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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력적인 악인’이 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특권이다. 인물이 일정 정도의 악행을 해도 그것조차 긍정적으로 여겨줄 수 있다는, 한 집단의 애정 어린 인식 또는 시선을 점유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또한 잘못된 행동을 했더라도, 집단의 다수가 그 안에 숨겨진 동기를 충분히 이해해 줄 포용력을 발휘할 의지가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지만 동시에 악행을 저지르는 것이 매력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건 관객이 인물의 상황을 자신과 가까운 현실의 것으로 보고 있지 않다는 의미로도 받아들일 수 있다. 아무 죄책감 없이 사람을 살해하는 끔찍한 범죄에도 박수를 보낼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을 온전한 허구로, ‘내 일’이 아닌 그저 거리를 두고 보는 오락거리로 여기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군가를 매력적인 악인이라 여기는 것은 그를 향한 애정 또는 인정을 보여주는 것이자, 동시에 그 애정이 위선임을 인정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지난 9월 21일부터 29일까지 대학로 예술극장 소극장에서 공연되었던 극단 적의 <몰타의 유대인>(이곤 연출, 마정화 번역 및 각색)의 주인공인 유대인 바라바스는 매력적인 악인이다. 극단 적의 해석을 통해 한국에 처음 소개된 크리스토퍼 말로의 화제작은 코미디라는 장르의 힘을 빌려 관객으로 하여금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수자를 바라보는 방식을 새롭게 돌아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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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타에 머무르고 있는 유대인 바라바스는 돈을 불리는 데 천재적이다. 그는 각종 거래를 통해 몰타의 인구 전체가 가진 것보다 더 큰 금액을 벌어들였다. 하지만 튀르키예에 바칠 조공금이 부족한 몰타의 총독 페르네즈는 기독교적 미덕으로 포장한 술수와 합리화로 바라바스의 전 재산을 몰수한다. 이로부터 바라바스의 살육과 사기로 가득한 복수극이 시작된다. 페르네즈는 유대인을 기독교 사회의 ‘죄인’이며, 나라가 없는 이방인이라며 비난한다. 그가 당시 사회의 사고방식을 대표해 뱉은 혐오와 차별로 가득 찬 발언으로 인해 관객은 바라바스에게 연민을 가지고 그의 편에 서게 된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딸마저 살해할 정도로 극악무도하고 영리한 바라바스의 전략들은 코믹하고 과장된 연기로 표현되기 때문에 관객에게 웃음과 즐거움을 준다. 안타깝고 동시에 적당히 재미있기 때문에 바라바스는 매력적인 악인이 된다. 연민과 즐거움을 교차하며 유도하는 작품은 중간중간 의도적으로 신나는 분위기의 영어권 대중가요를 삽입하고, 핸드마이크를 든 인물이 콘서트와 같은 장면을 이끌어가도록 한다. 서사를 끊고 등장하는 오락적인 장면들은 관객이 바라보는 무대 위 존재들이 모두 ‘쇼’에 불과하다는 것을 명백히 드러낸다. 이는 극의 마지막 파티 장면과 더불어. 관객에게 타자에 대한 연민과 인정이라 여겨 온 자신의 태도의 이중성을 실감하도록 하는 것이다.

 

극 중 중요하게 작용하는 키워드 중 하나는 ‘물질’과 ‘재산’이다. 인물들이 바라바스를 적으로 돌리고 공격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그가 가진 재산 때문이다. 바라바스를 이방인이라며 몰타에서 추방하겠다 협박하는 이유 역시 몰타의 경제적 부족함 때문이다. 돈은 권력을 단단히 잡게 하는 수단이다. 튀르키예 출신 노예인 이싸무어는 바라바스가 약속한 돈 때문에 바라바스의 명령을 신나서 따른다. 반면 동시에 이싸무어는 튀르키예 황제의 아들, 칼리마스로부터 받은 더 큰 물질적 유혹으로 인해 바라바스를 협박하며 기존의 권력관계를 뒤엎는다. 막대한 재산은 그 주인을 혐오의 대상이자 우러러볼 영웅으로 만들며, 또한 권력자이자 노예로 만든다. 무대 뒤편에는 실물의 크기보다 몇 배는 큰 지폐와 보석, 왕좌 등의 형상을 한 풍선들이 바람이 가득 들어간 채로 쌓여 있다. 인물들에게 물질적 부란 그렇게 풍선처럼 바람을 넣으며 점점 크기를 키울 수 있는 동시에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불안하고 허황된 존재이다. 그 불확실성에 기반해 서로 쉼없이 엇갈리고 반전되는 연쇄적인 인물 관계는 관객들로 하여금 서로가 돈을 빼앗고 빼앗기는 그 맥락보다는 누군가가 돈을 얻어 쾌감을 느끼고, 잃어 아픔을 느끼는 그 순간만을 보게 만든다. 처음에는 바라바스가 혐오 아래 모아 온 재산을 몰수당했다는 그 억울함으로부터 바라바스를 응원하던 관객들은 극대화된 오락성으로 인해 바라바스가 복수하고 돈을 빼앗는 그 자체가 재미있어 그를 응원하게 된다. 그렇게 어느샌가 자본주의 논리 속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소수자를 향한 혐오는 맥락 없이 그 자체의 화제성으로만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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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에서 바라바스의 특징적인 점은, 누군가를 해할 때 대부분 자신의 손으로 직접 공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바라바스가 해하려고 목표한 대상들은 각자의 내면에 품은 탐욕으로 인해 결국 스스로 서로를 죽인다. 바라바스를 탐욕스럽다고 혐오하던 기독교인이든, 귀족이등 예외가 없다. 그들은 바라바스와 얽힌 후 종교의 탈을 쓴 위선 아래 숨어 있던 자본과 이성에 관한 쾌락적 욕망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이에 사로잡혀 서로를 파괴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극 중 유일하게 사람에 대한 진심 어린 사랑과 종교적 선함을 추구한 바라바스의 딸, 아비게일이 희생당한다. 극의 마지막 장면, 핸드마이크를 든 바라바스는 ‘나는 속물적인 세상의 속물적인 여인이다’라는 가사의 마돈나의 ‘Material Girl’을 부르고, 모두가 은빛 종이가 휘날리는 화려한 파티장에서 신나게 춤을 추며 파멸을 맞는다. 이 아이러니한 장면은, 웃으며 공연을 보는 동안 서로를 파괴할 어떤 태도와 욕망들이 도사리고 있었는지 자본주의 사회 무대와 세상을 보는 관객의 태도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극이 끝나고 나서도 바라바스가 어디서부터 악인이 되었는지를 반추해보는 것은 묘한 경험이다. 기독교적인 검소함으로 물욕을 금하는 사회 분위기였다면 첫 장면에서 돈을 더 크게 불릴 욕망으로 가득 찬 바라바스는 그때부터 악인이다. 하지만 지금 관객은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첫 장면에 그가 악인이라는 인식은 그다지 와닿지 않으며, 오히려 그를 억압하는 총독의 논리의 비겁함이 더 눈에 들어올 뿐이다. 인물들이 걸친 현대적인 옷은 더욱더 오늘날의 분위기 속에 바라바스의 물욕을 변호한다. 또한 양복을 입은 멋지게 빼입은 이미지의 바라바스는 재산을 쌓기 위한 그의 시도와 노력을 멋지고 우러러볼 만한 것으로 여기게 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오늘날 사회의 어느 부분에서 악인이 탄생하는가, 작품은 웃음 속에 결코 가볍지 않은 질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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