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을 잡기 어려워졌다. 글에 담아낼 이야기를 고심하는 것만으로 몇 날 며칠이 흘러간다.

이야깃거리를 찾으려 사진첩을 보고, 일기장에 꽂아놓은 책갈피를 이리저리 뒤적거려도 도통 모르겠다. 이 얘긴 너무 과한 것 같고, 저건 굳이 남들이 관심이 없을 것 같다.

알지 못하는 누군가에게 내 일상을 소개하고 마음을 전하는 게 조심스러워진 탓도 있다.

지난해에만 해도 누군가 내가 마음 쏟은 글을 읽고 공감해 주길 간절히 바랐다. 내 마음이 누군가에 닿아 위로를 주고, 공감을 불러일으켜 잠시나마 휴식하는 마음이 들기를 원했다.

그래서 내 일상의 모든 부분에서 떼어낸 이것저것 조금씩 모아 아낌없이 글로 쏟아내곤 했다. 부끄러울 것도 거칠 것도 없었다.

물론 여전히 이 마음에 변함은 없지만, 자기 검열이라는 늪에 빠져버린 게 문제다. 갈수록 좁고 높아져 가는 기준에 이것저것 쳐내고 자르고 나면 남는 알맹이가 없다.

글뿐만이 아니다. 일상 곳곳에 이런 습관이 빠르게 스며들었다.

배꼽 위로 올라오는 크롭티와 짧은 하이웨이스트 반바지를 좋아하는 내가 요즘 백화점만 가면 의도적으로 ‘어른스러운’ 옷에 손을 뻗는다. 깔끔하고 단정한 긴 팔 흰 셔츠, 달라붙지도 그렇다고 너무 펑퍼짐하지도 않은 네이비 슬랙스처럼 말이다.

턱에 손을 괴는 습관을 없애고 쓸데없는 말을 줄이려고 노력한다. 일자로 자른 앞머리도 없애려고 기르는 중이다. 가끔 일하다가 구부정해지는 자세도 싫어 배에 힘을 주고 꼿꼿이 앉아 버틴다. 입고, 말하고, 먹는 모든 것에 신경이 곤두서있다.

왜 그런고 생각해 보니 이 모든 건 내 하나의 결심에서 비롯된 것이 분명하다.

나는 올해 엄마가 될 준비를 시작한다.

불투명하고 먼 세상으로만 느꼈던 아기라는 존재가 언젠가부터 자꾸 눈에 밟히기 시작했다. 남편과 나 둘 사이에 아이가 생기게 될 모습을 그리게 됐고, 행복하겠다는 확신도 들었다.

‘내가 엄마가 된다고?’라는 생각은 자연스레 ‘어떤 어른이 되어야 하나’라는 탐구로 직결됐다.

이에 좋은 어른, 훌륭한 어른이 되기 위해 ‘어른스러움‘을 노력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 모습에 집착하는 건 꼭 얼음땡 놀이를 하는 것 같다. 원하는 기준에 맞춰 행동하려다 보니 사고와 몸은 경직되고 성격은 예민해진다. 기준에 충족되지 않을까 불안감도 덩달아 생겨버렸다.

얼음 틀에 갇혀 있다가 아침이 밝고 사람들을 만나 부대끼면 긴장이 풀린다. 그리곤 다시 집에 혼자 있을 때면 또다시 내가 만들어놓은 기준에 얼어붙고 만다.

이대로면 멋진 어른보다는 겉모습만 멋들어진 사람이 되고 말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도 차가움을 곁들인. 누가 봐도 재미없는 어른의 모습이었다.

곰곰이 주위에 정말 닮고 싶은 어른들을 떠올려봤다. 그리고 그들의 공통점을 찾았다.

사랑을 베풀 줄 알고, 미소 지어 줄 줄 알고, 기분 좋은 농담을 할 줄 안다는 것이다.

보기에는 쉬운데 실천은 참으로 어려운. 그것들을 해내는 사람은 그저 천성이 그렇게 태어난 걸까?

아닐 것이다. 이 팍팍한 세상에서 그저 사람 좋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게 얼마나 치열한 노력을 필요로 하는 일인지 나는 안다.

그들 또한 세상을 살면서 얼마나 많은 모래바람과 폭우를 견뎌냈을까. 그런데도 다시 다가오는 현실을 웃음으로, 사랑으로 마주한다는 건 그만큼 강하다는 증거다.

그래서 내가 내린 결론은, ‘끊임없이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좋은 어른이라는 것.

’이쯤이면 되겠지‘ 쉽게 정착하지 않고, 현실이 남기는 생채기에도 냉소 대신 온기를 택하고, 지친 날에도 기분 좋은 표정과 명랑한 단어를 선택하는 그런 노력 말이다.

내 계획대로라면 내년 여름에는 엄마가 되어있을 것이다.

단번에 멋진 어른, 좋은 엄마가 되기는 쉽지 않겠지만, 그래도 매일매일 노력하다 보면 꽤 말이 잘 통하는 다정한 어른 정도는 되어있지 않을까 싶다.

틀에 갇혀 날 세우고 방어하는 대신 늘 문을 개방한 채 배우고, 사랑하고, 웃어주고, 시시콜콜한 농담을 하는 그런 어른이 되기 위해 조금씩 나아가리라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