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3년, 한센병 환자들은 ‘소록도’라는 섬으로 강제로 이주당한다. 한센인을 향한 따가운 시선과 터무니없는 소문, 일상적인 경멸과 폭력을 피하고자 제 발로 그곳을 찾은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소록도는 그들이 떠나왔던 바깥세상만큼 잔인한 곳이었다. 그곳에서 그들이 마주한 현실은 강제노동과 감금, 그리고 끔찍한 시체 해부였다.
2019년, 발달장애 아동 지원의 엄마인 고지선은 특수학교 설립을 둘러싼 주민 토론회에서 주민들에게 ‘장애도’의 존재를 아는지 묻는다. 장애도는 발달장애 아동과 보호자들이 그들을 향한 따가운 시선과 차별을 피해 자신들의 존재를 숨기며 살아가는 현실에 대한 비유다. 장애도에 고립된 그들은 그렇게 비장애인들이 살아가는 ‘평범한’ 세상에서 점차 사라져, ‘있지만 없는’ 존재가 된다.
외부 세계와 철저히 단절된 섬. 먼 옛날부터 섬은 공동체로부터 배제당한 이들의 공간이었다. 공동체의 안정과 평화를 해치고, 사회가 규정하는 ‘정상성’에서 벗어난 이들은 외딴섬에서 자신의 존재를 숨긴 채 고립되어 살아가야 했다. 한센병에 대한 지식이 전무했던 그 시절, 두려움의 존재였던 한센인들이 소록도로 떠나야 했던 것처럼.
![[국립정동극장] 섬1933-2019_공연사진 (2) ⓒ국립정동극장, 라이브러리컴퍼니.jp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406/20240615084103_hllbbqkm.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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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립과 배제, 그리고 차별과 폭력의 공간인 섬. 음악극 [섬 : 1933~2019]에는 소록도와 장애도, 두 개의 섬이 등장한다. 소록도는 실제 존재하는 물리적 섬이며, 장애도는 발달장애 아동과 그들의 보호자가 느끼는 고립감을 상징하는, 일종의 사회적 섬이다. 극은 1933년 소록도에서 살아가는 한센인들의 이야기와, 2019년 발달장애 아동의 보호자인 지선의 이야기를 교차하며 소록도와 장애도를 연결한다. [섬 : 1933~2019]는 특정 집단을 공동체로부터 내쫓고, 고립시켜 결국엔 그들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회적 폭력이 여전히 우리 사회에 사라지지 않았음을 극 내내 전하고 있다.
1933년 소록도부터, 2019년의 장애도에 이르기까지 형태만 다를 뿐 본질적으로 동일한, 이 세상에서 끝없이 작동해 온 차별과 배제의 논리를 본다. ‘다름’을 포용하지 못하는 편협함. 그것을 ‘병균’처럼 인식하며 제거하려 하고, 끝끝내 그것이 ‘전염’되지 못 하도록 그들을 자신들이 살아가는 세상과 떨어뜨려 놓는다. 그렇게 섬으로 쫓겨난 사람들. 그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평범하게 살아가는 ‘보통의 세상’과 분리된 채 살아간다. 우리 사회에는 얼마나 많은 섬이 존재하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외딴섬에서 외롭게 살아가고 있는가. 마음이 답답해진다.
하지만 음악극 [섬 : 1933~2019]는 차별과 고립뿐 아니라,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수많은 섬들을 ‘보통의 세상’과 연결하는, 배제되어 왔던 이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을 논한다. 극에는 1933년과 2019년을 잇는, 하나의 시간대가 더 존재한다. ‘소록도의 천사’라 불리며 한센병 환자들을 헌신적으로 돌보았던, 간호사 마가렛과 마리안느가 소록도를 찾은 1966년이다. 1966년은 배제, 고립, 차별, 그리고 폭력이 만연한 1933년과 2019년과는 상반된 ‘사랑이 머무는 시간’이다. 마가렛과 마리안느는 40년 동안 소록도에서 한센병 환자들의 치료에 전념했다. 그들은 ‘한센병은 나을 수 있다’고 말하며 환자들에게 늘 희망을 전했다. 그들의 따뜻하고 섬세한 말 한 마디와, 환자들을 위해 정성스럽게 준비한 우유 한 잔은 소록도의 한센인들에게 큰 위로와 용기가 되어주었다.
환자들을 향한 진심 어린 사랑만으로, 국적도, 언어도, 생김새도 모두 달랐던 마가렛과 마리안느는 한센인들과 연결됐다. 그들은 평생을 소록도에서 한센인들과 정을 나누며 함께 살았다. 결국 1933년과 2019년을 이어주는 1966년은, 배제와 고립이 아닌 연결과 공존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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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다시 2019년, 극은 지선의 일화로 1966년의 연결과 공존이 실현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며 마무리된다. 지하철을 찾은 지원과 지선. 유독 사람이 없어 널찍했던 지하철에 지원은 눈을 반짝인다. 그는 당장 이 드넓은 공간을 뛰어다니고 싶다. 지선은 고민에 빠진다. 하지만 그를 저지한다면 소리를 지르는 등 돌발 행동이 이어질 게 뻔하고, 또다시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따가운 눈총을 견뎌내고, 자신들의 존재가 민폐인 양 연신 사과해야 하는 상황이 펼쳐질 게 보인다. 그래서 지선은 결심한다. 그래, 10살짜리 발달장애 아동이 뛰어다니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을 사람들에게 지원이 뛰는 모습을 보여주자. 그는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지원의 뒤에서 함께 뛰기 시작했다. 그 순간, 지하철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그들을 쳐다본다. 하지만 지선은 말한다. 그들이 우리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평범한 지하철 풍경으로 돌아가는 데에는 5분도 걸리지 않았다고. 심지어 한 학생은 지원이 자신을 지나칠 때는 다리를 접었다가, 그가 돌아서면 다시 다리를 펴는 등 짧은 시간 안에 그의 행동을 이해하고, 그와 ‘함께 하는 방법’을 자연스레 터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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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익숙하지 않으면 쳐다본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손가락질하거나, 위협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경험이 생기고, 익숙해지면 우리는 놀랍도록 빨리 그것에 적응한다. 발달장애인과 그들의 보호자를 향한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과 사회의 냉담한 인식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결국 그들이 장애도에 고립돼 있기 때문에, 대다수의 시민들이 그들을 만나고, 소통하며 동등한 사회구성원으로서 함께 살아보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특정 집단을 고립시킴으로써 사회 구성원들과 분리하는 이 섬이 사라져야만 우리는 공존할 수 있다. 지선과 지원의, 지하철에서의 5분의 시간은 미약하게나마 장애도를 육지와 연결해 냈다. 이후 지선은 고통스럽지만, 장애도와 육지를 연결하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될 때까지, 계속해서 해보기로 한다.
특정 집단에 대한 배제와 차별이 여전한 2019년, 그리고 그 이후의 시간들. 그 시간이 연결과 공존을 보여주었던, 사랑이 머물던 1966년으로 남을 수 있을까. 끝내 장애도를 비롯한 우리 사회의 수많은 섬들을 육지와 연결해 낼 수 있을까. 그래서 그 누구도 고립되지 않는 세상을 만들 수 있을까. 음악극 [섬 : 1933~2019]가 남긴 질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