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평범한 우린 언제 죽으려나 [도서/문학]

도서 <이 안에 당신의 수명이 들어 있습니다>(니키 얼릭)
글 입력 2024.10.17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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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죽는지 아는 이야기


 

<이 안에 당신의 수명이 들어 있습니다>는 22세가 넘은 전 세계 모든 사람이 자신의 남은 수명을 알게 된 세상의 이야기다. 어느 날 갑자기 사람들의 앞에 ‘이 안에 당신의 수명이 들어 있습니다’라는 문구가 적힌 상자가 나타나고, 그 안에는 끈이 하나 담겨 있다. 상자와 끈의 정체에 대한 혼란도 잠시, 그것을 누가 어떻게 만들어 놓은 건지는 여전히 알 수 없지만 그 끈의 길이가 그 주인의 수명과 직결되어 있음은 누구나 부정할 수 없는 사실로 밝혀진다. 끈의 길이가 길면 수명이 긴 사람, 끈의 길이가 짧으면 수명이 짧은 사람. 정체에 관한 혼란은 줄어들었으나 이는 결국 더 큰 세상의 혼란을 의미한다.


자신의 수명이 짧다는 사실을 알게 된 어떤 사람들은 돌발 행동을 한다. 퇴사하거나, 훌쩍 여행을 떠나거나. 연인은 결혼을 서두르기도 하고, 반대로 헤어지기도 한다. 개인의 일탈 정도였던 돌발 행동을 넘어서, 폭력성을 가진 케이스가 몇 번 화제가 되며 문제는 커진다. 끈이 짧은 사람들을 향한 우려와 동정은 점점 공포와 적대로 변한다. 이 마음을 적극 활용하는 정치인이 등장하며 끈이 짧은 사람들을 향한 차별이 생겨난다. 공직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끈을 필수로 확인하고 길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일반 회사에서도 끈이 짧으면 장기 프로젝트에서 배제된다. 끈이 짧은 사람은 보험, 입양, 대출 등에서 모두 어려움을 겪는다. 사람들은 이제 ‘긴 끈’과 ‘짧은 끈’으로 나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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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에이미


 

소설은 이 혼란을 마주한 8명의 시점으로 전개된다. 멀리서 혹은 가까이서 얽히고설킨 사람들이지만 끈의 길이도 제각각, 처한 상황도 제각각이다. 그중 제일 관심이 가는 대상은 ‘에이미’다. 여러 주인공 중에서도 가장 중심인물은 그라고 생각하며 읽었다. 일단 이 소설 속에서 유일하게 로맨스 서사를 갖는 사람이고(다른 커플도 있긴 하나 그들은 이미 파국이거나 이미 안정 단계에 이르렀다) 공감하기 좋은 성격이기도 하다. 가장 평범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에이미는 평범한 사람이다. 짧은 끈을 향한 차별이 부당하다고 생각하고 그들을 위해 조금 힘쓰고 싶다는 마음도 있지만 정작 자신의 언니 ‘니나’가 짧은 끈 연인과 결혼한다고 할 때는 단번에 축하하지 못한다. 자신의 썸남 ‘벤’이 짧은 끈임을 알았을 때는 벤을 피한다. 선하고자 하고 실제로 선하지만, 당장 내 일로서 문제를 마주할 때는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는 평범한 사람이다. 우리처럼.


에이미에게 공감하기 좋은 이유는 하나 더 있다. 다른 인물들은 그 과정과 결과가 어떻든 간에 자신의 상자를 열고 제 끈의 길이를 확인했다. 하지만 에이미는 열어보지 않기를 선택했다. 별로 알고 싶지 않고, 알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주요 인물 중 유일하게 자기 끈의 길이를 모르는 사람이다. 자신의 수명을 모르는 사람이다. 우리처럼.


하지만 바로 이 점 때문에 나는 책을 읽으며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았다. 다음 장에서 에이미가 죽어버릴까 봐. 다른 인물의 수명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었는데 에이미는 그럴 수 없었다. 그리고 더 속 터지는 점은 에이미는 자신의 끈이 긴 사람처럼 군다는 점이다.

 

 

 

평범한 에이미는 언제 죽으려나


 

에이미의 언니이자 또 다른 주요 인물인 니나의 끈이 길다는 소식을 들은 뒤, 언니와 나는 자매이니 언니의 수명이 길다면 나도 그렇겠지, 라는 말을 하긴 했지만 그건 그냥 언니의 걱정을 덜고자 하는 우스갯소리에 가까운 이야기이지, 그의 끈이 길다는 근거가 되어주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에이미는 자신의 끈이 긴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고 분명 그렇게 생각한다. 너무 확신하고 있어서, 실은 에이미가 상자를 열어 긴 끈을 보는 장면이 나왔는데 내가 훌훌 책장을 넘기다가 놓친 건가 싶어 다시 읽어볼 정도였다(그리고 내가 놓치지는 않았다는 사실만 확인했다). 내가 일찍 죽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절대 고려하지 않는다. 우리처럼.


그렇다고 ‘내 끈? 길지 않을까? 그럴걸?’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에이미가 스스로를 은연중에 긴 끈의 일부로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장면이 많다. 언니 니나와 그의 끈이 짧은 연인의 결혼을 반대하는 모습이, 같은 이유로 썸남 벤과의 연애를 망설이는 모습이 그렇다. 이때의 에이미는 니나와 싸우는 바람에 그의 결혼식에도 초대받지 못하고, 고백을 한 벤에게서도 무작정 도망쳐 숨는다.


덩달아 내 스트레스는 극에 달한다. 만약 이 시점에, 소중한 모든 것에서 멀어져 고립된 시점에 에이미가 죽는다면. 에이미는 물론이고 그 주변 인물도 모두 후회와 슬픔에 허덕일 것이다. 여기서 주변 인물에는 독자인 나도 포함된다. 작가의 입장에서는 매우 성공적이라 볼 수 있는 상황. 그런 재능 있는 사이코패스 같은 작가는 충분히 많다. 더 어릴 적 책을 읽을 때는 그런 사이코패스에게 많이 살해당했지만(나 말고 가상 인물이), 지금의 나는 멍청히 당하지 않고 준비된 자세로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나 말고 가상 인물의 죽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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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감한 에이미는 언제 죽으려나


 

… 다행히 사이코패스는 아직 칼을 빼 들지 않았다. 다른 사이코패스보다 좀 더 신중한 사이코패스인가 보다. 그리고 다행히 우리의 에이미는 평범보다 조금 더 용감한 사람인가 보다. 아니면 그가 창작물 속 사람이어서 그런지도 모르고. 그가 창작물 속 사람이어서 더 용감한 사람인지도 모르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에이미는 언니와 화해해 결혼식에 참가하며 두 사람을 진심으로 축복한다. 에이미는 결국 벤을, 짧은 끈과의 짧은 사랑을 선택한다.


하지만 이때도 나는 마음을 내려놓지 않는다. 인간을 가장 행복한 때에 추락시키기를 즐기는 사이코패스 같은 작가도 익숙하다. 에이미가 큰 결정을 내리고 벤과 산뜻한 결혼 생활을 시작하려는 때에, 한정적인 시간이지만 그만큼 행복도 보장된 시간이 펼쳐지려는 때에 에이미를 죽여버릴 속셈이라는 걸 난 알고 있다. 자신이 먼저 떠날 걱정만 했지 제 눈앞에서 에이미가 떠나리라곤 상상조차 해보지 않은 벤에게서 에이미를 뺏어갈 속셈을, 내가 모를 것 같냐 이 사이코패스야.

 

 

 

평범한 나는 언제 죽으려나


 

나는 계속 사이코패스와 신경전을 벌이느라 발발 떨며 책장을 넘기다가 이들이 봄을 맞이할 때야 조금 안심한다. 소설의 챕터는 사계절로 나뉘어 여름부터 시작한다. 가장 격렬한, 격동의 시기 여름에 상자가 처음 나타나고 온갖 일이 일어난다. 그리고 안정되어 가는 것인지 얼어붙어 가는 것인지 알 수 없는 가을과 겨울을 지나, 봄을 맞이한다. 새로운 챕터가 펼쳐짐을 알려주는 페이지에 적힌 ‘봄’이라는 글자를 인식하고 나서야 몸에 들어간 힘을 풀 수 있었다. 이내 다시 몸에 힘을 주긴 했지만(봄에도 사람은 죽으니까) 이쯤 읽었을 때는 작가가 그렇게 사이코패스 같은 사람은 아니라는 확신을 가져 조금은 마음이 편안했다.


책을 다 읽은 지금은 작가에게 사이코패스가 아니라 작가라는 칭호를 돌려준다. 작가가 만든 결말까지 읽은 감상은 이렇다. 그는 나보다는 더 낭만적이고 나보다는 덜 잔인한 사람. 그렇다고 잔인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건 아니지만, 사이코패스가 되기에는 부족함이 많은 사람인 듯하다. 하지만 우리의 세상은-또는 삶, 운명, 신, 어쩌고저쩌고는-사이코패스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는지라. 낭만도 차고 넘치지만 잔악성도 덩달아 흘러넘치는 게 이 세상이다. 그래서 이 글을 쓰는 지금, 평범한 나는. 소박하게 그냥 이 글이 공개될 때까지만이라도 숨이 잘 붙어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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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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