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무용수의 무대는 사실 - 더 발레리나

글 입력 2024.06.08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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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을 꽤 오래 췄다. 전공자에 견줄 바는 못 되지만, 아마 전국의 영문과 중에서는 가장 오래 그리고 많이 췄으리라. 힙합을 추는 나는 언제나 무게 중심을 아래로 보내고, 무릎을 펴질 않으며, 바운스와 그루브를 연습한다. 그 많은 춤 중에서도 '힙합'이라는 장르가 주는 다양성과 자유로움이 좋았다. 각자만의 개성과 스타일이 다채롭고 타 스트릿 장르에 비해 기본 동작이 뚜렷하지 않다는 것이 매력적이었다. 제한 없이 온몸으로 자신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 그 해방감이 좋았다.

 

그래서인지 발레는 나의 영역에 없었다. 어릴 적 무용학원에서 발레복을 입고 칼군무 하는 아이들보다는 볼캡과 카고바지에 눈이 갔다. 계속 스트릿 댄스만을 고집했고, 발레와 같은 우아한 춤은 나와 거리가 먼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대학 중앙 동아리는 생각보다 더 컸다. 현대 무용 전공 친구들을 볼 기회가 적지 않았고, 그들의 춤을 보거나 내가 보여주거나 혹은 같이 추는 날들이 있었다. 점점 그들에게서 비치는 분명하고 또렷한 세계를 볼 수 있었고 현대무용 교양 수업을 수강하며 컨템포러리 무대를 보러 가는 지경에 이르렀다. 발레에서 탄생한 현대무용. 자연스레 발레라는 장르도 궁금해지기 시작할 때쯤이었다.

 

 

포스터.jpg

 

 

유니버설 발레단의 <더 발레리나>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돈키호테나 호두까기 인형과 같은 고전 발레가 아니다. 연극과 발레 그리고 브이로그 그사이의 공연이다. 특별한 무대를 위해 준비하는 과정을 고스란히 담아둔 스토리는 자극적이지 않고 잔잔하고 일상적이다. 연습실에서 삼삼오오 잡담하고, 안 되는 부분을 반복 연습하고, 서로의 파트를 봐주고 격려해 주는 무용수들의 모습은 비슷한 경험이 있는 자들에게는 공감과 향수를,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무대 밖 무용수의 새로움을 선사한다.

 

약간은 어설퍼서 더욱 사랑스러운 무용수들의 내레이션과 대사에 익숙해지다 보면, 어느덧 무용수들의 갈라쇼가 시작된다. 무대를 보러 가기 전 들뜬 관객들의 모습이 '진짜' 관객들을 한바탕 웃음 짓게 하면, 문훈숙 단장님이 올라오신다. 극 안에서의 갈라쇼와 예술의 전당의 <더 발레리나> 공연이 겹쳐지는 순간이다. 우리는 갈라쇼의 관객이자, <더 발레리나>의 관객이 되어 단장님을 바라본다.

 

 

The Ballerina-ⓒ Universal Ballet_Photo by Kyoungjin Kim (3).JPG

 

 

곧 펼쳐질 무대에 대한 간략한 소개와 함께. 클래식 발레와 네오 클래식 발레의 차이점을 몸소 보여주며 감상 포인트를 짚어주셨다. 흔히 발레의 이미지로 떠올리던 골반부터의 턴아웃, 항상 중심을 끌어올리는 수직성, 백조를 연상케 하는 우아함과 칼군무의 딱딱함. 네오 클래식 발레는 이러한 규칙을 끊임없이 무너뜨리고 곡선을 사용하여 새로운 느낌을 시도한다. 덕분에 발레를 처음 감상하는 나도 어떤 부분에 유의하여 발레를 감상해야 할지 미리 틀을 잡을 수 있었달까. 문훈숙 단장님의 목소리에 묻어있는 약간의 긴장감과 자부심은 나의 심장도 함께 뛰게 만들었다.

 

갈라쇼의 막이 오르고. 아 이제부터는 전형적인 쇼 형식으로 진행되겠구나- 하던 나의 예상과는 달리, 매 순간 연극적 요소로 가득했다. 공연 바로 직전의 분장실과 대기실의 모습을 내보이고, 심지어는 바닥을 닦아주시는 분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무용수들이 무대에 올라갈 준비를 하고 또 무대를 끝마치고 내려가는 무대 옆 공간까지를 무대로 끌고오기도 했다. 어떤 객석에서도 나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는 항상 무대에 있는 것처럼 행동해야 하는 암묵적인 규칙을 깨부순 기분이랄까. 흔히들 생각하는 프로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모습들도 함께 보여주고 있음을 강하게 느낄 수 있었다.

 

 

The Ballerina(하남)-ⓒ Universal Ballet_Photo by Kyoungjin Kim (410).jpg

 

 

<더 발레리나>의 갈라쇼 장면에서 선보이는 작품들은 하나 같이 놀라웠다. 발레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일지라도, 그들의 움직임 자체만으로 눈이 꽉 찬다. 드러나는 근육과 몸의 선, 음악과 어우러지는 표정과 고개의 각도, 무용수끼리의 미세한 표현력 차이. 주인공과 스토리 없이, 음악 자체의 리듬과 요소에 집중하여 춤을 추는 무용수들을 보다 보면 경이로움을 넘어서 춤이라는 행위 자체를 사랑하게 될 수밖에 없어진다. 누가 발레가 여리여리하다고 했는가. 미디어를 넘어 두 눈으로 직접 본 발레는 연습량을 감히 짐작할 수조차 없을 정도의 강함과 견고함을 내뿜고 있었다.

 

단언컨대 이 갈라쇼의 하이라이트는 <미리내길> 과 <비연>이다. 한국 전통 무용과 발레를 융합하여 재탄생시킨 작품. 머릿속에 함께 떠오르는 문훈숙 단장님의 앞선 설명과, 현대 무용 교양 시간에 잠시 배웠던 <아리랑>은 풍부한 감상을 도와주었다. 허리를 굽게 하고, 무릎은 항상 굴신을 유지한 채, 태극 문양의 손동작을 지속하던 경험. 어딘가 거친, 땅에서 전달되어 오는 에너지를 표출하는 기분이었달까. 그들의 손짓과 곡선에 집중하며 음악과 춤에 점점 빠져든다.

 

전혀 반대되는 듯한 두 움직임이 어떻게 만났을까- 하는 염려가 무색하게도 아름다움 자체의 작품이었다. 한국의 정서인 '정'. 다른 단어로는 어떻게 번역할 수조차 없는 그 이상하고도 거대하고 강렬한 감정이 잔뜩 묻어나는 움직임이 가득했다. 특히, 죽은 남편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을 표현한 <미리내길>은 듣기만해도 구슬퍼지는 국악 소리와 함께 그 감정선의 폭발을 경험케 한다. 분명하게 포착되는 발레 속 한국 무용의 요소는 깔끔하게 잘 녹아들어 있었고, 발레와 한국 무용을 모두 안고 갈 수 있는 은은한 푸른빛의 의상 또한 적절히 느껴졌다.

 

갈라쇼가 막을 내리고, 무용수들은 다시 연습실로 돌아왔다. 화려하고 찬란했던 무대에 깊이 빠져있거나 그들끼리의 여운에 잠겨있는 모습은 아니었다. 그저 또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연습할 뿐.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사실 무대에 서기 위하여 춤을 추는 것이 아니다. 춤을 춘다는 것은 곧 일상이, 인생이 무대가 된다는 것이다. 인생이라는 무대. 나라는 관객. 그 속에서 언제나 최선을 다하고, 본인을 바라보는 삶. 유니버설 발레단이 <더 발레리나>를 통해 보여준 무대의 확장은 그런 것이 아닐까. 무용수의 삶에 대한 사랑과 애정이 가득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한정아.jpg

 

 

[한정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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