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삶이라는 신탁, 체제라는 두려움 - 출입국사무소의 오이디푸스 [공연]

경계 위를 부유하는 당사자성
글 입력 2024.04.25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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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났다. 어딘가에 도착하기 위해.

자꾸 뒤를 돌아본다.

총소리는커녕 호루라기 소리도 없는데 자꾸 뒤를 돌아본다.

자꾸 없는 소리를 듣는다. 자꾸 깜짝 놀란다.

도착은 쉽지 않다.

어떤 차의 트렁크에는, 어떤 배의 밑바닥에는, 어떤 고무보트에는......

‘숨죽인 숨’이 있다.

 

 

연극 <출입국사무소의 오이디푸스>는 어떤 차의 트렁크, 어떤 배의 밑바닥, 어떤 고무보트에 붙은 ‘숨죽인 숨’과 같이 작고 낮은 위치의 발화자로부터 시작한다. 하지만 그들은 들떠 보인다.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일까.

 

하지만 운명이라는 거친 신탁이 주재했던 삶을 치열히 살아낸 여섯 명의 오이디푸스들은 새로운 시작을 위해 발돋움한 이곳에서도 이전의 신탁을 닮은 어떤 것들의 아이러니를 목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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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존재하고 있으나 잘 보이지 않는 서발턴의 자리에 위치한 여섯 명의 오이디푸스들은 떠다니는 본인의 몸을 삶에, 그리고 땅에 정착시키기 위해 부단히 애쓴다. 땅이라는 것은 곧 영역이다. 영역 안에 들어오기 위해서 그들은 이곳의 체제에 순응해야 하며, 이곳의 체제로부터 자기 존재를 ‘허락’ 받아야 하는 부조리함과 마주하게 된다. 존재에의 증명만이 존재를 보장할 수 있다는 체제의 목소리는 이방인인 그들의 언어와는 너무도 다른 소리로 들린다.


어찌할 수 없는, 그렇기에 나와는 관계없는 삶이라는 신탁의 시간을 살아온 이들이 마주한 새로운 신탁은 결국 체제이다. 체제는 두려움과도 같다. 나와 우리, 그리고 타자를 구분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성벽과도 같은 체제는 너무도 쉽게 경계를 만들었고 그 경계의 내외부에 존재하는 삶을 섣불리 명명하도록 만들었다. 경계 내부의 삶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만들어진 체제는 경계 외부의 누군가에겐 신탁과 같은 강제성을 가진다.


그렇게 삶을 영위하기 위해 체제의 요구를 따라야만 하는 이방인들은삶을 위한 체제가 아닌 체제를 위한 삶을 살게 된다. 여기서 오는 아이러니함이 인상적이다. 나의 삶과 존재를 체제의 논리에 따라 증명해야 하는 그들은 삶보다 거대한 체제의 존재에 한없이 무력해진다. 소포클래스의 오이디푸스 왕에서 오이디푸스의 삶을 이끈 것이 신탁이었다면, 연극 <출입국사무소의 오이디푸스>에 등장하는 이방인들의 삶은 이끈 것은 체제이다.


기후 위기와 전쟁, 잔인하게 급변하는 삶의 흐름 안에서 우리는 모두 난민과 이주민이 될 가능성을 가진 채로 살아간다. 그것은 신탁과도 같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안전한 공간에 있는지를 항상 점검하며 살아간다. 누구나 난민이 될 수 있다는 것은 누구나 이방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후위기와 전쟁과 같은 거대한 사건과 관련하지 않더라도, 우린 항상 경계 내부와 외부를 횡단하며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우리는 체제에 귀속되어 경계 안에서 안정을 누리다가도, 체제가 규정한 잣대에 의해 또다시 주류에서 밀려나기도 한다. 내부와 외부, ‘이방인’의 개념은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 누구에게나 ‘당사자성’을 부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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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고통이 아니라 그들에 대한 우리의 두려움을 다룬 작품” - 극작가 한현주

 

 

나 또한 오이디푸스입니다. 무대 위의 그가 말한다. 연극은 이렇다, 저렇다 하고 명명하기 쉬운 삶을 살아낸 그들을 무대 위에 올려놓으면서도, 외부에 위치한 그들의 고통을 전시하기보단 내부에 있는 우리의 두려움을 스스로 직시하게 한다.


수용과 환대, 가능할 수 있을까. 수용은 이해가 아니다. 이해는 나의 자리에서 그저 관망하는 것만으로도 가능하지만, 수용은 나의 자리를 좁혀 나의 영역 안으로 그들을 끌어오는 것이다. 나의 자리를 좁힌다는 것은 나의 일부를 포기해야 한다는 말과도 같다. 결국 용기가 필요하다.


만약 정말 당신이 존재한다면, 포기가 아닌 용기를 주세요. 우리 모두가 오이디푸스이기에.

 

 

[차수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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