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당신의 지난 슬픔 곁에 있어 주진 못했지만 - 슬픔에 이름 붙이기 [도서]
-
인터뷰
2주 전 엄마를 인터뷰했다. 소규모 인터넷 언론사에 기자로 취업하고 나서 하루 기사 3건 발행을 정신없이 채워야 하는 탓에 컨택이 쉬운 가족에게 인터뷰 요청을 하게 된 것이다. 현재 근무하는 회사는 1인 가구 전문 언론사라 50대 1인 가구인 정영숙 씨는 어렵지 않게 인터뷰 타겟이 되었다.
엄마의 인터뷰는 ‘반려동물을 키우는 50대 1인 가구’로 수식되어 발행되었다. 혼자서도 번듯하게 잘 먹고 잘살고 있다는 내용으로 마무리되었지만, 난 그날 인터뷰를 통해 그녀의 삶 저변을 감싼 지난 외로움과 불안 등의 슬픔을 다시금 발견했다.
그날 엄마는 내게 당신의 지난 슬픔에 대해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물론 나도 묻지 않았다. 우리가 평생 공유한 슬픔을 다시 말로 되뇌는 건 피차 지긋지긋하다. 그럼에도 나는 그녀의 슬픔을 나만큼은 언뜻 이해한다고 생각했다.
책 <슬픔에 이름 붙이기>
슬픔을 토로하는 건 미안하고도 수치스러운 일이다. 타인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전이시키는 동시에 자신의 취약함을 내보이게 하기 때문이다. 진정 신뢰할 상대가 아니고서야, 누군들 자신만의 슬픔을 말하는 것에 주저하지 않을 수 있을까.
책 <슬픔에 이름 붙이기> 저자 존 케닉은 이런 ‘슬픔’에 대한 무조건적인 부정적 편견을 달리하게 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슬픔은 어떤 감정이 극단에 다를 때 터져 나오는 무언가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과거에만 해도 슬퍼진다는 것은 어떤 강렬한 경험으로 마음이 넘치도록 차오른다는 뜻이었다. 그것은 단순히 기쁨이라는 기계의 오작동이 아니었다. (…) 하지만 진정한 슬픔이란 사실 그 반대, 즉 인생이 얼마나 찰나적이고 신비롭고 무제한적인지 우리에게 상기시켜주는 활기 넘치는 솟구침을 뜻한다.”
존 케닉은 가지각색의 다양한 이야기를 가진 슬픔을 아주 구체적인 상황이나 동반되는 다른 감정을 들어 정의한다.
<킵> - 다른 이들은 좀처럼 보지 못하는 -은밀한 결함, 숨겨진 재능, 절대 드러나지 않는 트라우마, 절대 입 밖에 내지 않는 꿈 등과 같은- 당신 성격의 중요한 부분. 대중에게 보이는 위협을 무릅쓰기에는 너무나도 값비싼 작품들로 가득한 박물관 다락의 무질서한 보관소처럼, 그것이 거기 있는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음에도 당신 존재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남는다.
<히들드> - 비밀을 혼자서만 간직해야 한다는 사실에 외로움을 느끼는.
<소카> - 타인들의 숨겨진 연약함.
<돌러블라인드니스> - 타인의 고통을 절대 이해하지 못할 거라는 데서 오는 좌절감. 타인의 얼굴에서 고통의 희미한 흔적만을 읽어내고서 자신의 경험을 뒤져 엉성한 비교 대상을 찾아낸 후, “네 기분이 어떤지 정말 잘 알아”라고 진심으로 말해줄 수 있길 바라게 된다.
책은 ‘언어는 우리를 제대로 대변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살며 겪을 수 있는 감정을 단어로 명명하여, 하찮고 쓸모없지만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슬픔, 그 휘몰아치는 감정들을 포착하려 노력한다.
존 케닉은 이 단어를 실생활에서 사용하길 기대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단지 우리가 스스로 방황하고 있다고 느낄 때, 사실 모두가 길을 잃었다는 것을 알고 안도할 수 있기를 바라며 책을 썼다. 개인의 슬픔을 낱낱하게 기록한 이 책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휘발되지 않던 나의 슬픔이 유난스럽거나 별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그리고 그건 이상하리만치 위안이 된다.
당신의 지난 슬픔 곁에 있어 주진 못했지만
엄마와의 인터뷰는 30분간의 전화로 진행되었다. 아침에 들은 그녀의 목소리는 나긋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의연했다. 엄마는 인터뷰 중 당신은 20대 후반부터 가족을 꾸리는 것을 꿈꿔왔다고 했다. 어느 순간 아무것도 아닌 자신을 느끼고 나서는 외로웠단다. 아이를 낳으면, 그래서 아이에게만큼은 전지전능한 존재인 부모가 되면, 비로소 세상에서 쓸모를 가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단다.
우리 가족은 그녀의 기대를 충족하지 못했다. 기억나는 어린 시절만 되짚어 보아도, 가정적이지 못한 아빠는 매일같이 늦게 들어와 엄마를 섭섭하게 했고, 나와 동생은 머리가 커갈수록 엄마가 원하던 자녀 상과 어긋났으니. 엄마는 만족스럽지 못한 나와 동생을 타박하며 미워했고, 나와 동생은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인정하지 않는 엄마에게 실망해 분노했다. 가족의 빈틈을 채워주는, 언제나 엄마 곁을 맴도는 강아지 1마리와 고양이 7마리에 그녀가 의지하게 된 건 당연한 수순이다.
1년 전, 같이 한집에 살 때만 해도 그녀에게 웬만하면 말을 붙이지 않았다. 엄마에게서 묵내뢰 같은 울화를 어렴풋이 느낄 때면 그에 내가 일조했다는 죄책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엄마도 일을 끝내고 오면 피곤한 건지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그랬던 그녀가 몇 주간 당신이 차려 먹는 식사 사진을 내게 카톡으로 전송한다. 엄마 집으로 놀러 오라고도 제안한다. 그녀는 요즘 들어 말동무가 필요하거나 외로운 걸까.
엄마와 나를 두고 누군가는 누가 봐도 모녀라며 닮았다고 하고, 누군가는 엄마보다 아빠랑 닮은 것 같다고 얘기한다. 엄마와 나는 그만큼 닮았고, 닮지 않았다. 서로의 슬픔에 전혀 공감하지 못할 정도로 대립하면서도, 누구보다 서로의 슬픔을 잘 알고 있다는 말이다.
엄마 집에 가는 날, 이 책을 두고 오려 한다. 내가 밑줄 긋고 메모한 부분에 그녀도 공감할까? 내가 체크해둔 슬픔을 그녀도 겪어본 적 있을까? 어쩌면 책 하나를 두고 우리는 소카(타인들의 숨겨진 연약함)를 발견하고 온전히 하나 된 듯 유대감을 느낄 수도, 영원히 하나 될 수 없음을 깨닫고 돌러블라인드니스(타인의 고통을 절대 이해하지 못할 거라는 데서 오는 좌절감)를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권기선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