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무한함 속에 나를 가두며 - 청혼

글 입력 2024.05.14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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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워, 그리고 안녕.

우주 저편에서 너의 별이 되어줄게.

 

- 청혼, p.154

 

 

나에게도 별이 된 사람들이 있다. 이 땅에서의 삶을 마치고 떠난 사람이기도, 한때 같은 시공간을 공유했지만 마음과 몸이 차례로 멀어진 사람이기도, 너무도 빛나는 탓에 닿을 수는 없지만 내가 가야 할 길을 꾸준히 비춰주는 사람이기도 하다. 밝기도 크기도 내뿜는 색도 다른 별들이지만, 그 존재들 덕에 나는 우주만큼이나 광할한 삶 속에서 정당한 미아가 될 수 있다. 별빛으로 감지하는 느슨한 유대감만이 날 조금은 헤매도 좋은 존재로 만들어준다.

 

배명훈 작가의 <청혼>을 덮은 나는 아스라한 별이 될 것을 자처하며 떠나는 이의 뒷모습을 곱씹을 수밖에 없었다. 미안함이 아닌 고마움을 앞세우는 이별에 대해, 거리가 만드는 정당한 그리움을 연료 삼아 나아가는 걸음에 대해서도. 그리고 나 역시 누군가의 별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문득 떠올랐다. 희미한 빛이라도 꾸준히 내뿜자는 다짐도 잠깐이나마 해야만 했다. 이건 그럴 수밖에 없는 소설이다.

 

2013년 출간되었던 배명훈 작가의 <청혼>이 개정판으로 돌아왔다. 위에 인용한 마지막 구절로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안겨준 <청혼>은 11년의 세월이 무색하게 그 빛을 조금도 잃지 않은 듯하다.

 


청혼_앞표지_띠지.jpg

 

 

이 작품은 우주 전쟁에 참여한 화자가 연인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된 소설이다. 170시간의 거리를 둔 우주 태생 화자와 지구 태생 연인 사이의 절절한 사랑을 그린 작품 같지만, 읽을수록 화자가 편지를 쓰는 대상이 연인에 국한된 것 같지만은 않은 듯한 느낌이 든다. 그보다는 우주를 향해 띄우는 러브레터 같다고 느끼는 건 비단 나만이 아닐 것이다.


화자는 우주의 광활함을 아래와 같이 표현한다.

 

 

그 너머에 있는 단 하나의 점과, 그 뒤에 다시 펼쳐진 수천 킬로미터의 허무. 그 너머에 또다시 펼쳐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공백. 그건 벽이야. 아무것도 가로놓여 있지 않지만, 아무것도 닿을 수 없는 절대적 고립 상태.

 

- p. 60

 

 

무한함은 오히려 벽이 된다. 이 작은 지구에서, 겨우 중력에 의존하며 살아가는 나이지만 나아가는 대로 길이 뻗어 있을 것이라는 사실에 언제나 설렘보다는 공포를 느낀다. 그렇기 때문에 무한의 한 지점에 스스로를 가두고 움직이지 않기를 택한다. 그러나 그렇게 좁아진 세상의 문을 찢고 들어오는 것들은 언제나 사랑이라는 명찰을 단, 나와 같은 인간들이다.

 

인간 개체를 '소우주'라 표현하는 철학적 개념에 빗대어 보면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알 수 없는 암흑 속을 영원히 헤매게 될까 봐, 그 소우주를 정신없이 날아다는 소행성에 충돌해 내 소우주가 다치게 될까 봐, 그 우주나 나를 무한이라는 감옥에 영원히 가두게 될까 봐 쉽사리 다가가지 못한다. 우리는 그렇게나 다른 존재들이라는 사실은 매력적이면서도 막막하다. 심지어 태생부터 다른 두 사람이 연인인 상황이니, 보다 더 두꺼운 벽이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화자는 연인에 대한, 지구인에 대한 이해를 착실히 더해간다. 중력에 살고 중력에 죽는 지구인들을 보며 아래와 같은 감상을 내놓기도 한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가장 원초적인 윤리는 식인이나 근친상간에 관한 금기가 아니라 위와 아래를 구분하는 능력이래. 사람의 귀는 내면에서 들려오는 자아의 소리나 양심의 소리를 알아듣기 훨씬 이전에 중력이 몸을 끌어당기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나.

 

- p.13

 

 

 

작품 전반에 '우주에는 방향이 없다'는 개념이 자주 등장한다. 위를 향해 헤엄친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같은 자리를 빙글빙글 돌기만 하는 물고기처럼, 지구인들은 우주 한 가운데에서도 버릇처럼 방향을 찾으려 한다. 중력의 지배 속에서 아래와 위를 얻는 순간 안온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걸 그저 관찰과 추측으로만 감각하던 화자였지만, 싸움의 끝에서 그는 자신 역시 '방향'과 '돌아갈 곳'을 얻었음을 깨닫는다. 바로 그의 연인 덕분이다. 무한함 속에서 가야만 하는 하나의 길을 상정하고 자신의 위치를 축소시키겠다는 그 다짐 덕분이다.

 

그것이 <청혼>이 말하는 사랑의 형태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리 없이 사람이 죽고 함대가 터지는 고요한 전쟁 속에서, 그것도 무한한 공간에서 치루는 전쟁 속에서 돌아갈 곳 없이 인간은 싸울 수 없다. 우리는 사랑하는 누군가를 통해 기꺼이 자신을 좁히길 택하고, 모순적이지만 그 결과로 자신의 소우주가 또 한 번 넓어졌음을 깨닫는다. 우주 저편으로 멀어지는 화자의 마음이 꼭 그러할 것이다.

 

<청혼>은 막막한 우주에서 펼쳐지는 로맨스가 가미된 덕에, SF라는 장르가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거부감 없이 읽을 수 있는 소프트한 소설이다. 각자의 소우주를 되돌아보며, 11년만에 개정판으로 돌아온 배명훈 작가의 <청혼>을 놓치지 않기를 바란다.

 

 

[오송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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