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을 시작할 때, 주제를 정하는 일에 있어 막막할 때가 많습니다. 저의 경우는 함께 작업을 하는 친구들과 함께 평소 눈여겨보았던 것들을 키워드로 만들고, 거기에서 뻗어나가며 작업에 대한 생각과 주제를 전개하는 편인데요. 예시로 들어볼 주제는 친구가 발제해 주었던 주제들이에요.
노스탤지어, 추억, 레트로, 인물, 신화, 빛, 향기, 아날로그, 필름, 극적인, 낭만
이렇게 키워드끼리 꼭 겹치지 않아도 좋아요!
저는 그 중에서 추억과 레트로, 인물, 아날로그의 키워드를 선택했어요. 이를 평소에 관심 있어 하는 주제인, 2D 애니메이션 등 서브컬쳐적인 요소와 연결 지어 작업을 전개해보고자 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만화에 주로 등장하던, '전투에 참여하는' 소녀들을 중심으로 분석하였어요. 애니메이션과 만화의 주된 발원지인 일본의 애니메이션을 중심으로, 20세기 중순부터, 후순까지의 시기를 중점적으로 읽고, 그에 대한 특징을 정리했습니다.
바로 그림을 그리는 일을 시작하여도 좋지만, 작업하려는 주제에 대한 분석과 조사가 선행된다면 더욱 즐겁게, 그리고 쉽게 길을 따라가듯 작업할 수 있어 도움이 됩니다. 이하는 제가 조사한 것들을 일부 첨부합니다.(자료 출처 - 전투미소녀의 정신분석 ('싸우는 소녀'들은 어떻게 등장했나), 사이토 타마키, 에디투스, 2018.)
'싸우는 히로인'의 계보
미야자키 하야오 등, 일본의 다양한 거장들은 모두 싸우는 히로인이라는 캐릭터를 중점으로 한 애니메이션을 만든 독특한 전적이 있다. 이는 단순히 우연의 일치가 아니며, 이러한 애니메들에 등장하는 히로인(주로 소녀)들은 단일한 원인으로 설정되지 않는다. 섹슈얼리티, 바이올런스, 설정 당시의 마니아층의 수요 등이 반영되며, 다양한 요소가 종횡으로 얽혀 있다.

1970's ~
<시끌별 녀석들>
1970년대는 애니메의 전성기라고도 불리는 시기로, 이 시기의 애니메이션은 흔히 말하는 '오타쿠' 문화의 외곽선을 완성했다는 특징이 있다. (코미케 등) <스케반 형사>, <좋아! 좋아! 마녀선생!> 등, 이 시기에 최초의 실사 변신 소녀 계열이 등장하기도 한다. 또한 일본 애니메이션계의 거장 중 하나는, 데즈카 오사무의 원작인 <신비한 메르모> 또한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된다.
마법 사탕을 핥으면 소녀에서 성인 여성이 된다는 독특한 설정을 가지고 있으며, 계몽적 작품임과 동시에 변신의 의의를 새롭게 조명하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특징을 가진다. 또한, 우리가 흔히 아는 로봇 애니메도 이 시기에 폭발적으로 생산되는데, 이에 그치지 않고 <마징가 Z>, <데빌맨>, <큐티하니>, <시끌별 녀석들>, <은하철도 999> 등, 현재까지도 거론되는 애니메들이 만들어진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베르사유의 장미>, <루팡 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 등은 유니섹슈얼한 여성캐릭터가 등장한다는 특징을 가진다. 이는 위에서 언급한 다카라즈카 계열의 계보를 이어받는 것으로 볼 수 있다.

1980's ~
<요술공주 밍키>
전반기에 성숙, 후반기에 쇠퇴를 보여준 시기로, 애니메에 출연하는 소녀들의 성격적인 부분에 '중심기질'이 등장한다. (중심기질: 간질 기질의 정신 병리적 성격 경향을 정상 범주화한 심리학 용어. 천진난만하고, 열중하다가도 바로 싫증을 냄. 5~8세 유아의 성격적인 면모와 비슷한 부분을 보임)
즉, 이 시기에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여성 주인공의 기본적인 특성이 성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때 제작된 <스톱! 히바리코>, <란마 1/2> 는 소녀의 겉모습을 가지면서도, 남성적인 내면이 대립하는 모습을 보이며, 성전환의 가역성을 보여주고 있다. 같은 시기에 제작된 <요술공주 밍키>는 현실과 비현실을 결합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특징적인데, 주인공 밍키가 결말에는 모든 마법 능력을 잃고, 교통사고로 죽음을 맞는다는 충격적인 결말을 보여준다. 나아가, <캡틴 츠바사> 등, 많은 여성 팬들을 양산해 내는 애니메 또한 제작되어 '오타쿠'의 성별 역시 이 시기에 더욱 다양화된다는 특징을 보인다.

1990's ~
<세일러문 - 1992년 작, 리메이크 전>
1990년대는 애니메가 다시 부흥하기 시작한 시기로, 1990년대 초기의 히트작은 <미소녀 전사 세일러문>, 후기의 히트작은 <신세기 에반게리온>으로 대표된다. 버블 경제의 불황을 딛고 일어난 시기 탓인지, 그 외 다수의 수작이 제작된 시기로도 손꼽힌다. (<아키라>, <포켓몬스터>, <모노노케 히메>,<공각기동대>, <파워 레인저> 등)
또한, 다양한 게임 기기 등이 함께 발매되며 게임 작품에서도 애니메 캐릭터들이 대대적으로 사용되게 된다. 이때 큰 역할을 한 것이 CD ROM의 도입이다. 게임 소프트에 성우의 목소리를 손쉽게 삽입할 수 있게 되며, 애니메 캐릭터가 순식간에 게임까지 발을 넓힐 수 있게 된 것이다. 나아가, 애니메를 주제로 한 뮤지컬까지 만들어지게 된다.
앞서 언급한 <미소녀 전사 세일러문>은 작가성이 높은 작품이라는 특징이 있다. 원작자 다케우치 나오코의 거주지 지명이 작품에 그대로 사용되고, 작중의 전사들에게 작가가 취미로 수집하던 광물의 이름을 붙이는 등이 그러한 예시이다. <미소녀 전사 세일러문>은 각종 굿즈부터 시작하여, 사회 현상까지 만들어내는 것으로도 모자라 후속 작품에도 영향을 끼친다.
90년대 후반의 대표작인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감독인 안노 히데아키는 <세일러문>의 팬이었다. 이를 방증하듯 성우진은 <세일러문>과 중복되며, <세일러문>의 작중 캐릭터가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여성 캐릭터의 프로토타입으로 지목되기도 한다. 이외, 직계로 영향을 받은 작품으로는 <웨딩피치>, <마법기사 레이어스> 등이 있다. 비슷한 시기에 발표된 작품 중, 일본 애니메이션계의 거장 중 하나인 미야자키 하야오의 <모노노케 히메> 도 있다. 선악으로 환원 불가능한 자연과 문명의 대립 등, 그의 사상과 고민이 점층적으로 담긴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같은 시기에 발표된 <신세기 에반게리온 Air>은 로봇 아니메의 포맷을 유지하면서도, 주인공인 이카리 신지의 내면적 갈등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이 작품에서 주목해야 할 히로인은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소녀, '아야나미 레이' 인데, 그녀 특유의 공허함은 클론 태생이라는 점에서 나온다는 특징을 가진다. 이러한 태생은 하나의 전형이 되어 후대의 몇 가지 작품에서 반복되어 나타나게 된다. (<소녀혁명 우테나>의 '히메미야 안시' 등) 이렇듯 1990년대 후반에 이르러, 소녀 특유의 쾌활함과 생기가 아닌, 공허함을 지닌 소녀 히로인들이 다수 등장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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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책과 논문 등을 참고하여 줄글의 방식으로 리서치를 진행했지만, 이미지를 모으거나 마인드맵을 진행하는 등 본인에게 맞는, 다양한 방식으로 리서치를 이어갈 수 있습니다. 작업을 위해 자료를 조사했던 만큼 작업적 고민을 하지 않을 수가 없겠죠?
제가 리서치를 진행하며 작업적으로 고민해 본 부분은 이러합니다. 저는 기존 작업에 주로 소년과 소녀를, 그 중에서도 소녀를 주로 등장시켜 왔습니다. 서브컬쳐적인 표현 방식을 차용하며 우울과 불안이라는 주된 틀 안에서 작업을 해왔기에, 성장 과정에서 주로 접한 소녀 히로인들이 20세기 중~후반의 애니메에서 어떻게 표현되고, 어떤 부분에서 영향을 받아왔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또한, 애니메에서 보이는 소녀 히로인들의 표현 방식과 (눈의 표현 방식, 머리카락 명암을 표시하는 방식. etc 본인이 흥미롭다고 생각했던 표현 방식이라면 OK!) 현실에서는 동떨어진 색채 등의 분위기를 작품에 차용하고자 했습니다.
다음 이어지는 글에서는, 이렇게 조사한 내용을 드로잉 등 가벼운 방식으로 어떻게 응용해 볼 것인지에 대해 써보고자 합니다. 본인이 좋아하는 장르를 리서치하며 미술, 나아가 다른 문화 예술 장르에 대한 관심이 더욱 깊어졌기를 바라며 글을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자료 출처
전투미소녀의 정신분석 ('싸우는 소녀'들은 어떻게 등장했나), 사이토 타마키, 에디투스,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