일련의 일들을 겪으며 점차 자신의 존재가 그에게 어떠한 의미인지 생각에 빠진 뒤로 할아버지를 나름대로 보필하려 든다.
이러한 행동이 ‘성진’이 단순히 부담에 쫓겨서인지 아니면 책임이 생겨서인지 그 의중에 대해 영화는 끝까지 답을 내리지 않고 관객에게 차례를 넘긴다. 관객이 어떤 선택지에 마음이 가느냐에 따라 조부모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맞닥뜨리는 당혹스러운 순간이다. 그간의 기억을 되돌아보게 하는 영화 앞에서 관객은 관을 나가지 않는 이상, 피할 수 없는 고민을 맞이하는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장손>은 무섭기까지 하다. 특히 남겨짐에 대한 잔상이 그렇다. 카메라는 손주가 할머니 댁을 떠나면 끝까지 손을 흔들던, 남겨진 그들을 시종일관 비춘다. 이윽고 마지막 장면에서 ‘성진’을 마중하고 돌아가는 할아버지 ‘승필‘의 뒷모습만을 좇는 롱숏은 순식간에 남겨진 이를 관객으로 뒤바뀌게 한다. 알지 못했던, 알고 싶지 않았던 조부모의 마음속 짐이 선명히도 밀려오고야 마는 때이다.
영화가 말하는 조부모-손주 간의 개념을 인지했다면 영화가 거시적인 시각으로 전통적인 가족상에서 오늘날 장손의 위치가 어느 지점인지를 다루고 있다는 사실 또한 논해야만 한다. 작중 ’승진‘은 두부 공장이라는 가업이나 온 가족의 거사인 제사, 돈 얘기로 분열되는 가족 등 여러 사건에 처해 있다. 이들은 곧 장손으로서의 운명과 다른 세대로서의 꺼림칙함 사이에서 ’승진‘이 혼동하도록 유발한다.
제사는 소멸해가고 가업을 잇기란 당연하지 않은 형태로 변모 중인 세상에 2030 세대 특히 장손은 변화의 과도기에 끼어있다. 그들은 어른들의 가정사 얘기에 끼어들지 못해도 이미 많은 걸 보고 들어버린 ‘어린 애이자 성인’이다.
영화는 이러한 장손(2030 세대)의 고달픔을 고스란히 전달한다. 막중한 사명을 전가하는가 하면 여의하길 바라는 위로도 건넨다. 대가 없는 사랑을 주는 조부모의 유산을 회피가 아닌 보다 어떤 자세로 받아들일지 <장손>은 끊임없이 던진다.
겨울의 끝자락에서 피어날 새로운 봄을 고대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