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그중에 제일은 힘을 빼고 비우는 삶

글 입력 2024.06.14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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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게 쉬웠던 적은 없다. 무엇이든 쉽게는 얻을 수 없었다. 사람이 쉬웠던 적도 없다. 서운하고 상처받았지만 진심으로 드러낸 적은 많지 않았다. 화도 내본 사람이 낸다고. 불쑥 생각나는 말을 그대로 했다간 되돌릴 수 없을 것이니 입을 꾹 다물게 된다. 그래도 야속하고 억울하고 화가 난다.감정은 내가 아니고 곧 지나갈 것이라고 생각해 봐도 금방 사라지진 않는다. 혼자 발버둥 쳐야 가라앉는다. 서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겪어보면 역시 동족이 싫어지는 순간도 있다. 사람이 싫어질 때도 있지만 누굴 싫어하자니 에너지가 낭비되는 기분이다. 그래서인지 나를 제일 싫어했다. 가장 가까이에 있어 잘 알고 있고 가장 기대가 많기에 실망도 많았다.


잘 먹고 잘 살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스스로 불완전하고 부족하다는 생각으로 보낸 시간이 훨씬 많았다. 나를 점수로 매긴다면 선뜻 높은 점수를 줄 수는 없을 것이다. 종종 밑바닥을 찍고 다시 엉금엉금 일어나면서 지내기 일쑤다. 그래도 자주 떨어져 봐서 그런지 다시 냉큼 잘도 올라온다. 맛있는 밥만 먹어도 기분이 좋아지는 걸 보면 이렇게 단순할 수가 없구나 싶다.


초심을 잃는 것, 무뎌지는 것, 나에 대한 마음을 잃어가는 것을 걱정한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쓰고 싶어 하는지, 그걸 잃고 관성으로만 움직이고 싶지 않다. 성공은 다양한 얼굴을 하고 있다. 하는 일로 인정받고, 자가와 자차 등 필요한 것을 소유하고,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시간을 누리는 것. 누군가는 누리고 누군가는 포기하기도 하는 걸 보면 조금은 현실적인 신기루인가 싶다. 개인적으로 그보다 더 신경을 쓰는 것은 여전히 성장할 수 있다는 믿음과 마음의 평안이었다. 사실 이거야말로 신기루다. 중요하지만 그게 무엇인지 파악하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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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다행스럽게 그 길의 실마리를 찾게 해 준 두 가지 사건이 최근에 있었다. 근로자의 날 행사로 사람들 앞에서 15분 동안 혼자서 세 곡을 연주하고 멘트를 하게 된 일, 하나는 초등학교 때 했던 국선도를 다시 시작한 일이다.


생애 첫 단독 행사. 거창하게 하자면 그렇다. 요청을 받았으니 하겠다고 했지만 돈을 받고 연주를 하게 되니 책임이 무겁다. 곡을 고르는 것도, 마음을 다잡는 것도, 연습을 하는 것 무엇도 쉽지 않았다. 연주도 연주지만 어떻게 이야기를 담아서 전달할지 고민했다. 5월은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등 각종 행사가 많은 가정의 달. 근로자의 날은 그런 5월의 첫날인 만큼 주제는 사랑으로 잡았다. 누구에게나 어색하지 않고 의미 있는 사랑 노래를 찾다가 Stevie Wonder의 'Isn't she lovely', Kenny G의 'loving you', 임재범의 '사랑보다 깊은 상처' 세 곡을 골랐다.


테마는 '세 가지 맛 색소폰'. 여러 가지 색소폰 소리를 들려주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이렇게 혼자 공연을 할 기회가 또 언제 올지 알 수 없으니까. 비장하게 소프라노, 알토, 테너 각각의 소리를 들려드리기로 했다. 바리톤은 이거다 싶은 노래를 찾지 못하기도 했고 이동하기에 무거워서 제외했다.


2주 넘게 매일 연습하면서 시간이 흘렀다.저녁마다 연습하면서 불안함에 무너지곤 했다. 안 그래도 이날 행사에는 공연을 하는 다른 팀이 있다. 누가 봐도 실력파다. 오래 기타를 친 분과 보컬로 활동하는 분이 한 팀을 이뤘다. 연습하시는 걸 들어봤는데 기가 죽어 시무룩해질 정도로 잘한다. 갑자기 되던 것도 안되었을 만큼. 그에 비해 나는 방구석 뮤지션이라 부르기도 그렇다. 윈드오케스트라 사람들 품에서 숨어서 소리를 내면서 연주회를 하는 겁쟁이다. 누구 앞에서 혼자 소리를 들려주려면 잔뜩 움츠러들면서 바들바들 손이 떨린다.


그래도 침착하자. 다행히 분야는 다르지 않은가. 기타-노래가 아닌 색소폰이니까. 사실 걱정이 되는 건 혼자서 무대 경험이 적어서이기도 하지만 약점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부족한 점을 최대한 보이지 않게 보완하려고 하니 머리가 지끈지끈할 때가 많았다. 음정이 민감한 소프라노 색소폰은 상대적으로 많이 불어보지 않아 편하지 않고, 알토는 연주할 곡이 고음의 향연이라서 어그러지곤 했고, 테너는 일부러 조금 어렵지 않은 버전의 곡으로 준비했지만이 심심한 편곡을 어떻게 할지를 고민하며 멜로디를 요리조리 바꿔봤다. 혼자 연습할 때는 일희일비한다. '오, 이만하면 좋은데? 됐다' 싶은 날이 있으면 '아, 아무리 봐도 이건 망했다' 하는 날이 이어진다. 마지막까지 방심은 금물.


드디어 공연 전날. 종일 세상이 망할 것 같은 기분이 들면서 심장이 날뛰었다. 수능을 두 번 보는 것처럼 몸이 반응한다. 사람들 앞에서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면 어찌할까. 이제 꼬리표처럼 색소폰을 한다더니 더럽게 못하더라 하는 이야기가 따라다닌다면? 그래도 시간이 답이긴 하겠지. 행사 포스터에는 색소폰을 한다며 이름이 적혀있고, 보는 사람들은 기대한다고 안부 겸 말을 한마디씩 걸어주시니 죽을 맛이었다.


5월 1일이다. 이건 스스로 불러온 재앙이 될까 혹은 기회가 될까? 그저 잘 끝내고 자유의 몸이 되고 싶을 뿐이다. 우당탕탕 리허설을 마치고 공연 전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대기실에서 하염없이 서성거렸다. 햇빛이 쨍쨍 내리쬐는 야외 공연장에는 생각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햇빛이 강해서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걸 감사하기도 했다. 생각했던 멘트도 전달드리고 준비한 곡도 들려드렸다. 연주에 비하면 말은 그나마 편하다.


스티비 원더의 'Isn't she lovely'은 사랑하는 딸 아이샤를 위한 곡, Kenny G의 'loving you'는 재즈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서는 호불호가 갈린다고도 하지만 소프라노 색소폰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린 곡이다. '사랑보다 깊은 상처'는 사랑보다는 상처에 익숙하다고 느끼고 있지만 오늘은 스스로에게 자부심도 느끼고 서로의 소중함을 느꼈으면 하는 마음을 담은 곡인 걸로.


음악이 시작되면 다음 기회는 없다. 역시나 손이 떨려서 삐끗한 부분도 있었다. 당연히 연습할 때처럼 잘하진 못해서 당연히 아쉽다. 그래도 후회하지는 않았다. 최선을 다해 준비했고 틀려도 스스로를 탓하지 않기로 다짐했기 때문이다. 보내주신 박수에 민망하기도 했지만 뿌듯했다. 그리고 정말로 이제는 끝났다.


이런 사건이나 자리가 필요했던 걸지도 모른다. 소프라노, 알토, 테너, 바리톤 네 가지 색소폰을 사면서 연주회에 필요한 파트가 있다면 언제든지 준비하려고 했다. 마음의 고향은 테너이지만, 후배들이 많이 들어와서 그 자리를 고수할 수가 없어졌다. 후배들이 연주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게 가장 좋고, 최대 인원은 정해져 있다. 그에 비해 바리톤은 늘 비어있고 사람이 없으면 객원이 필요하다. 그런 상황을 예상해서 바리톤을 사기도 했지만 막상 리듬 위주의 슴슴한 악보를 연주하면 채워지지 않는 느낌도 있었다. 바리톤을 하게 되면 기쁘기만 할 줄 알았는데!


채워지지 않는 느낌은 가만히 있어서는 달라지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10년이란 시간을 무의미하게 물고 늘어진 건 아닐까 싶은 자괴감도 있었다. 정답이라곤 말할 수 없지만 새로운 시도가 현재의 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공간에서 음악을 하면 되는 일이었다. 이 공연으로 색소폰 곡을 듣고 플레이리스트에 넣은 분도, 색소폰을 배우시기로 하신 분도 있다. 또 각자 숨겨왔던 자신의 취미와 재능을 알려주기도 했다. 말하지 않아서 몰랐을 뿐 멋진 사람들이었구나 새삼 배우기도 했다.


심장 떨리게 괴로웠지만 정말 감사한 시간. 다음에도 이렇게 무대에 설 수 있는 기회가 있을까? 이번에 했던 곡들은 익숙해질 수 있게 레퍼토리로 종종 연습하고 있다. 그리고 색소폰들만 모여있는 앙상블에 테너 색소폰으로 참여하기로 했다. 행사가 쏘아 올린 시간이 색소폰과도 더 친해지고 멋진 음악을 들려줄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무엇이든 전보다 선뜻 도전할 수 있는 양분이 되기를 바라며.


행사도 마쳤겠다 이제 다른 걸 해결하러 갈 시간이다. 국선도 수련원으로 가볍게 찾아갈 수 있었다. 오래 다닌 한의원 원장님이 운동을 꾸준히 했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해주신 후 운동을 시작한 지 어연 10년이 됐다. 이쯤 되면 일정한 궤도에 오르진 않았을까 싶지만 혼란스러웠다. 오랫동안 열심히 했지만 잘하고 있는 걸까? 몸은 여전히 뻣뻣하고 비가 오기 전엔 몸이 아프다. 스트레스가 풀리긴 하지만 길을 잃은 느낌이었다.


한의원 원장님도 최근에 다시 국선도를 시작하셨다고 하면서 추천해 주셔서 그 김에 찾아서 수련원에 방문하게 됐다. 처음 보는 사범님은 이런저런 질문을 하셨다. 운동을 10년간 했지만 아쉬운 부분이 있고 초심으로 돌아가고 싶어서 왔다고 말씀드렸다. 어릴 적 부모님과 파란 도복을 입고 띠를 매고서 몸을 풀고 호흡으로 명상을 하다 보면 편안하고 개운했던 기억이 좋았다고도.


한 달 남짓 가능한 저녁마다 수련을 했다. 많이 잊어버렸지만 익숙한 동작도 있었다. 혼자 집에서 명상할 때는 잠들어버리곤 했지만 저녁에 함께 수련을 하니 머리가 비워지는 느낌이 반갑다. 대단한 건 없다. 준비운동 20분, 호흡 40분, 마무리 운동 20분. 호흡을 할 때는 5초 들이마시고 5초 내쉬고 마음만 한곳에 집중하려고 노력하면서 동작을 함께 한다.


천천히 설명도 듣고 차근차근 배우니 어느새 한 달이 지났다. 드디어 준비운동부터 마무리 운동까지 마쳤다. 어색하긴 하지만 제대로 마친 기분이다. 집에 가는 길이면 지끈거리던 머리가 호흡을 마치고 나면 맑고 차분해진다. 이렇게 지내고 싶었다. 아무 생각 없이 개운하게 비어있도록. 이런 느낌을 위해서 명상을 하는 게 아닐까. 조금 더 일찍 시작했다면 지금의 나와는 얼마나 달랐을까? 그랬다면 고민이 많아 복잡하던 머리가 조금 일찍 쉴 수 있진 않았을지. 비 오기 전이면 찾아오던 근육통도 혹시나 명상을 꾸준히 하다 보면 나아질 수 있을지 지켜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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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벌어진 조금은 이상하고 흥미로운 사건의 결론은? 앞으로도 이렇게 지내고 싶다는 마음 반, 이렇게 하길 잘했다는 뿌듯한 마음이 반이다. 이런 느낌이 오랜만이다. 늘 고민해 오던 질문들-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을까-에 대한 답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게 정답이라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역시나 마음이 가는 길을 막지 않은 것으로. 고민은 많았지만 놓지 않은 것들은 의심하지 않기로 했다. 글을 쓰고, 운동을 하고, 악기를 하면서 공부를 하는 것은 힘들기도 했지만 보람차고 든든한 일상이 되었으니까. 이제는 전보다 맛있는 요리를 다양하게 만들어 먹고, 면허도 딴 김에 멀리 나가서 풍경을 구경하는 로망도 생겼다. 1종을 딸 때 꼭 수동 픽업트럭을 운전해 보고 싶다는 꿈도 저장해 두었다. 운전에 더 익숙해지고 좋은 트럭이 나타나면 운전하게 될 날이 기대된다.


어떻게 살고 싶은지를 고민하다 보면 막막한 것도 많지만 그래도 아직 하고 싶은 게 많다는 것에 위안을 받는다. 이 모든 것 중에서도 그중에 제일로 하고 싶은 것은 생각도 판단도 비우는 삶이다. 비교하면서 불안에 휩싸이지 않고 스스로를 괴롭히는 생각에서 벗어나 나에게 집중하는 삶. 그리고 나중에는 나에 대한 생각과 판단마저도 날려 보내는 것이다. 스스로에게 숱하게 해 둔 의미 부여와 작별하려면 쉽지는 않겠지만, 일단 여태까지 한 것 중에 부질없는 것은 없었다 정도로 시작해 보자. 의심하고 불안해하던 지난 10년은 힘으로 버티고 숨어서 지냈다면 힘을 빼고 비우는 연습을 하며 보내는 앞으로의 10년은 다를 것이다.

 

 

[장지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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