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칼럼·에세이

 

 

아이의 삶을 그리는 영화를 보고 마음이 움직인 기억이 많다. 누구나의 한 때인 취약한 시절의 존재는 사람들이 합리라는 미명 하에 묻어버린 타인에 대한 연민에서 말랑한 손으로 흙먼지를 털어낸다. 그래서 언젠가, 아마도 어린이날이 가까워져 올 때쯤 그런 영화들에 관해 이야기해 보는 것도 좋겠다 싶었다. 그런데 비교적 최근 이 영화를 마주치고 생각이 바뀌었다. 아이에 대해 말하고 싶다면 <비밀의 언덕>으로 운을 떼는 편이 옳다.

 

 

batch_문구점 명은.jpg

 

 

영화는 1996년, 그때 그 시절의 정취가 한껏 묻어나는 문구점에서 시작된다. 주인공 명은이가 선물을 고르고 있다. 앳된 얼굴엔 사뭇 진지한 표정을 띄우고, 채 다 자라지 않아 동그란 손끝으로 야무지게 물건을 이리저리 재어본다. 그가 세심하게 고민하고 있다는 것, 자신에게 중요한 선택을 앞두고 진중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것이 충분히 전달될 정도로 긴 시간 동안 고뇌하는 얼굴과 선택지 사이를 오가는 손의 클로즈업이 화면에 머문다.

 

이 영화가 발휘하는 최고의 장점이 첫 장면부터 유감없이 드러난다. 긴 호흡으로 바라본 차분한 몸짓은 어른의 행태를 지켜볼 때의 감각과 크게 다를 것도 없다. 담임 선생님을 위해 정성껏 고른 선물의 무게를 단다면 기특하고 가상한 귀염성보다는 영리한 처신과 뚜렷한 욕망 쪽으로 저울이 기울 것이다. 인정 욕구를 바탕으로 야망을 키워가는 인물인 명은이는 가정 환경에 대한 면담을 교실 앞쪽이 아니라 선생님의 연구실에서 비밀스럽게 했으면 좋겠다는 청탁을 드리기 위해 그토록 고심하여 선물을 골랐다. 자신에게 닥칠 게 분명해 보이는 불리한 상황에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적극적인 주체성이다.

 

아이가 발휘하는 주체성. 그에 주목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어른의 관점에서 그들은 너무 취약하고 미숙하다. 뭔가를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기보다는 그저, 주로 어른에 의해 주어진, 상황에 휩쓸리기 마련인 존재들이다. 심지어 어른 주체가 과거를 회상할 때조차 그 속의 어린 자신은 뭔가 중요한 사실을 모르거나 서툴게 행동하거나, 불우한 환경의 가련한 피해자이거나 운 좋게도 따사한 유년기를 보낼 수 있었거나, 중요한 타자의 짐이나 구원이었거나, … 더 근본적으로는 현재의 주인공에 이르기 위한 과정이라는 점에서, 어린 시절은 결국 성인의 부속에 머문다.

 

반면 <비밀의 언덕>에서는 1996년이 현재로 화한다. 어렸던 그 시절이 아니라 현재를 사는 명은이의 생각, 감정, 선택, 행동이 마땅한 무게로 스크린에 올려진다. 이곳의 현재에서 아이들은 온전한 주체가 된다. 각기 다른 성향을 지니며, 고유한 해석의 틀을 통해 세상을 보고, 각자의 갖가지 욕망을 추구하고, 복잡한 상호작용의 관계망을 형성하고, 엄습하는 감정 위에서 파도타기를 하며,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의 선택을 하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한다. GV 행사에서 감독은 간단한 말의 조합으로 이를 표현하였다. ‘작은 여자 인간’.

 

솔직히 말해 초등학생의 것으로 보기엔 인물의 언행이 너무 조숙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그가 매 순간 중심에 있으면서도 인물의 관계가 납작하게 편향되지 않은 실제의 세상 같은 감각을 구현했다는 장점이 훨씬 크다. 작고 큰 인간 모두가 빠짐없이 하나하나 생을 부여받았기에 아이의 주체성은 촘촘한 실체를 띠게 된다.

 

 

batch_빨.jpg

 

 

새빨간 야망을 품은 작은 인간은 갖가지 색의 인물들과 관계를 맺으며 자신의 색을 찾아간다. 명은이는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으려는 선택을 해 온 아이다. ‘금색이 최고로 좋은 색’이라 골랐던 선물 포장의 리본을, 아무리 생각해도 선생님은 핑크색을 더 좋아하실 것 같아서 숨을 씩씩거리며 올라온 언덕을 한달음에 다시 뛰어 내려가 바꿔 올 정도다. 엄마를 조르고 졸라 옷을 사러 가놓고 자신이 고른 체크무늬 원피스는 촌스럽다는 엄마의 말을 따라 빨간색 하트 무늬 원피스를 사 오기도 한다.

 

이후 명은이는 빨간 체크무늬 남방을 입고 처음 마주친, 늘 파란 머리띠를 쓰는 전학생 혜진이와 글쓰기 대회 수상을 두고 묘한 경쟁 구도를 형성한다. 청홍의 대비만큼이나 둘은 글쓰기도, 행동 방식도 전혀 다르다. 바람직한 모습을 새빨갛게 꾸며내 온 명은이는, 있는 그대로의 솔직한 모습을 시리도록 새파랗게 고발하는 혜진이의 방식을 따라 해보기로 한다. ‘가정의 달 기념 성원시 어린이 글짓기 공모전’에 명은이는 한 번도 토로해 본 적 없는 고백의 글을 제출한다. ‘젓갈 가게를 운영하는 억척스러운 엄마, 한량 같은 무직 아빠, 이기적이고 교양을 차릴 줄 모르고, 내 입장을 배려해 주지 않는 우리 가족이 부끄러워요.’

 

 

batch_언덕에서.jpg

 

 

결과는 꿈에 그리던 대상. 그런데 명은이는 기쁜 것도 잠시, 상을 받아서 글이 신문에 실리면 상처받을 가족이 마음에 걸린다. 뒤척이다 잠에서 깬 명은이는 해도 뜨기 전 가게 문을 열러 가던 엄마가 쓰고 있었던 모자처럼 샛노란 옷을 입고 어슴푸레한 새벽빛 속에서 홀로 고민한다. 엄마도 명은이도, 가장 깊은 곳에 가족을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은 같다. 결국 수상을 포기한 명은이는 노란 후드티, 파란 바지, 빨간 가방을 메고 높은 언덕을 올라간다. 가장 솔직하게 써서 가장 큰 박수를 받을 수 있었으나, 또한 가장 사랑하는 타자에게 큰 상흔을 남길 글을 토닥토닥 밟아 올라가 흙 속에 고이 묻는다.

 

그렇게 작은 인간의 마음속에 ‘비밀의 언덕’이 생겨났다. 아마 그를 지켜본 많은 다른 인간들도 각자의 비밀의 언덕을 떠올렸을 것이다. 혹은 아직 묻을 언덕을 찾지 못한, 새빨개지고자 하느라 아직 새파랗고, 그럼에도 결국엔 샛노랄 이야기가 어스레히 떠올라 잠을 설칠지도. <비밀의 언덕>의 작고 큰 인간들은 그만큼 생생하게 살아서, 다른 인간의 생까지 오르락내리락 달음박질친다.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