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어떤 이별은 슬프지 않을 수도 있다 [음악]

<Goodbye and Godspeed>, Sarah Kang
글 입력 2024.05.31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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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을 못하는 사람


 

매체 속의 이별을 떠올리면, 우리는 막연하게 아름다운 이별의 순간을 상상하곤 한다. 이별을 고하며 이젠 끝이라 선언하는 목소리의 떨림, 아름다운 테두리를 따라 볼 위 솜털을 누이며 흘러내리는 눈물방울, 그 두 사람 위로 깜빡깜빡 빛을 내는 가로등까지. 관객으로 하여금 가슴 아프지만 어딘가 마음 한 켠을 애틋하게 만드는 감동이 있는 장면이 누구에게나 선하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될까?

 

나는 이별을 해본 경험이 없다. 애초에 일상에서도 끝을 맺는 것을 어려워하는 사람이다. 지금까지의 많은 결말은 외부에 의해 만들어졌다. 고민을 멈추지 못해서 기한이 가까워져 아무 쪽이나 택하고 말 때가 대다수고, 하기 싫은 일은 끝의 끝까지 아등바등 미루는 편이다. 그리 괴로워하면서도 끝을 입 밖에 내지 못하는 나를 향해서 사람들은 자주 조언을 주곤 한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타의에 의한 결말이 좋았다.

 

끝, 마무리, 결말. 그것은 내 삶에 없을 때 낭만적이고 애처롭다. 실제 내가 그러한 것들을 잡아채려면 너무도 많은 미지수를 던져야 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감당할 수 없는 두려움은 이별을 고한 것에 대한 후회다. 만남이 그러했듯이 헤어짐으로 인해서 또다시 뒤바뀔 삶의 모습에 익숙해지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꺼려지지만, 이별 후에 오히려 뒷걸음질 친 나의 모습을 발견하고 과거를 그리워하게 될 것이 더욱 걱정스럽다. ‘차라리 힘들더라도 견딜 것을, 왜 아무것도 모른 채 이별을 택해서 이 모양이 되었을까’ 하며 나를 탓할 바에야 현재의 안전한 불편을 견디는 쪽이 좋다.

 

이러한 회피는 외부 세계와의 이별을 고민할 때엔 적당히 도움이 된다. 아무튼 언젠가 끝이 난다면 과거의 기억도 미화되어 그럭저럭 괜찮았다는 평으로 남을 수 있다. 그렇지만 과거의 자신과 이별할 때는 이러한 회피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제는 상상할 수도 없던 이야기를 만들어내던 나의 용감함은 지금으로부터 5년 이상 되었을 과거의 것이지만 나는 그것조차 ‘현재의 나’ 영역에 포함하고 있다. 분명 이제는 그러한 모습 따위 없다는 것, 스스로도 잘 알고 있을 텐데. 그렇지만 막연한 그리움과 추억 미화로 인해 아무래도 놓을 수가 없다. 내 것도 아닌 것을 억지로 부여잡고 살아가는 가운데, 더는 예전의 모습이 남아있지 않은 자신을 보고 울컥 울어버리더라도 단념할 수 없다.

 

 

sarahkang.png

 

 

 

매일의 사소한 ‘굿바이’


 

원래 좋아하던 가수였지만, Sarah Kang의 여러 노래 중 유독 이 곡을 좋아하게 된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다. 는 자기 자신과의 이별을 그리는 노래다. 또한 오직 슬픔으로만 이별을 정의하는 곡이 아니기도 하다. 다만 시간이 흐르면서 달라진 삶의 방식을 접하고, 과거의 자신을 떠나보내는 노래다. 전반적인 곡의 구조는 1절과 2절로 구분되며, 각각의 절은 사소하고 당연한 헤어짐을 질문하며 시작된다. 먼저 1절에서는 이러한 헤어짐을 되짚어본다.

 

‘어째서 해는 떠오른 뒤에 다시 져버릴까?’

‘잎은 자라서 왜 가을이 끝날 때쯤 떨어질까?’

‘왜 친구들은 누구의 잘못도 없이 자연스럽게 멀어질까?’

 

자연의 순리와 인간 특성에 의한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결국 끝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에 대해 그녀는 묻는다. 마치 전성기를 기점으로 쇠락하기 시작하는 어느 민족의 비극처럼, 절정에 다다르면 어째서 다시 고꾸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냐고 질문하듯 직시한다. 그렇게 우리의 일상에는 너무도 잦은 이별이 존재했음을 깨닫는다.

 

*

 

그리고 2절에 들어서면 그녀의 질문은 더욱 날카로워진다. 반드시 답을 알고 있어야 할 누군가에게 쏘아붙이듯, 분명한 직선으로 앞선 질문의 저의를 던져온다.

 

‘우리는 왜 이렇게 많은 것을 이야기하지 않을까?’

‘우리는 왜 작별을 고해야 할까?’

 

누구도 정답을 알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녀의 이야기는 질문의 형식을 띠어야만 하지만, 동시에 누구도 단언할 수 없기에 나열의 효과만을 지닌다. 그것은 불가피한 이별에 대한 원망, 실없는 한탄에 불과하지만 동시에 우리의 삶에 사소하고 가끔은 엄숙한 이별의 순간이 존재하며 그것이 얼마나 괴롭고 슬픈 일인지 이야기한다. 노래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담담하지만 어쩐지 그녀의 표정이 무심하지만은 않을 것 같다.

 

그렇지만 그녀가 담담한 목소리로 노래할 수 있는 것은 이별의 또 다른 얼굴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슬프고 끔찍한 헤어짐의 얼굴 반대편에는 새로운 만남과 인연을 맞이하는 얼굴이 존재한다. ‘끝은 새로운 시작’이라는 통상적인 문구처럼, 이별은 슬픈 한편으로 너무도 감격스러운 순간을 함께 가져오곤 한다.

 

여기서 Sarah가 과거의 자기 자신과 이별하게 만든 변화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바로 그녀에게 귀여운 딸아이가 찾아온 것이다. 그녀는 아이의 출산을 기다리며 이 노래를 만들었다. 그녀는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 혹은 그 이전의 언젠가를 기점으로 자신의 삶이 달라짐을 실감했을 것이다. 그녀의 삶 가운데 많은 부분이 알게 모르게 멀어져가고 또 일부가 되지 않았을까.

 

그러니 Sarah가 노래하는 이별이 슬픈 것만은 아니다. 너무도 큰 축복이 함께하는 이별일 수 있다. 이와 같이, 어떤 이별은 슬프지 않을 수도 있다. 대신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과거의 모습에 대한 아쉬움과 미련 정도는 남아있을지 모르겠다. 양손으로는 쥘 수 없는 자연의 순리를 아쉬워하는 속내가 노래로 구현되었다. 이러한 복합적인 감정이 섞인 이별 노래는 그 자체로도 아름답다. 이별의 순간은 펑펑 눈물을 흘리며 숨이 넘어갈 듯 헉헉대는 좌절이 아니라, 젖은 눈망울과 이슬 몇 방울로 마무리되는 아름다움일 수 있다는 것이다.

 

 

 

과거의 문을 닫고, 새로운 문을 연다


 

그런 의미에서 이 곡이 이야기하는 이별은 보통의 헤어짐과는 다른 감상을 지닌다. Sarah의 이별은 새로운 삶에 대한 포문을 여는 셈이다. 끝이 있다면 시작이 있기 마련이니까. 나는 그것을 유튜브 영상 댓글을 보고 알게 되었다.

 

노래 영상의 댓글 가운데 지구 반대편의 언어로 쓰여진 댓글 하나가 있었다. ‘인생의 새로운 장(章)이 당신으로 하여금 인생에 더 많은 것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도록 이끌기를 바랍니다!’ 직역하자면 이러한 말이었다. 노래를 듣고도 이별의 미련에 허우적대는 동안 깨닫지 못했던 의미가 단번에 나의 뇌 속을 관통하고 들어왔다. 헤어짐과 끝, 그 두 가지 장벽에 몸을 부딪치지도 못하고 마냥 슬퍼하던 자신에게 댓글 하나가 생각의 전환을 가져다주었다. 막다른 길로 보이던 그것이 사실은 장애물로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길, 혹은 히든 스테이지, 이스터에그였다고. 거대한 평면의 무게에 짓눌려 너머를 보지 못했을 뿐이지 다음 단계는 언제나 존재한다는 것이다.

 

지금에서야 돌이켜보면 나도 몇 개의 장 정도는 지나온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의 문을 닫고 지나온 적은 없으며, 문이 열리며 새로이 펼쳐지는 세상이 희망으로 보인 적은 없었다. 오히려 또 극복해야 할 어려움이 등장했을 뿐, 그것이 삶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과거의 나를 놓고 싶지 않아서였다. 어느 연기자나 음악가처럼 준비한 것을 모두 내보인 후에 미련 없이 무대를 걸어 나오는 일은 너무도 어려운 일이었다. 막이 내려야 할 타이밍에 여전히 그곳에 서서 우물쭈물거리는 누군가의 모습은 나였다. 비유하자면 미련으로 인해 아주 길쭉해진 애벌레 같은 모양새로 과거의 문에까지도 몸을 꿰고 있어 과거의 장을 닫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위의 댓글은 오히려 미련을 남기지 않고 앞으로 걸어 나가는 자세를 언급하고 있었다. 이미 막을 내린 1장에 대해서는 정중히 작별 인사를 남기고 2장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사이 무수한 소수(小數)에 대한 미련 따위는 없는 2장을 새로이 살아가는 자세에 대해 이야기한 것은 그 댓글이 처음이었다. 1장을 지나 2장에 발을 내디딘 현재로서는 베일에 싸인 모양새일지라도 언젠가 깎이고 다듬어져 새로운 모양으로 우뚝 설 수 있을 것이라는 응원은 몸에 솜털이 일어날 정도의 생경한 충격이었다. 현재의 불완전함도 언젠가 완전한 모양이 될 수 있다니! 동시에 1장밖에 살아보지 못한 사람의 느지막한 깨달음이었다.

 

그제야 새로움을 두려워하는 원인을 파헤쳐보기 시작했다. 2장을 두려워했던 이유는 그게 어떤 모습의 내가 되어있을지 알 수 없어서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것은 1장밖에 살아보지 않은 인간으로서 당연한 것이었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는데 현재에서 그것을 포착하는 것도 불가한 일이었다. 그러자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모두에게나 2장, 혹은 그 이상의 장이 있게 마련이지만 누군가는 나아가고 나는 그러지 못하였던 것은 두려움을 견디는 힘의 여부에 있었다. 과거의 이별과 동시에 현재의 모습을 일부 내려놓을 각오로 새로운 막을 열어낼 결단력, 이제는 그것을 끌어내고 싶어졌다.

 

 

 

떠나왔다는 것은 어디로든 갈 수 있다는 것


 

그러니 이렇게 다시 정의내려 보기로 했다. 달라진다는 것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것. 퇴보했다는 감각은 또 다른 방향으로의 진보를 암시하는 것. 두고 왔다는 것은 앞으로 놓인 무언가를 손에 쥘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나는 성장해야 할 수밖에 없으니, 난간 끄트머리에 발가락으로 서서 아등바등 버틸 바에야 행운을 구하며 크게 도약해야 한다는 것을. 이때 일부 조각이 떨어져 나가더라도 그것은 단지 결말을 향해 조각을 다듬어나가는 일부일 것임을. 이렇게 생각하고 보니, 틀을 깨고 나온 듯한 해방감이 들었다. 그리고 조금은 씩씩해져 보자고 다짐해 보았다.

 

위 노래의 마지막 가사도 이러한 의미에서 지어진 것일지 모른다. ‘Goodbye and Godspeed, my friend(안녕, 그리고 신의 가호가 있기를. 내 친구여)’라는 문구는 과거의 자신에게 던지는 문장이 아닐까. 문을 닫기 직전, 미련과 여운을 한 문장으로 줄여 털어내고 나오는 것일 테다. 

 

나는 경험의 연속으로 쌓여가는 존재다. 내가 살아오며 느끼고 깨달은 것은 나이테처럼 몸 어딘가엔가 새겨져 있겠으나, 장을 뛰어넘어와서는 더 이상 과거에 미련을 두지 않아보기로 했다. 그것이야말로 아름다운 이별이고, 또 희망찬 기대일 수 있으니까. 그러니 이미 내게 찾아온 새로운 장을 만끽하기 이전에, 마지막으로 1장의 여운을 담아 작별 인사를 보내고 싶다. 너는 과거의 그 세계에서, 나는 지금의 내 세계에서. 각자의 자리에서, 안녕, 안녕, 굿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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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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