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운 기운이 확연한 여름날, 음악극을 보러 정동극장으로 향한다.
음악극 [섬:1933~2019]는 '소록도 천사'로 불리며 1966년부터 2005년까지 40여 년간 한센인들을 위한 희생과 헌신으로 큰 감동을 주었던 실존 인물 '마리안느 스퇴거'와 고(故) '마가렛 피사렉' 간호사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장애에 대한 우리 사회의 차별과 편견을 짚어낸다.
또한 1933년부터 1966년대 소록도로 강제 이주를 당한 한센인들의 억압받던 삶을 비추는 동시에 스스로 세상과 담을 쌓고 '장애도'라는 섬에 갇혀 살아가는 2019년 서울의 발달장애 아동 가족들의 이야기를 교차하는 연출로 과거에서 현재까지 장애를 대해 온 우리 사회의 역사를 보여주기도 한다.
ⓒ국립정동극장, 라이브러리컴퍼니
이번 공연은 실존 인물의 삶을 무대에 복원하는 '목소리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개발되었다.
목소리 프로젝트는 '선한 영향력을 바탕으로 귀감이 될 수 있는 삶'을 살았던 인물들의 어문자료 즉, 말과 글의 형태로 남아있는 해당 인물의 삶과 사상을 무대에 복원하려는 취지로 장우성 작가, 이선영 작곡가, 박소영 연출가가 결성했다. 2018년엔 전태일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음악극 [태일], 최근인 2023년엔 가족법 개정을 이끌어 낸 대한민국 최초 여성 변호사 이태영의 삶을 조망한 음악극 [百人堂 태영]을 제작하기도 했다.
2024년 재연된 섬은 2019년에 제작되었다가 올해 재연된 극으로 이들의 두 번째인 것이다.
실화바탕의 극을 제작하는 것이 정말 쉽지 않을 일일텐데, 고생도 느껴지고, 고증과 픽션을 어느정도로 섞은 걸까 비율이 궁금해지기도 한다. 관람하는 동안 개인적으로는 다큐멘터리처럼 느껴지는 부분, 아주 극적으로 느껴지는 부분이 섞여 있었다. 음악 및 소품이 존재하는 가상의 무대와 실제 자료, 일화 등을 섞은 연출만이 줄 수 있는 독특한 관점이었다.
ⓒ국립정동극장, 라이브러리컴퍼니
음악은 과하지 않다. 그렇다고 완전히 담백해 기억에 남지 않는 맛은 아니다.
극은 시공간이 바뀔때는 프로젝터를 통해 "소록도" "서울"과 같은 글자를 보여준다. 이를 통해 시공간을 넘나들며 문제의식을 강화하는 극의 형식을 관객으로서 잘 따라갈 수 있었다.
극장의 음향 시스템이 문제일수도, 혹은 내 자리가 문제일수도, 마이크가 문제일수도 있지만, 음악의 가사가 잘 들리지 않아 속상했다. 다만, 배우들의 단단한 발음과 반복되는 가사와 운율을 통해 극의 흐름을 못 따라가는 정도는 아니었다. 어느 작품이든 음악은 거슬리지만 않아도 평타이상을 해낸 것이다. 라는 말을 들을 적 있다.
그런 관점에선 이번 극에서 음악은 최고였다. 난 대사 중심의 극을 기대하고 관람을 해서 그런지, 음악은 의심할 필요 없이 기존의 창작극에서 보던 수준은 한참 넘어선 오리지널리티였다.
ⓒ국립정동극장, 라이브러리컴퍼니
그리고 자료들. 중간 중간 정말 말그대로 발표자와 사진을 통한 '프레젠테이션 시간'이 들어간다. 아주 짧지만, 강력하게, 적절하게 말이다. 극중에 등장한 인물이 배경을 설명하기도, 사건이나 흐름을 짚어주기도 한다. 왜인지 나레이션으로는 안느껴진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극 속에 스며들었기 때문일까.
후반부에 사진이 등장하는 부분에선 렉쳐퍼포먼스같은 면모도 보인다. 이게 정말 완전히 의도로 가져가지 않는이상 실화바탕 극에선 독이 될 수도 있는 연출이라고 생각하는데, '사건의 진술' 과 같은 형태로 배우의 연기와 함께 보니 아주 적절하게 느껴졌다.
전혀 오만하지 않았다.
ⓒ국립정동극장, 라이브러리컴퍼니
이 글을 쓰며 이런저런 인터뷰들, 목소리프로젝트에 대한 자료를 찾았다. 관람 직후에도, 리뷰를 작성하면서도 이 극이 연극과 다큐멘터리와 저널리즘과 사회운동과 교육 그 어딘가에 묘하게 균형잡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목소리 프로젝트 팀의 인터뷰에서 이런 부분이 나온다.
"연극으로 세상을 바꿔보겠다는 오만함이 있었다. ...10년 정도 시간이 지나면서 업계에 온순하게 길들여진 느낌이 들었다." - 장우선
"목소리 프로젝트는 상상으로 이야기를 채울 수 없다." - 이선영
출처: 더 뮤지컬, 박소영 연출, 이선영 작곡자, 장우성 작가가 들려준
'목소리'에 대한 목소리, 20180620
예술로 세상을 바꿔보겠다는 결심은 예술가 스스로를 끊임없이 의심하고 검열하게 하는 고문과 같은 과정일 것이다. 아마도 스스로의 자격을 묻고 또 물으며 이게 과연 가능한 것인지 증명해내는 과정일 것이다.
접근할 수 없는 지식, 거대 권력에 검열될 가능성은 오묘한 단어와 추상적 형태로 치환해가면서 시대의 문제의식을 예술화한다. 그렇게 그 누구도 보지 못한 형태로 진실이 탄생한다.
그 과정에선 수많은 물음이 등장한다.
먼저, 이게 나랑 무슨 상관인가?
이 이야기가 왜 만들어져야 하며, 왜 내가 만들어야 하는가?
내가 이 작품을 만드는데 적임자인가? 내가 당사자거나 관련이 없더라도?
한 국가, 시대, 사회에 살았다는 것만으로 내가 이 일을 맡을 권리가 생기는가?
나보다 좀 더 직접적이고 진지한 사람들에 의해서 다뤄져야 하는 사건이 아닌가?
이것을 예술화시키는 과정이 도덕적으로 옳은가?
그리고 제작으로 들어가면 더욱 깊은 고민이 시작된다.
어떤 형식으로 예술화 시키는 것이 적절한가? 글? 음악? 그림? 영상? 연극? 시? 소설?
작품의 완성품과 제작 과정이 사건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인물들에게 피해를 주는가? 주지 않는가?
이들에게 어디까지 물어볼 수 있으며, 어디까지 결과물에 담을 수 있는가?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타협해야 하는 부분에서 작품의 어떤 부분을 조정할 수 있는가?
이 타협의 과정에서 이것이 검열인지 타협인지 구분할만큼 나는 똑똑한가?
작품에서 어디까지 말할 것이며, 어디까지 대안을 제시할 것인가?
아니지 그전에 대안을 제시할 깜냥은 되는가?
작품이 세상에 나올 준비가 되면 또 다른 고민이 생겨난다.
과연 이 작품이 세상을 바꿀 준비된 것일까?
작품을 위해 희생해준 모든 이들이 기대한 만큼의 파급력을 작품이 가질 수 있을 것인가?
그 파급이 예상한 모든 것을 벗어날 때 나는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만약 더 큰 피해가 생기면? 이전보다 상황이 안좋아지면?
연쇄적으로 떠오르는 질문은 현실을 기반으로 창작 활동을 지속하고자 하는 모든 이들이 머리터지게 고민하는 부분일 것이다. 이번 극을 보고 나오며 이들이 이 모든 과정을 어떤 마인드셋으로 견딜 걸까.
나만 궁금한 건 아니였나, 2021년 목소리 프로젝트를 인터뷰한 기자가 이들에게 비슷한 질문을 던졌다.
마지막으로 물었다. 공연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세상까지는 모르겠지만 개인 누군가는 바꿀 수 있지 않을까요." - 이선영 작곡가
"당연히 그럴 수 있다고 믿어서 시작했는데, 오만하다는 생각도 들고 시험도 받죠. 하지만 한 사람을 바꾸는 게 세상을 바꾸는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한 발걸음 씩 걸어가고 싶어요." - 장우성 작가
"최근 애니메이션 '소울'을 봤는데, 극장에서 나왔을 때 제 시선·제 생각이 달라진 것을 느꼈어요. 영화만큼 공연이 많은 분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을 지 모르겠지만, 그것이 '선한 영향력'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 과정에서 시험도 많고, 좌절도 하겠지만 태일처럼 그런 마음이 꺾이지 않았으면 해요." - 박소영 연출
출처: 목소리 프로젝트 "전태일 마음" 전하고 싶었어요, 뉴시스, 20210316
ⓒ우란문화재단
극이 끝나고, 박수를 쳐야 되는데, 박수를 칠 힘이 없었다.
이렇게 내내 훌쩍거린 극은 처음이다. 주변을 보니 다들 비슷한 상황인 것 같다. 나오는데 들리는 말들이 다 비슷한다. "이것이 울지 않고 나올수 있는 극인가, 하도 울어서 머리가 지끈거린다, 눈가가 짓물렀다, 손수건 필참..."
이들은 그 날 그곳에 있었던 모든 개인의 마음에 작은 불씨를 넣는데 성공했다.
음표와 빛, 목소리와 표정, 색과 감정으로 해냈다. 이 극을 올리는데 기여한 모든 사람이 얼마나 어떻게 이 성공에 기여했는지 수치화할 수 없지만 그 모든 나비효과가 결국엔 관객들의 마음에 가서 거대한 태풍이 되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예술은 정말 무쓸모한가? 정말 예술과 현실은 동떨어져 있나? 예술로는 현실을 바꿀 수 없나?
그 대답은 아직도 모호할 것이다. 왜냐면 그날 날 울게 만든 감정은 수치화할 수 없으니까.
그러나 이들이 해낸 것은 예술이 현실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 단순한 오만한 착각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