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어깨 [사람]

어깨에 올려져 있던
글 입력 2024.09.30 20:16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어깨에 힘을 좀 빼고 살고 싶었다. 집에 돌아와 씻다 보면 경직된 어깨의 근육이 자주 아팠다. 오랜만에 한국으로 귀국한 사람들은, 짐을 찾아 출국 게이트를 넘으면 자기도 모르게 한껏 긴장해 있던 어깨의 힘이 쭉 빠진다고 했다. 그렇게 한국이 고향이었음을 절감한다고. 근데 난 고국이라는 곳의 땅을 밟고 서 있으면서도 그런 생각이 잘 안됐다. 그래서 내가 태어난 이 땅에 대한 애정이 없어서 그렇다고 여겼다. 한국에서 가지는 소속감이 크지 않아서, 한국인으로 살면서도 꼭 이방의 누군가처럼 어색하게 두리번대고 있는 것 같아서, 보고 있어도 그리운 사람들을 제외하면 나를 이 나라에 묶어두는 것들이 많지 않아서.


불쾌했던 힘의 근원에 대해 생각한다. 폴란드에 있던 지난 1년 이후에는 의식적으로 어깨에 들어간 힘을 풀어야 하는 날이 많지 않다. 처음에는 내가 이국의 땅을 밟고 있어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한국이 나를 조였고 폴란드가 다시 나를 풀어주었다고 말하고 다녔다. 그래서 폴란드에 도착한 후 처음 석 달은 한국으로 돌아가는 게 무척 겁이 났다. 그런데 한국에 돌아와서도 어깨가 자유롭다. 가벼워진 어깨를 스트레칭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나를 아는 사람들은 나에게 여유가 생긴 거라고 했다. 무엇이 나를 차분하게 했을까? 궁금했으나 당장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나 그리움들을 조각조각 깨뜨리는 일에 바빴다.


대학교에 복학한 이후, 기숙사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에 앉아 생각한다. 나의 여유가 여전 색색거리며 숨을 쉬는 이유에 대해. 그리고 가장 익숙한 곳에서조차도 긴장하며 살았던 이유에 대해. 아무래도 나의 욕심과 이상주의가 타협했기 때문인 것 같다. 오랜 시간동안 내 어깨 위에서 발을 동동거리던 이상주의가 가벼워져서.


나의 10대는 온통 이상주의를 따라 잡기 위해 허덕였고 처절했다. 내가 가진 이상주의의 모습은 다양했다. 어렸을 때부터 한 번도 속 썩이지 않던 딸, 정치외교학도, 세계평화, 큰 소리의 울음, 엄마아빠의 삶을 버티는 내력, 단단하나 인간다운 마음. 그런데 난 그중 무엇도 제대로 가질 수가 없었다. 잘해야 했고 잘하고 싶은 것들이 필요 이상으로 많았다. 누군 없겠냐만은. 원하는 건 많은데 그만큼 노력은 안해서, 가지고 태어나지 못해서 욕심이 하나 둘씩 덩어리져 몸안에 쌓였다.


시간이 오래 흐르면 욕심들이 하나 둘 굳었다. 수명을 다했으나 원한을 품은 욕심들이 내 손가락 끝, 내 발바닥, 내 기도와 폐 혈관에 고이고 쌓였다. 투석 과정을 거쳐야 했는데 딱딱한 욕심을 몸 밖으로 꺼낸다는 일이 어떤 의미인지 몰라서 차일피일 미뤘다. 그래서 손가락 끝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닿을 때마다 진심을 의심하고 가진 사랑의 성분을 분석해야 했다. 향하고자 하는 곳이 생길 때마다 발 내부에서 덜그럭거리는 욕심들이 무거웠다. 말은 몸 내부에 달린 추가 되어 발화되지 못했고, 들이쉬는 숨은 따가웠다.


나는 늘 내 이상주의가 천천히 나를 죽이고 있음을 알았다. 너무도 가지고 싶은데 가질 수 없어 포기해야 하는 일이 버럭 소리를 지르고 싶을 만큼 무서워서, 그들을 직시하는 것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느린 사람이 되고 싶었다. 절대 그럴 수 없는 일이었지만. 스물두 살 여름, 무력하게 누워있다가 문득 이런 식으로 어른이 되는 게 끔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왕 어른이 된다면 나도 진심으로 행복하고 진심으로 타인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그래서 더 이상 이상주의에 휘둘리는 내가 되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했다. 쉽지는 않았어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해서 안절부절못하는 이상주의를 끌어내리고 다독이며 시간을 보냈다. 그 애가 두 손 가득 무겁게 들고 있는 불안과 무력함을 내 손으로 하나씩 내려놓으면서.


그 결실이 우연히 폴란드에서 맺어진 것임을 이제는 안다. 이국의 땅이었어서도 아니고, 알지 못했던 고향의 소중함을 깨달아서도 아니다. 그냥 삶의 과정에서 어느 순간 내가 ‘내’가 되었을 뿐. 그토록 무서웠던 투석의 의미가 무엇이었을지 생각해 보았는데, 아무래도 내게 욕심을 투석한다고 함은 이미 굳은 욕심들을 새로이 태어난 뜨겁고 찬란한 욕심들의 온도로 녹이고 하나로 뭉쳐지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새로운 정열적인 욕심의 한 부분이 되게 하는 것, 그리고 그걸 건강한 마음을 가진 내가 행하고 말하면서 현실이 되게끔 만드는 것까지가 죽은 욕심들의 장례식이자 투석이 된다.


데여 버릴 것 같은 뜨거움으로 말랑거리는 욕심이 내 안에 가득하다. 난 여전히 다정한 사람이 되고 싶고, 좋아하는 것들에 재지 않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 순간순간에 생겨나는 하고 싶은 일들을 주저 없이 행하고야 마는 사람이 되어 내 이상주의가 오히려 나를 말렸으면 좋겠다. 피부 겉으로는 따뜻하게 만져지는 내 사랑스럽고 미웠던 욕심들. 그것들이 흐르는 혈관이 어깨에 자리 잡고 있다.

 

 


아트인사이트 명함.jpg

 

 

[황지은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5.01.20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