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이 시작되면 쏘아지는 영상은 무대 뒤 벽에 무수히 많은 신문 기사와 보도 사진을 겹쳐놓는다. 긴장감을 조성하는 음악이 함께하며, 보도 위에 보도가 빠르게 더해지는 혼돈의 시기가 가진 흥분이 극장에 감돈다. 보도 자료의 이미지들을 뚫고 무대 위로 한 인물이 걸어 나온다. 그 모습은 인물이 격동의 시대 속 얼마나 많은 구설수에 오르고 있는지를 짐작게 한다. 세간의 관심을 한눈에 받는 화제의 인물은 바로 프랑스 자연주의 문학으로 유명한 에밀 졸라다. 그는 객석의 관객을 똑바로 바라보며 거짓 선동을 행한 프랑스 정부와 진실을 외면한 사회를 고발하기 시작한다.
뮤지컬 <에밀>은 1894년 프랑스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명 ‘드레퓌스 사건’,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에밀 졸라가 '나는 고발한다’를 집필했던 일을 모티브로 한다. 프랑스가 독일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후, 유대계 육군 대위 알프레드 드레퓌스는 독일 대사관에 군사 정보를 제공했다는 간첩 행위의 누명을 쓰고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그 내막에는 패전의 책임을 물을 공동체 내부 희생양에 관한 요구와 유대인에 대한 혐오가 작동하고 있었다. 에밀 졸라는 1898년, 드레퓌스의 무죄를 주장하고 프랑스 국가의 부당한 폭력을 비판하는 '나는 고발한다'를 신문에 발표하며 프랑스 사회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킨다. 에밀의 선언은 견고하게 자리 잡은 듯 보였던 사회적 통념에 위협을 가함과 동시에 그를 비난하려는 자들로 인해 에밀 자신에게도 위협으로 다가왔다.
창작산실 ‘대본의 발견’을 통해 작년 1월 CJ아지트에서 리딩공연으로 관객들을 만났던 뮤지컬 <에밀>(김소라 작, 황예슬 작곡, 이대웅 연출)은 올해 6월 11일부터 9월 1일까지 본공연으로 호평 속에 관객들을 만났다. '나는 고발한다'의 발표로부터 4년 후, 에밀이 신변 보호를 위해 숨어 지내는 장소로 가상 인물인 클로드가 찾아오며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공개적으로 할 수 없어 억누른 수많은 말들 만큼이나 책이 빽빽하게 채워진 책장으로 둘러싸인 공간. 폴 세잔이 전달을 부탁했다는 그림을 들고 찾아온 의문의 남성 클로드와 에밀의 대화는 반전 있는 미스터리 속에 두 사람의 관계와 정체를 몰입해서 추리해 나가게 만든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작품은 확신과 불확신을 의도적으로 교차하며 관객에게 진실에 닿기 위한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태도, 그리고 그 안에서의 예술이 할 수 있는 역할에 대해 역설한다.
보이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작품이 말하는 중요한 키워드는 ‘진실’이다. 에밀의 고발로 시작되는 만큼, 언뜻 보기에 작품이 말하는 ‘진실’은 드레퓌스와 에밀이라는 대중 앞의 저명한 인물이 쥐고 흔드는 것 같다. 하지만 작품은 드레퓌스를 바라보는 대중의 일부이기도 한 소시민 클로드가 자신의 왜곡된 시선을 고백하는 이야기를 무대 중앙의 단상 위로 끌고 오는 것으로 확장된다. 에밀의 선언이 이루어졌던 단상 위에 선 클로드의 진실된 자기인식은 관객 앞에서 에밀의 선언 만큼이나 큰 무게감을 획득한다. 진실은 대중이라는 집단적 이름으로 포장된 평범한 개인들과 담을 쌓은 특별한 누군가의 것만이 아니라, 그것을 접하고 받아들이는 각 개인의 인식과 밀접하게 관계맺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또한 클로드의 고백을 듣다 보면, 프랑스 정부와 클로드 모두 자신이 겪을, 또는 겪은 불행을 해소하기 위해 혐오할 희생양을 찾는 하나의 왜곡된 방어기제를 작동시킨다는 것이 드러난다. 정부라는 거대하고 총체적인 권력이 가린 진실과 혐오를 밝혀내는 데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한 개인의 내면에 어떤 혐오가 발생하고 있었는지 그 진실을 내보이는 것으로 이어진다. 두 혐오와 왜곡의 원리가 가진 유사성은 사건을 접하고 인지하는 모든 개인을 진실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한다. 그리고 ‘에밀’이 공연되는 극장에서는, 무대를 마주하고 있는 객석에 또 다른 군중이 존재한다. ‘관객’이라는 집단의 이름 아래 놓인 개개인들이다. 첫 장면에서 에밀은 객석을 자신의 고발을 듣는 당대의 군중으로 설정한다. 관객을 마주한 채 제4의 벽을 뚫고 거리를 좁혀 들어온 에밀의 선언은, 극이 진행되는 당대 개개인의 것 만큼이나 관객 개개인이 지녔을 진실에 대한 책임을 생각하게 한다.
작품이 말하는 진실에 접근하는 과정은 비가시화 된 부분을 가시화하는 것과 연결될 수 있을 것 같다. 에밀은 언론 또는 정부가 의도적으로 숨기거나 무시하려 했던 드레퓌스의 무죄에 관한 근거들을 수면 위로 올려놓고, 클로드는 다수의 무관심으로 인해 존재하는지조차 제대로 드러나지 못했던 파리 빈민가 생활의 비극을 꺼내놓는다. 두 인물의 캐릭터 설정은 각자가 가시화하려는 진실의 유형을 극적 경험으로 구축한다. 관객에게 있어 극을 따라가며 에밀을 이해하는 과정은 매체에 의해 저명하게 알려졌으며, 그렇기에 다 안다고 여기기 쉽던 존재의 가려진 부분을 들여다보는 것이고, 클로드를 이해하는 과정은 그 자체로 극을 보기 전까지는 관심을 가지지 않고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약자를 이해하는 과정이기 되기 때문이다. 사실을 의도적으로 다르게 확산시키는 것만큼이나, 존재하는 것을 없는 셈 치는 것도 진실이 아니다. 극이 말하는 ‘진실’과 ‘왜곡’, ‘선동’, ‘무지’는 눈에 띄는 사회적 이슈 뿐만 아니라 알거나 알지 못하는 모든 곳에 전반적으로 얽혀있는 개념이 되어 객석의 모든 일상적인 삶들 가까이로 다가온다.
두 인물의 가시화의 과정은 무대 구성과 조명을 통해 연극적이고 상징적인 이미지로도 구현된다. 클로드가 에밀과 대화를 진행하며 에밀에 대한 정보들이 하나하나 밝혀질 때, 에밀이 드러내려는 드레퓌스의 무죄에 대한 진실이 클로드에 의해 세상에 나갈 힘을 얻는 것 같을 때 방을 밝히는 등이나 촛불이 하나씩 켜지기 시작하며 어둠 속 선명히 보이지 않던 방 안의 형체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반면 진실이라 믿었던 정보나 태도가 거짓으로 판명이 날 때 조명들은 한 번에 또는 서서히 꺼지기도 한다. 조명에 의한 공간의 가시화, 비가시화와 진실의 드러남과 감춰짐이 연결됨에 따라 인물들 각각이 조명을 옮기고, 켜거나 끄는 행위들 역시 의미를 갖는다. 인물이 조명에 가하는 행동들로 무대의 일부가 빛 또는 어둠으로 들어서는 이미지는 극이 진행되는 매 순간 어디에서든 비가시적인 부분이 존재하며, 진실에 있어 가시적인 부분들이 개인의 자의적 시각 아래 선택되고 있음을 한눈에 체감하게 한다.
공간적 배경 역시 관객의 시선이 닿을 수 있는 부분과 없는 부분을 연속해서 인지시킨다. 작품은 에밀이 숨어 지내는, 당대 대중에게 가시화되지 않은 공간을 관객과 공유한다. 이 은밀한 공유는 당대 대중은 보지 못하는 것을 오늘날 관객은 볼 수 있다는 느낌을, 극장의 관객이 그 당시보다 진실에 대한 더 나은 시선을 가지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뒤이어 인물들이 누군가에게서 공격받거나 누군가를 공격하는 문밖 공간의 상황은 관객에게서 가려지며, 진보되었을지도 모르는 시선 아래에서도 여전히 보지 못하는 지점이 내내 존재하고 있음을 관객이 연속적으로 깨닫도록 유도한다. 극 중 계속해서 인지되는 비가시화 된 영역의 존재는 진실을 찾아가고자 하는 분투가 존재하지 않아도 괜찮은 순간은 없다는 것을 넌지시 전달한다.
재현 불가능성의 가능성
작품의 인상 깊은 지점 중 하나는, 극 중 드러나는 예술의 역할이다. 극 중 인물들은 소설이라는 수단을 통해 예술이 사회에 할 수 있는 역할에 대해 은유한다. 에밀은 소설을 통해 무관심 속 묻혀있던 빈민가의 이야기를 가시화했고, 그건 클로드에게 위로와 희망이 되었으며, 에밀이 클로드에게 건네준 ‘펜’은 ‘총’으로 상징되었던 선동을 통한 혐오와 공격을 넘어서서 소신으로 또 다른 진실을 이어갈 것을 제안한다. 관객 앞에 놓인 뮤지컬이라는 예술 역시 객석에 있는 개개인에게 자신의 소신을 주체적으로 가시화하는 과정을 밟아가기를 유도한다.
극의 초, 중반부, 에밀과 클로드의 대화를 따라가며 드는 생각은 에밀의 삶의 궤적에 관한 정보들이 다소 두서없이 제시된다는 점이다. 소설가로서 위대함과 폴 세잔과의 우정 등 다양한 지점에서 바라보는 그의 인생은 에밀이 누구인지 매끄러운 한 방향으로 드러내기 보다는, 오히려 정보를 파편화하여 사방으로 퍼뜨린다. 후에 진실의 왜곡을 비난하는 그가 소설에서 폴 세잔을 자신의 의도대로 왜곡하여 그려냈다는 의심과 논쟁은 에밀이라는 인물을 단지 영웅으로만 볼 수 없게 만들며 그에 대한 인식의 불확실성을 일깨운다. 후에 클로드와 술을 마시며 보이는 진실에 관한 에밀의 다소 인간적이거나 확신 없는 태도는 에밀을 어떤 절대적인 몇 개의 가치로 묘사할 수 없음을 더욱 또렷이 나타낸다. 결국 에밀이라는 인물은 무대 위에 명백하게 재현되지 못하고, 그가 누구인지를 조직하고, 객석 밖으로 전하는 것은 관객 개개인의 몫으로 남는다. 작품은 해석은 사실일 수 없다는 점을 언급하는데, 어떤 재현이든 재현 주체의 해석을 담을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이러한 인물 제시의 방식은 작품이 보여주는 진실에 대한 내용상의 태도를 구성적으로도 실현하고 있는 듯하다. 무엇보다도 선동의 핵심은 존재나 현상에 대해 다수가 ‘한 방향’으로 생각하거나 움직이게 만든다는 것이다. 작품이 에밀을 드러내는 태도는 그 자체로 선동에 반하고 있다.
작품은 다루는 주제를 확장할수록, 또 오늘날에 가까워질수록 대상에 대한 재현불가능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작품은 드레퓌스가 짊어진 부당한 누명에 대해 논하지만, 드레퓌스의 무죄가 확정된 순간까지 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그에 대한 증언만 남는다. 또한, 에밀과 클로드의 반전을 거듭하는 관계는 관객으로 하여금 두 사람의 정체와 관계, 그리고 에밀의 죽음의 비밀을 푸는 것에 집중하고, 그 확정적 결말을 궁금해하게 한다. 하지만 그 끝에 최종적으로 도달하는 것은 빈 무대이다. 이는 진정 중요한 것은 현실을 잊고 무대 위 가상의 이야기를 해결하는 데에 몰두하는 것이 아니라는 하나의 강렬한 반전으로 작용한다. 빈 무대 앞쪽, 클로드를 맡은 배우가 연기하나, 모자를 눌러 써서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누군가는 극의 초반부 에밀의 선언을 반복하기 시작한다. 거기에 더해진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는 명시적인 동시대의 구호는 작품이 논하는 것들이 오늘날까지 유효함을 분명히 한다. 이윽고 빈 무대 위에는 사람은 없지만 누군가가 서 있는 자리를 비춰주는 듯한 조명만이 남고 신원을 알 수 없는 이들의 고발의 목소리와 진실에 대한 의지를 담은 외침들이 들려온다. 조명 아래 비어있는 자리는 장면의 의도적인 미완성과 비종결을 전면에 드러내며 관객 스스로가 오늘날 왜곡된 낙인으로 고통받거나, 그 지점을 고발하고 있는 이들이 누구인지, 어떤 이미지와 목소리로 그 장면을 채워야 하는지 내면에서 스스로 저마다의 소신을 담은 가시화 과정을 거치게 만든다. 작품의 지적을 관객의 체험으로까지 확장시키는 부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관객 각자가 빈 무대에 가시화한 모습은 결코 하나의 ‘정답’으로 모아지지 않을 것이며, 서로 다른 ‘의견’으로 남을 것이다.
진실은 성장한다
극은 완벽한 하나의 이미지로 전달되는 정답보다는, 서로 다른 소신과 의견을 지지하고 있음을 대사에서도 명확히 밝힌다. 에밀이 클로드에게 펜을 넘겨주며 하는 말은, 누구도 대신 쓸 수 없는 ‘너만의 진실’을 쓰라는 이야기이다.
영국의 경제학자이자 철학자인 존 스튜어트 밀은 그의 저서 <자유론>에서 진리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개개인이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자유가 중요함을 이야기한다. 개인이 가진 것이든, 또는 다수가 공유하고 있는 것이든, 진리라고 여겨지는 것은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 진리의 ‘일부’만을 담은 것에 불과하며, 그 당시 '최선'이라고 판단한 것에 그친다는 의견이다. 하지만 모든 개인이 자신이 믿는 진리에 대해 목소리를 낼 자유를 가지고, 그를 통한 비판과 토론이 활성화된다면 당시 제시되던 진리의 오류를 수정하고 보완하며 더 나은 ‘최선’을 향해 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그렇게 진리는 멈추지 않고 ‘성장’한다고 볼 수 있겠다. 인물들이 말하는 진실 역시 그렇다.
개인인 에밀은 비판을 통해 당대 다수가 최선이라 설정한 드레퓌스에 대한 진실을 수정하려 했다. 클로드는 그런 에밀을 통해 아무도 들어주지 않음으로써 소거되었던 진정한 자신의 목소리를 낼 자유를 깨달았고, 진실의 수정과 보완을 위한 또다른 길을 이어간다. 드레퓌스 사건 이후 그들의 길이 어디로 최종적으로 이어졌는지는 빈 무대 위로 드러나지 않는다. 작품이 중요하게 조명하는 것들 중 하나는 다수에 휩쓸리지 않은 자신의 소신 있는 의견을 세상에 말하는 것, 그리고 그것이 내포한 가능성 그 자체이다. 각자만의 진실이 쌓이고 충돌하면 시대의 진실은 더 나은 최선을 향해 성장한다. 그리고 공연은 미완성의 공간을 채우는 관객 개개인이 그 시초가 될 각자의 소신과 목소리를 마음속에 품을 기회를 준다.
에밀의 살던 세상에도, 다음 세대인 클로드가 살던 세상에도 빈민가는 사라지지 않았고, 진실은 가려졌으며, 두 사람의 세상은 모두 온전하지 못하다. 극의 후반부 연장선 속에 있는 관객의 지금 역시 마찬가지이다. 드레퓌스의 재심을 앞둔 상황, 모든 조명이 꺼진 에밀의 방 안으로 창문을 통해 들어온 거대한 햇살이 비춘다. 그 앞에서 모든 방 안의 조명은 무력해진다. 개개인이 자의적이고 선택적으로 밝힐 수 있는 것이 조명이라면, 절대적인 빛인 햇살은 훨씬 더 넓고 강력하다. 아무리 누군가 첨예하게 조작하려 해도, 진실은 승리할 것이라는 믿음이 보여지는 것 같다. 하지만 동시에, 결국 그렇게 햇빛이라 드리우는 것 역시 자의적인 극장의 조명에 불과하다. 암전이 이루어지는 순간 극에서 본 것은 세상의 작은 일부일 뿐이라는 것이 실감된다. 극이 끝나면 작은 공연장을 나와 큰 세상으로 나아갈 관객에게 지워지는 것은 씁쓸한 책임과 동시에 희망이다. 빈 무대와 암전을 남긴 작품은 불완전하고 작다. 하지만 그로써 극장 밖에서 진실이 더 완전함에 다가갈 기회를 제공한다.
에밀이 진실을 위해 싸우던 이유는,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에밀을 그를 지지하던 이름들을 적어놓고 잊지 않는다. 클로드가 진실을 쓰기로 결심하는 이유도 에밀이 그를 지지했기 때문이다. 커튼콜이 되면 관객들은 진실을 찾는 두 사람, 그리고 그 이후 암시되는 셀 수 없는 사람들의 여정에 박수를 보내는 수많은 지지자들을 목격한다. 에밀과 클로드의 물리적 만남이 짧은 몇 시간으로 끝났던 것처럼 것처럼 순간이 지나면 사라진다는 공연예술이지만, 어쩌면 평생의 계기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