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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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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영화에 대한 모든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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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과 빌런


 

사람들은 세상을 구원할 강력한 영웅을 원하는만큼 악하고 힘이 센 빌런을 원한다. 영웅과 빌런이란 선과 악의 차이만 있을 뿐 그 영향력은 진배없다. 그들은 일반 사람들이 해내지 못하는 일을 한다. 그럼으로써 무언가를 대표한다.

 

모든 영웅-빌런 서사는 어쨌든 결국 선이 악보다 강력하다는 이야기로 끝난다. 그래야 안전하게 '이야기'로만 취급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픽션은 너무 안전해지는 순간, 일상처럼 지루해진다. 게다가 악 또한-누군가 말했듯이-'진부'하게 비춰지기도 한다. 때문에 각본가들은 여러 장치와 복잡한 서사를 동원해 선에 대항해 악의 매력을 한껏 돋보이게 해야 했다.

 

각본가들은 악과 관객 사이의 거리를 잠시 좁히거나, 관객을 선과 잠시 멀어지게 하는 등 다양한 변화를 시도했다. 하지만 그러한 악의 차별화 시도가 선의 개입, 각성 속에서 결국 무너지거나 패배하도록 그 거리를 확실하게 설정해 두었다. 고속도로의 가드레일처럼, 최소한의 윤리를 결말에 배치함으로써 악이 영화관 밖으로 배출되지 않도록 했다. 그렇게 영화의 영역에서, 픽션의 영역에서 악을 가두었다. 악이 거기서만 배회하도록.

 

 

 

<조커>(2019)


 

하지만 <조커>(2019)는 악이 픽션의 세계를 탈출하는 이야기였다. 이 이야기에는 빌런에 대항할 영웅이 등장하지 않는다(배트맨은 어린 아이로 잠시 등장한다). 정의 대신 극심한 빈부격차가 신념처럼 자리하고 있다. 영웅은 없고 빌런만 있다. 그 빌런은 고담이란 도시, 궁핍과 차별 그 자체인 환경 속에서 탄생했다. 도시에 속하던 '아서 플렉'이 도시를 대변하는 빌런 '조커'가 되기까지의 과정이 작위나 큰 자극 없이 핍진하게 묘사되면서, 사람들은 자신의 뿌리에 잠자고 있던 불의, 부조리에 대한 막연한 저항감을 '악'으로 뭉뚱그려 인식했다. 사람들은 저항감을 충족시키는 '악'에 매료되었다. <조커>는 말하자면 선이 없는 세상 속에서 악이 인식되고 이식되는 이야기였다. 조커가 광대 분장을 하고 느릿한 춤을 출 때, 거기에 깔리는 무겁고 끈적거리는 음악을 들으면서 느낀 이질감은 주삿바늘을 바라볼 때의 그 느낌과 비슷했다. 실은 나 또한 그 영화를 본 날 처음으로 '악'에 감탄했던 것 같다.

 

<조커>(2019)의 후속작 <조커 : 폴리 아 되>(2024)는 악의 승리를 철저하게 배반한다. 대중-그들이 누구인지에 대한 논의는 제외하자-의 혹평은 어쩌면 전작의 반향을 반영하지 않는 후속작을 향한 반항일지도 모르겠다. 후속작이 전작을 배반한다니? 그게 있을 수 있는 이야기인가?전작이 없었으면 너도 없었어. 그러나 이 논리에는 후속작이 전작의 흐름을 이어가지 못했다는 비탄만이 아니라, 전작에서 완벽하게 설계된 악의 기쁨을 후속작이 이어나가지 못했다는 비난 또한 담겨 있는 것 같다.

 

1편은 서사적으로 치밀하다. 한 개인을 밑바닥의 밑바닥까지 끌어내린다. 그 개인은 거기서 각성한다. 이는 '드라마'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만일 조커가 그런 과정으로 영웅이 되었어도 꽤 볼만한 영화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드라마가, 그렇게 차차 쌓아올린 조커라는 '건축물'이 애초에 설계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사람들은 뒤늦게 깨달았다(어쩌면 알고도 그랬을 수도 있다. 매력적이니까). 재료 하나하나는 훌륭할지 몰라도 그 전체적인 모습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전작과 후속작의 관계


 

일상에서 건축물이 지어지는 모습은 쉬이 목격하지만 허물어지는 모습은 보기 드물다. 건축물이란 인간의 욕망을 닮아 쉼없이 세워진다. 도중에 계획이 틀어져 중단 되기도 한다. 그러나 함부로 허물지 않는다. 이미 존재하는 이상 그것을 무너뜨리기란, 없던 것처럼 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커의 후속작은 전작의 완성도 높은 건축물을 무너뜨린다. 탄생한 이상, 존재하고 있어야 할 욕망을 가감없이 무너뜨린다. 애초에 그 욕망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전작과 후속작의 관계는 마치 젠가 게임과 같다. 젠가 게임은 시작하기 전이 제일 완벽하다. 그 자체로는 무너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게임이 시작되면 원래의 완벽한 형태와 구조에서 하나씩, 빼내어 위로 하나하나 쌓아올려야 한다. 그렇게 위로 높아질수록, 지면이라는 기준과 멀어질수록 전체는 점점 위태로워진다. 이처럼 후속작은 전작의 완벽한 재료를 사용해야 하며, 빈공간이 생긴다는 위태로움이 전제되어 있다. 그러나 높아져도 무너지지 않고 유지하면 사람들은 열광한다. <조커 : 폴리 아 되>는 차츰차츰 위로 쌓아가다 그 전체를 단숨에 무너뜨린 작품이다. '높아짐'을 기대한 사람들에게 '무너짐'을 보여준 작품이다. 그러나 무너뜨리는 게 '의도'였음이 다분하게 보이는 작품이기도 하다. 어떤 동기가 완벽한 전작에서 하나씩 빼내어 위로 쌓는 '젠가 게임'을 하고 싶게 만든 걸까. 그리고 후속작은 전작에서 무엇을 빼내어 위로 쌓아올린 것일까. 무엇을 버려 전체를 무너지게 한 것일까.

 

 

 

사랑에 빠진 조커


 

영화는 조커(혹은 아서 플렉)가 고담시에서 다섯 명(자신의 어머니까지 하면 여섯 명)을 살해한 혐의로 수감되고 2년이 지난 시점에서 전개된다. 아서는 변호사를 접견하러 가던 도중 교도소의 저위험 수감자군에 속한 '리 퀸젤(레이디 가가)'을 우연히 만난다. 갑자기 나타난 그녀는 그에게 말한다. 당신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다고. 당신과 만나기 위해 이곳에 왔다고 한다. 그 짧은 대화와 주고 받은 눈빛으로, 조커는 그녀와 사랑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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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조커에게 사랑이라는 새로운 욕망을 심어주면서 전개된다. 사랑의 표현은 '뮤지컬'로 나타난다. 뮤지컬이라니. 뮤지컬적 요소는 이 영화가 욕먹는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긴장감 넘치는 대화 도중 삽입되는 뮤지컬, 경쾌한 리듬과 꿈을 꾸는 듯한 표정으로 노래하는 모습은 영화에 대한 이질감을 극한으로 치닫게 한다. 이 영화 속 두 주인공은 뮤지컬이 들어간다는 예고를 듣고 사람들이 기대한 것-무겁고 악독함을 노래하는 뮤지컬-과는 전혀 다른, '라라랜드'식의 꿈같은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1편에서 조커 특유의 악, 엄숙함, 무거움을 보여주던 느리고 장엄한 음악과 기이한 춤이 사라지고 순수한 사랑, 열정적이고 뜨거운 사랑을 노래하는 뮤지컬이 끼어든다. 이 끼어듦에 사람들은 당황한다. 하지만 그 끼어듬이 '사건'을 만든다. 1편의 완벽한 젠가에서 한 피스를 빼내어 그 위로 쌓는다. 리 퀸젤은 무력하게 수감 중이던 아서 플렉에게 활기를 불어넣는다. 불을 질러 탈옥을 도와주기도 하며, 그의 독방에 들어가 사랑을 나누기도 한다. 느닷없이 나타난 이 존재는 왜소한 골격, 지저분한 내복 차림, 수염 자국 가득한 아서 플렉을 '조커'이고 싶게 만든다.

 

그 감정, 충동은 굉장히 위험하다. 조커는, 아서 플렉은 5명을 죽인 혐의로 재판에 넘겨져 있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그의 변호사는 재판에서 이기려면 '조커'를 또다른 인격, 극한으로 치닫을 때 튀어나오는 개별적인 인격으로 취급해야 한다고 아서 플렉을 설득하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재판을 앞두고 그의 마음속에 '사랑'이 피어난다. 모든 사랑이 일정 부분 진실함을 담고 있듯이, 아서 플렉에게 찾아온 사랑은 그를 진실한 '조커'이고 싶게 만든다.

 

 

 

재판정 = 무대?


 

영화의 주요 무대는 '재판정'이다. 이 재판정은 '무대'와 혼동되기도 한다. 판사는 재판정의 엄숙함을 요구하지만, 아서 플렉은 그조차도 우스워 보인다. 그의 등장에 환호하는 방청객들은 자신의 쇼에 찾아온 관객 같다. 그의 연인, 리 퀸젤은 어서 무대를 함께 하자는 듯 관객석에 앉아 그를 쳐다보고 있다. 게다가 이 모든 게 생중계 되고 있다. 2년 전 조커가 사람들 앞에서 사람을 쏴 죽였던, 그 무대 같다.

 

재판정을 무대로 혼동하도록 구성된 장면들은 '조커'를 자기자신과 동일시하려는 아서 플렉의 내면을 보여주고 있다. 게다가 그전까지 아서 플렉이 리 퀸젤과 현실 속에서 노래하던 뮤지컬은, 멋있는 옷을 갖춰입은 조커와 할리 퀸이 등장하는 상상 속 뮤지컬로 뒤바뀌어 그의 상상 속에서 재생되기 시작한다. 그 환상 속에서 그는 이미 '조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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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재판정이라는 무대와 조커를 사랑에 빠뜨린 리 퀸젤은 아서가 놓인 현실을 단번에 '환상'으로 비약하게 해준다. 그리고 환상을 현실과 동일시 하고픈 아서의 욕구, 욕망을 보여준다. 하지만 현실의 그가 '조커'임이 그 스스로에 의해 밝혀지는 순간 아서플렉의 혐의는 유죄가 될 것이며, 그는 검사 하비 덴트가 구형한 것처럼 '사형'을 언도받을 것이다. 조커가 '조커'면 죽는다는 아이러니. 정의는 그의 삶을 움켜쥔 채, 그가 자신을 속여야 살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그러나 조커는 자신이 서 있는 재판정이란 무대가 정의의 무대라는 걸, 그리고 자신이 이미 정의의 그물에 걸려들었다는 걸 모르고 노트에 낙서만 끼적이고 있다.

 

그런 낌새를 눈치 챈 변호사는 리 퀸젤이 아서에게 많은 거짓말을 했다고 밝혀 둘을 떼어놓으려고 한다. 아서는 이에 잠시 흔들리지만, 리 퀸젤이 찾아와 그에게 말한다. 과거의 우리가 뭐였든 간에 앞으로의 우리가 중요하다고. 그녀는 그가 살던 집으로 이사갔으며 그의 아이를 가졌다. 조커가 과거엔 아서 플렉이었듯, 그리고 아서 플렉이 조커가 된 지금에서는 그 사실이 전혀 중요하지 않듯이, 그녀의 거짓된 과거도, 그녀가 조커의 편이 되고자 하는 지금에선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것이 된다. 그렇게 그 사랑의 뿌리는 깊어지고 꽃잎과 줄기는 돋아난다.

 

자신만만해진 조커는 계속해서 아서와 조커가 다르다는 변호사를 향해 해고 선언을 한다. 이 고집불통의 사랑에 빠진 악인은 거대한 악을 기꺼이 변호해주려는 변호사를 버리고 변호를 자기가 맡겠다고 선포한다. 사람들은 조커가 조커의 정체성을 되찾았음에 기뻐한다. 열광한다.

 

그러나 이때부터 의문이 들기 시작한다. 그가 조커가 된다 해서, 그게 우리한테 무슨 소용일까?

 

 

 

악의 (무)소용


 

조커는 틀림없는 악이다. 그가 빌런으로 등극하게 된 계기는 그날의 생방송이다. 매체를 타고 그의 행동이 삽시간 안에 퍼졌기 때문에 그는 빌런이 될 수 있었다. 아서 플렉이라는 사람 자체는 강하지 않다. 그 자체는 힘 없는 사람이다. 그 자체는 유별난 사람이기도 하다. 총은 누구나 쏠 수 있다. 결심과 충동만 다를 뿐이다. 지금 아서는 '조커이려는 것' 말고 무슨 목적을 가지고 있을까? 아서는 '진짜 조커'가 된 순간부터 무엇을 꿈꿀 수 있을까? 농담으로 사람들을 웃기는 것? 주인공으로 무대에 서는 것? 그의 동반자 리 퀸젤은 '산을 쌓는 것'이 목표라 말한다. 그것은 무슨 의미일까?

 

그를 보고 열광하는 사람들도 목적이 같을까? 사람들도 그의 무대에서 농담을 들으며 웃고 싶은 걸까? 아니면 산을 쌓고 싶은 걸까? 조커에 흠뻑 빠져 열광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조커라는 악의 대표자에 올라타 자신의 악행을 정당화하고 부차적인 것으로 만들면서 더한 악행을 꿈꿀 뿐이지 않은가? 조커는 자신이 저지른 살인으로 고담시의 무수한 시민들에게 악의 대표자로 뽑혀 악의 힘을 부여하고 있는 관념적 대상에 불과하다. 스스로 빌런임을 선언한 인물이 아니라 고담시의 수많은 시민들의 추대로 빌런이 되어 추앙받은 인물이다. 그는 틀림없는 악이지만, 악의 허수아비이기도 하다.

 

조커를 추앙하는 사람들이 원하는 더한 악행은 어떤 것일까. 그 파장은 어디까지 영향을 끼칠까. 그러나 그게 어디까지든 간에 그것은 마치 불처럼, 더이상 가연성물자가 없어지면 그 연소를 멈출 것이다. 악은 그처럼 무목적성이며, 가연성물자처럼 힘없는 대상에 의존하는 기생충에 불과하다. 그때부터 나는 영화 초반에 등장한 애니메이션처럼, 조커란 인물과 분리되었다.

 

 

 

현실의 증인들


 

재판정답게 증인들이 등장한다. 연구자들은 아서 플렉과 관련된 신상 기록, 심리 검사, 일기장 등을 보면서 그가 이상 정신을 가진 것은 분명하지만 인격이 분리되어 있다고는 인정하지 않는다. 아서 플렉의 지인들도 등장한다. 그들은 조커가 저지른 살인의 목격자이자 생존자이며, 조커가 죽이지 않기로 한, 말하자면 '자유인'이다. 그러나 살아남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괴로운 생활을 이어나가고 있다. 그의 이웃과 동료들은 조커에 대한 '살아있는' 피해자가 되어 있다. 이렇듯 영화는 '살인의 무대' 밖의 인물들을 무대로 불러옴으로써, 현실이 무대로 흘러들게 하는 식으로 무대와 현실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들고 있다. 이때쯤 몇몇 관객들은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조커는 명백한 살인자라고.

 

변호사를 해고한 날, 구치소로 돌아온 그는 자신이 모욕한 교도관들에게 심한 폭행을 당한다. 조커에게 열광한 다른 수감자들도 교도관들에 의해 제압당한다. 조커에게 의존했던 한 수감자는 조커를 응원하다 폭행으로 사망한다. 그때부터 조커의 눈빛은 아서 플렉의 눈빛으로 격하된다. 그날 밤이 그에게 무슨 깨달음을 주었던 것인지, 최후 변론에서 아서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조커가 아니다. 조커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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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청객들은 야유를 퍼붓고, 할리 퀸으로 분장해 온 리 퀸젤은 밖으로 뛰쳐나간다. 리 퀸젤이 말하던 산은 언덕이 되기도 전에 허물어졌다. 그 산의 주인이 될 수도 있었던 아서 플렉은 영락 없는 죄인처럼 피고인석에 앉아 있다.

 

 

 

조커 -> 아서 플렉


 

판결을 앞두고 잠시 휴정. 아서 플렉은 리 퀸젤에게 전화를 건다. 그녀는 받지 않는다. 아서 플렉은 이어지는 음성사서함에 대고 조커가 아닌 자신을 사랑하달라며 슬픈 노래를 시작한다.

 

"그대를 붙잡을 수 있다면 그대의 그림자가 되어도 좋으리."

 

여기서 그대는 리 퀸젤 같기도 하고 아니면 그 자신이 부정한 조커 같기도 하다.

 

아서 플렉은 이제 판결을 들으러 간다. 배심원단은 살해 당한 인물 하나하나와, 그 살인에 대한 죄의 유무를 하나씩 읊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때, 뒤에서 폭발이 일어난다.

 

재판정이라는 무대는 이제 바깥 현실과 뒤섞인다. 관객들이 퇴장하여 극장 밖의 현실 세계로 나가듯, 아서 플렉은 주춤거리며 부서진 건물 밖으로 나온다. 그 주변 또한 아수라장이다. 조커로 분장한 누군가 아서를 알아보고 급히 차에 태운다. 그들은 도망치려 한다. 아서 플렉을 보호하려 한다. 그가 다시 조커임을 선언하게 하려면 어쨌거나 아서 플렉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서는 이제 그런 것이 필요없다. 그에겐 사랑이 필요하다. 떠나간 사랑을 붙잡아야 한다. 아서 플렉은 차에서 내려 도망친다. 조커로부터, 경찰로부터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친다. 도피한 사랑을 찾기 위해, 모든 것으로부터 도피한다.

 

그렇게 마주한 계단. 조커로 각성하며 경쾌한 발걸음으로 하나하나 리듬을 타며 내려왔던 그 계단에 리 퀸젤이 서 있다. 그는 그 계단을 올라간다. 마주한다. 그녀에게 떠나자고 한다. 그러나 그녀는 이별을 통보한다. 그를 거기에 두고 그녀는 미련없이 떠난다. 조커가 아닌 아서 플렉, '범죄자' 아서 플렉은 그 자리에서 붙잡힌다. 1편에서 각성의 장소였던 곳이 2편에서 추락의 장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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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구치소. 이제 그는 사랑이 없던 때처럼 무관심하고 무기력하게, 때때로는 농담을 건네며 거기서 살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형을 선고 받고 전기 의자 위에 올라가 생을 마감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누군가 면회를 온다. 아무런 기대감 없이, 혹은 기대감을 감춘 채 면회실로 향하는데 누군가 그를 불러세운다. 항상 멀찌감치에서 아서를 지켜보던 이름 모를 수감자. 수감자는 아서의 전매 특허인 '농담'을 아서에게 하고 싶다고 한다. 아서는 겸허히 들어준다. 사이코패스에 관한 농담을 끝낸 남자는 그 순간 아서를 찔러 죽인다. 찔러 놓고서 낄낄거리는 수감자, 쓰러져서 피를 흘리는 아서. 그 복도에는 아무도 오지 않는다. 아서는 그렇게 비웃음 앞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다.

 

 

 

무너진 잔해 속에서


 

영화는 '조커'라는 정체성을 뒤집어씀으로써 악의 대표자에 등극한 아서 플렉을 사랑, 폭력, 두려움 등의 감정을 겪게 하며 악의 영역에서 탈락시키고 끝내 죽음으로 내몰고 있다. 이토록 이질적이고 불협화음이 느껴지는 붕괴에 관객들은 허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이처럼 완벽한 윤리적 처형이 있을까? 이렇지 않았다면 조커의 영향력은 픽션의 세계, 영화관 밖으로 뛰쳐나와 사람들을 움직이게 했을지도 모른다. 그 자체로 목적없고 저돌적이며 기생충처럼 끔찍한 악의 마음을 피어나게 했을지도 모른다. 전작에서 탄생한 완벽한 죄를, 후속작은 단죄해야 했다. 이 영화는 픽션을 지키기 위한 최선의 단죄이기도 하다. 그 지저분한 잔해 속에서 관객들은 형편없는 악을 마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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