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왜 하필 글 같은 걸 쓰세요

글 입력 2023.10.15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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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필 글 같은 걸 쓰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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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글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간결한 질문만큼 답하기 어려운 것이 없다. 간결하다는 건 곧 무엇보다 포괄적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상투적인 얘기로 쉽게 넘겨버릴 수도 있겠지만, 한없이 많은 얘기를 담아낼 수도 있기에 이런 질문 앞에서는 답변자의 깊이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래서 이런 류의 질문들을 들으면 나는 순간 머릿속이 우주만큼 팽창했다가 일순간에 쪼그라들어 버리는 기분이 든다. 너무 많은 고려사항과 변수들에 압도당한 채, 입을 딱 다물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무언가를 정의하는 일 앞에서는 언제나 조심스러워진다. 어쩌면 조심보다 조바심에 가까운 감정이다. 이 감정엔 겁과 염려가 섞여 있다. A가 곧 B라는 선언은, 그 발화 자체로 세상에 거대한 선을 그어버리기 때문이다. A와 A가 아닌 것들 사이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선. 명쾌한 답을 내놓기에는 내가 미처 알지 못하는 바가 세상에 너무나 많기에, 정의는 쉽게 선택하기 힘든 서술 방식이다. 무엇 하나 확신하지 못하는 내 우유부단함을 굳이 변명하자면 그렇다.


처음 이 아트인사이트라는 공간에 발을 들이밀기까지, 그토록 고민을 거듭했던 이유도 그런 맥락에서였다. 지금도 어느 정도 여전하지만 나는 스스로를 글 쓰는 사람으로 인식하기가 어려웠다. 문화예술을 좋아하느냐는 물음에도 쉽사리 답할 수 없었다. 글이 어떻고, 문화예술이 어떻고를 논하기에는 내가 가진 밑천이 너무 얄팍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감히 비교하기에도 망설여질 정도로 높은 온도와 밀도를 가지고 예술을 대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런 사람들의 좋아한다는 표현이 가지는 무게감을 한번 인지하고 나면 감히 애호가를 자처하기 어려웠다. 매일 이것들을 끼고 사는 것도 아니고, 없으면 죽고 못사는 것도 아니니까.

 

물론 꼭 제대로 좋아해야 무언가를 논할 수 있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을 테다. 모두가 그런 진지함을 가질 필요도 없고. 자기표현의 민주화 시대라고들 하지 않나. 권위와 학식, 전문성이 곧 발언의 자격이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굳어버린 논의가 아닐 수 없다. 아무튼 에디터 자격을 가진다고 해서 누군가 나에게 대단한 걸 기대하지는 않는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적어도 내 이름을 걸고 무언가를 써내는 일을 하려면 최소한의 기준 같은 걸 스스로에게 부여해야 하지 않나 싶었다. 발언이 조금이라도 유의미할 수 있는 자질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했다. 문화, 그리고 예술이라는 말이 가진 어감이나 '있어보이는' 이미지만을 차용하는, 그런 실속없는 사람이 될까봐 두려웠다.

 

그렇게 망설이던 내 등을 밀어준 건, 다름아닌 '문화는 소통이다'라는 짧고 명쾌한 문구 한 줄이었다. 소통! 내가 그렇게 두려워하면서도 이 열린 공간의 문턱을 서성거리게 된 건 바로 그 연결되고 싶다는 욕망 때문이었다. 꼭 거창하지 않아도, 전하고 싶은 무언가를 마음에 품고서, 또 다른 누군가의 마음에 가닿고 싶다는 그 욕망. 에디터로서 기고를 시작한 이후 각종 영화나 도서들을 찬찬히 뜯어보고, 거기에 내 목소리를 하나씩 얹어낼수록 그 사실이 더욱 뚜렷하게 다가왔다. 문화, 예술, 글... 그 높고 거대해보이던 단어들에게서 느껴지는 위압감을 걷어낸 자리에는 모두 자기 자신을, 스스로가 느낀 세상을 표현하고 또 타인의 시선 속에 비친 경치를 엿보고 싶다는 열망이 있었다. 어떤 수단을 택할 것인가의 문제 이전에 근원적으로 존재하는, 표현과 수용에 대한 갈증이.

 

물론 처음의 조바심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일단 매주 혹은 격주로 뭐가 됐든 결과물을 마주해야 한다는 사실이 그랬는데, 쓰지 않고 한발 물러나 있으면서 누릴 수 있는 '가능성'의 달콤함이 매번 박살났기 때문이다. 두루뭉술한 직관과 느낌, 어렴풋한 느낌으로 남아있는 감상들을 글로 옮겨 놓고 나면 분명 머릿속에서는 반짝거렸던 것들이 무언가 빛이 바랜 것처럼 보였다. 시간에 쫓겨 꾸역꾸역 무언가를 써내는 억지스러움은 곧 내 미적지근함, 그러니까 부족한 열의 때문인 것 같았고. 뻔한 발상과 뻔한 표현과 뻔한 내용. 쓰임직한 무언가를 쓸 수 있는 사람이 되자는, 자체적으로 세운 기준에 견줘봤을 때 나는 시시하기 짝이 없어보였던 것이다. 힘이 잔뜩 들어가서 마감일이 다가올 때마다 종종 마음에 돌을 얹고 사는 기분이 들었다.

 

글을 쓰는 행위 자체 역시 만만찮았다. 문화가 무언지, 예술이 무언지, 글이 무언지, 그 어느 것도 확언할 수 없는 우유부단한 사람이라고 했지만 적어도 다음의 사실은 자신할 수 있다. 아무리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백지(모든 창작의 시작에 대한 비유로서) 앞에 섰을 때의 막막함은 언제나와 같을 것이라는 점. 표현하고 싶은 것'만'을 표현하려고 해도, 어떻게 숨겨보려고 해도, 자연스레 노출될 수 밖에 없는 스스로의 조각들이 있으며 글을 쓴다는 건 이들마저 기꺼이 내어놓을 결심이 선행되는 과정이라는 점. 그리고 이 결심에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고, 가끔은 글쓰기라는 행위 자체가 엄청난 자의식의 응축이라는 걸 납득하고 문득 창피해지는 순간을 견뎌야 한다는 점.

 

글을 쓴다는 건 이 모든 사항을 재차 확인하고 감내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다음 문장이 생각나지 않아 머리를 부여잡고, 적나라하게 드러난 나를 부끄러워 하고, 그러면서도 어느 순간 고통스러웠던 과정을 잊어버리고 또 펜을 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쉽지만은 않은 순환. 그런데 나는 왜 하필 글 같은 걸 쓸까. 백지와의 첫 독대는 언제가 되었든 두렵고, 무엇을 쓰고 나든 꼭 한 번은 후회하고 말면서도 읽고 쓰는 것을 멈출 수 없는 건, 결국 에디터 활동을 계속 이어가기로 결정했던 건 왜였을까.

 

그건 한번 맛본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이 차마 놓기 힘든 것이기 때문이었다. 표현하고 이해받고 싶다는 갈증을 가진 사람들이 한데 모인 우물, 그 곳이 바로 아트인사이트였으므로.

 

기고를 하다보면 자연스레 다른 에디터들이 쓴 글을 읽어보게 되는데, 읽다보면 비슷한 영혼의 결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음이 느껴진다. 매일 다채로운 주제를 다룬 글들이 올라오고, 같은 형식이나 주제를 가지고서도 상상 이상으로 개성적인 글들이 발행되지만 어떠한 일관성이 보인다고 할까. 그 일관성이란 건, 결국 글 같은 걸 쓸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가진 특유의 끈질김이었다.


창작물의 영역과 현실의 영역, 구분할 것 없이 이 곳의 글들은 모두 어떤 이해에의 의지를 담고 있었다. 이 이야기는 왜 만들어졌을까, 이 가수는 왜 이런 노래를 부를까, 내 삶에 일어난 이런 해프닝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세상의 이런 저런 이슈들은 왜 일어난 것일까. 이 곳의 글들에서는 유독 이해하고, 이해받고 싶은 구석이 많은 사람들, 서로의 갈증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든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섬세히 바라보려는 시도가 느껴졌다. 스쳐가는 장면 하나를, 노랫말 하나를, 일상의 한 순간을 붙들고서 몇 천 자씩의 사유를 끈질기게 늘어놓는 그들 틈에서 왠지 모를 안정감이 느껴졌다.

 

"오로지 그 상황 속에서만 가능할 수 있고 이해될 수 있는 선택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려는 시도"라는, 서사의 기능에 대한 신형철 평론가의 설명이 비단 허구에만 해당되는 얘기는 아니지 않을까 싶었다. 결국 무언가에 대해 글을 쓴다는 건, 그 존재의 구체성을 인정하고 대상의 진실과 상황에 최대한 밀접하게 다가가려는 자세를 전제한다. 어떤 존재의 맥락을 간과하지 않으려는 상냥함이, 삶과 세상의 모든 고저를 치밀하게 들여다보려는 용기가 이 공간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이 사실을 한번 인식하고 나니 쉽사리 이 공간을 떠나기가 어려워졌다. 모든 것을 효율의 이름으로 속단하는 요즘, 드물게 무언가를 파고들기 위해 존재하는 이 공간을. 그리고 어깨에 들어간 힘도 조금 뺄 수 있게 되었다. 나는 꼭 대단하고 심오한 이야기를 하려고 펜을 쥐고 있는 게 아니야. 그저 지나칠 수 있던, 묻힐 수 있던 세상의 많은 목소리들 중 하나라도 잡아챌 수 있다면 그걸로 된 거야. 이해 받지 못한다는 상처를 세상에 조금이라도 덜 남길 수 있다면 그걸로 된 거야.

 

그렇게 서두의 물음으로 돌아가본다. 문화예술은 나에게 무엇인지, 특히 나에게 글은 무엇이기에 쓰는 일을 멈출 수 없는지. 나는 답한다. 내가 이곳에서 다루는 모든 문화예술은 어딘가로 전달되길 바라는 마음들이며 나는 그 마음을 수신하고 또 내 마음을 덧붙여 어디론가 소중히 전달하기 위해 글을 쓴다. 내가 나일 수 있기 위해, 당신을 당신으로 바라볼 수 있기 위해 이곳에서 글을 쓴다.

 

그렇게 이해하는 일, 이해 받는 일을 끈질기게 이어가려 한다. 그것이 8개월 차에 접어든 한 에디터의 부족한 답변이다.

 

 

[황수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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