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의 빛이 좋다고는 하지만 검어지기를 자주 한다.
바람소리가 맑다고는 하지만 그치는 적이 많구나.
깨끗하고도 그칠 것 없기로는 물뿐인가 하노라.
- 윤선도 <오우가>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흐르며, 스스로를 깨우치는 물의 모습은 무척 아름답다. 10년이 넘도록 전통예술을 새로이 선보여온 수림뉴웨이브가 설정한 올해의 키워드는 ‘독파(獨波)’다. 독창적인 예술관으로 작품 활동을 이어온 예술가들이 만들어온 삶과 표현의 물결을 들어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다. 수림을 통해 자신만의 목소리를 악기 삼아 이야기를 풀어온, 그야말로 '독파'에 어울리는 소리꾼 송보라의 판소리 공연을 관람했다.
송보라 소리꾼은 적벽가의 군사설움 대목, 햄릿 창작극을 선보였다. 예기치 못한 때 전쟁에 불려나와 가족과 생이별해야 했던 민중의 설움, 그리고 억울한 아버지의 죽음에 맞서 싸우고자 했던 햄릿의 모습이 담긴 장면을 채택해 공통적으로 '한'이라는 주제를 취했다.
![[크기변환]KakaoTalk_20241004_223819575.jp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410/20241004224614_ebcygweg.jpg)
적벽가 장면을 내보일 때 긴장한 듯한 모습이 역력했던 송보라 소리꾼은, 곧이어 햄릿을 통해 자신만의 재해석을 선보이며 누구보다 자신감 있고 살아있는 눈빛을 보여줬다. 마치 누군지 모를 불특정 다수의 형태를 띄는 민중으로 시작해, 햄릿이라는 주체로 시선이 좁혀지며 더 생동감이 더해진 듯하다.
햄릿의 한을 셰익스피어의 문자 그대로 담지 않고, 송 소리꾼의 고향이기도 한 전라도 사투리와 한국식 정서를 집어넣은 점이 인상적이다. *레어티즈와 햄릿의 검술 대결을 우리가 흔히 상상할 수 있는 유려한 기술이나 숨막히는 긴장감 속 한 장면으로 묘사하기보다, 치열한 손놀림 사이에 드러나는 익살을 살렸다. 검끼리 첨예하게 부딪히는 연출보다 레어티즈와 햄릿이 나누는 대화에 집중하고, 그 안에서 햄릿이 느끼는 역동적인 감정이 전해지는 식이다.
*레어티즈 : 아버지를 잃은 햄릿이 복수 과정에서 숙부 클라이디우스 대신 죽음에 이르게 한 재상 폴로니우스의 아들. 햄릿의 연인 오필리아의 오빠이기도 하다.
![[크기변환]KakaoTalk_20241004_223819575_03.jp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410/20241004224703_lhahoxyu.jpg)
송 소리꾼은 사뭇 엄숙하고 고전적인 원작 햄릿의 분위기를 상상하기보다는 그 같은 상황에 처한 인물의 '감정' 자체를 해석하는 데 집중했다.
송 소리꾼이 햄릿의 수많은 장면 중 아버지와의 대화 - 검술 시합 두 가지를 선택한 것이 이를 잘 보여준다. 4대 비극이라는 위상에 걸맞게 햄릿은 삶과 죽음 사이 무수한 비극을 내포한다. 숙부 클로디어스가 자신의 형을 죽이며 극 밖으로부터 시작된 형제 간의 질투와 살인 / 아버지를 죽인 삼촌과 결혼한 어머니를 바라보는 햄릿의 미움과 사랑 / 햄릿과 오필리아의 이루어질 수 없었던 사랑 등이 모두 한 데 모여 작품을 완성한다.
그중에서도 검술 시합은 등장인물 간의 감정이 가장 맞부딛히는 장면이다. 그야말로 감정을 창의 형태로써 최고조로 내뿜는 판소리에 적합하지 않을 수 없다. 숙부의 계략으로 아버지를 잃고, 그 숙부와 곧바로 결혼해버려 밉지만 미워할 수 없는 어머니 앞에서 선보이는 검술 경기. 그리고 이런 햄릿을 향해 복수의 칼을 갈아온 레어티즈까지, 많은 감정이 교차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작품에 '나'를 담는 과정을 더 세세하게 살펴보면 많은 요소들이 저마다의 역할을 해주고 있다. 창작극에 삽입되는 곡의 작업 역시 이끌어가는 송보라 소리꾼은 자신이 곡을 만드는 과정을 두고 흐름의 높낮이를 "휘리릭" 그려나간다는 표현을 썼다. 한음 한음 조화를 기준으로 곡을 만들어가기보다, 그 장면에서 보여주고 싶은 감정과 느낌을 곡조로 표현하는 데 집중해왔다는 뜻이다.
![[크기변환]KakaoTalk_20241004_223819575_01.jp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410/20241004224742_xfnqmtim.jpg)
이야기꾼의 든든한 조력자가 되어주는 고수 역시 무대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존재다. "얼쑤, 그렇지!" 이따금씩 구성진 가락으로 응수하는 관객이 소리꾼의 흥을 올려준다면, 고수는 소리꾼이 창과 아니리를 적재적소에 섞어낼 수 있도록 북을 치고 각종 추임새/발화를 넣으며 단단한 이음의 역할을 한다.
이번 공연에서 고수는 장면이 전환되는 순간뿐 아니라 햄릿이 격한 감정 변화를 느낄 때 등 극의 전반적인 흐름을 맛깔나게 책임져줬다. 단순히 주연과 조연의 개념으로 나뉘는 것이 아닌, 놀이를 이끌어가는 친구 역할을 도맡으며 공연의 완성도에 크게 일조했다.
판소리라는 장르에 익숙하지 않을지라도, 송보라 소리꾼의 공연을 보다 보면 타고난 이야기꾼의 구성진 가락에 매료되는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다. 그 매력은 나를 오롯이 작품에 담고, 작품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하고자 이어온 노력에서 비롯됐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