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당신들의 그리움엔 끝이 있나요 [전시]

글 입력 2024.04.24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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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민미술관에 처음 다녀왔다. 큰 계기는 없었고, 단순히 <포에버리즘 : 우리를 세상의 끝으로> 라는 전시명에 끌렸다. 영원주의라. 반쯤 읽고 잠시 중단한 밀란 쿤데라의 <불멸> 독서가 마음에 걸려서 그랬을지도, 아니면 단순히 저녁 일정 전까지의 홀로 나들이를 원했을지도 모르겠다. 보러 가기로 마음 먹은 영화나, 읽기로 결정한 도서에 대한 스포일러는 일절 차단하는 성격이기에. 역시나 <포에버리즘> 전시도 그냥 일민미술관의 위치만을 알고 간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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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관에 처음 한 발짝을 내딛자 긴 글이 나를 반긴다. '그리움은 이 시대의 가장 큰 산업이다.' 첫 한 줄이 강렬했다.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는데, 나도 모르게 노스탤지어가 이미 나의 가슴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흥분된 마음으로 글을 읽어 내려가는데, 쉽진 않았다. 결국 나는 꽤나 오랫동안, 스태프가 날 이상하게 생각하진 않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우두커니 서서 읽고 또 읽는다. 전시를 감상할 때의 방향잡이가 될 키워드를 당당히 쥐고 들어가야 하는데, 금방이라도 그 열쇠가 내 손에서 미끄러져서 떨어질 것만 같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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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미끈미끈 땀범벅인 손아귀로 간신히 이해한 내용은 대충 이러하다. 불완전한 지리적 이동으로 인해 발생했던 '노스탤지어'의 고전적 의미가, 현시대 이동 수단이 발전하고 디지털 미디어 등장하면서 흐려지고 결국 그 '망상에 가까운 감정' 자체만 남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영원주의(foreverism)'라는 용어를 등장시켰으며, 종결되지 않는 영원한 그리움을 소비하는 사회가 도래했다는 것.

 

이러한 영원주의의 출현은 미술을 근본적인 위기에 처하게 만든다고 이야기한다. 현대 미술은 과거의 것을 현재에 다시 제시함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갱신한다. 그러나 영원주의 사회는 영속화된 현재를 살아간다. 그렇기에 이 사회는 현대미술을 단순히 제도에 종속된 일종의 상품으로 전락시켜 비출 가능성이 다분하다는 것이다.

 

<포에버리즘: 우리를 세상의 끝으로>에 참여한 동시대 작가 12인은 이 그리움의 독자적인 출구를 모색하고자 한다. 나는 스스로 잘 이해한 것이 맞는지 전혀 알지 못한 채. '아. 이들은 감정만 남아버린, 시간이 멈춰버린, 그리고 미술을 위협하는 '영원주의'에서의 탈출구를 찾는 과정에 있구나' 라는 대략적인 생각의 흐름만을 가지고 전시 관람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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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나에게 이 브로슈어가 주어지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마 7000원을 땅에 내던 진거나 다름 없었을 것이다. 1층부터 3층까지의 전시관 약도와 전시 작품에 대한 자세한 해설, 그리고 작가의 대략적인 소개와 삶의 행적이 쓰여있었다. 덕분에 나는 예상하던 관람 시간을 훨씬 넘어서, 무려 저녁 식사를 포기하면서까지 전시 관람에 열중할 수 있었다.

 

작가 12명의, 총 41여 개 작품을 경험하고 나니 내가 처음 가지고 들어왔던 생각이 더 뚜렷해지기도, 동시에 더 흐려지기도 한 것만 같았다. 12명은 각자의 방식으로 너무나 다양한 매체를 통해 그들의 탈출구를 찾고 있었다. 회화, 조각, 사진부터 시작해서 영상물과 심지어는 게임 프로그램까지. 어떤 작품은 상당히 직관적이었고, 또 어떤 작품은 너무 꼭꼭 숨겨둔 것만 같았고, 다소 위험해 보이기도, 너무 억지스러워 보이기도, 지나치게 일상적이기도 했다.

 

박민하 작가의 <잡을 수 없는 눈 이야기> 속 인공 눈(snow) 과 할리우드 영화 산업, 그리고 우주의 이미지가 인상 깊었다. 현실에 분명히 존재하나 개인의 현실과는 동떨어져 있는 것들. 나 또한 그러한 경험한 적 없는 그리움만을 그려온 것은 아닌가- 하며 곱씹어 본다. 진짜 눈과 똑같아 보이지만 결국 주변에 함께 녹아들지는 못하는 인공 눈을 보며, 나 또한 진짜 눈이라 생각했던 수많은 양의 인공 눈을 가지고 있음을 깨닫는다. 일시적인 것을 영원하게 만들고자 하는 습성. 영원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일시성을 빼앗을 수 밖에 없기에, 결국 온전한 형태로는 절대 영원해질 수 없는 게 아닌가. 일본의 사쿠라가 지닌 미덕처럼, 끝이 있어야 아름다운 것일 텐데 말이다.

 

이유성 작가의 조각품들도 신선했다.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면, 왜곡되고 혼합되는 것처럼 '기억'을 거쳐와 완전히 그 형태가 변해버린 이미지들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덩어리가 아닌 틀만 존재하는 인체 조각도 꽤 많았는데. 내부를 비움으로써 텅 빈 공간, '안'과 '밖'을 구분할 수 없는 모양을 보여주고 있었다. 프란츠 카프카의 단편소설 '굴'을 떠올린다. 굴을 파고 있는 '무언가'는 안전하다고 느끼는 '내부'와 그렇지 못하다고 느끼는 '외부'가 명확히 구분되지 않자 큰 불안감을 느낀다. 그에게 이유성 작가의 조각품을 보여준다면, 그는 어떤 반응이려나. 아마 오히려 큰 안정감을 느끼고 위로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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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진훤 작가의 <멜팅 아이스크림>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창고 속 발견된 '수해 필름' 복원하는 다큐멘터리 형식의 영상물이다. 민주화 운동 현장 당시를 담고 있는 필름 뭉치일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동아리 MT 사진과 같은 일상적인 기록에 불과함을 확인한다. 비록, 전시 마감 시간이 다가와 전체를 감상하진 못했지만, '복원할수록 삭제되는 세계'(작가 노트, 2021)를 경험할 수 있었다. <멜팅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려 버린 필름, 민주화운동, 노동자들과 모든 것들은 끝내 그 형체를 잃고 흐물흐물 유연하게 시간을 넘나든다.

 

내가 찾아낸 끝 없는 그리움의 끝은 결국 수평적 시간성의 해체이다. 노스탤지어, 즉 '그리움'이라는 키워드에 직접적으로 접근하기보다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경계를 끊임없이 허무는 시도가 많이 포착되었다. '과거'라고 생각되었던 민주화 운동을 저 멀리 있는 '미래'라고 생각되는 곳으로 보내버리고, '과거'에서 온 이미지들을 '현재'에 가져오니 그 형태가 잔뜩 바뀌어버린다. 저 멀리에 아득히 존재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우주도, 녹아내릴 수 없는 눈도, 덩어리 없이 부피감을 제공하는 껍질도.. 공간과 시간을 펄쩍펄쩍 뛰어넘어 다니며 시공간을 뒤틀리게 만든다.

 

아이러니하게도, 영속화된 현재를 벗어나고자 했지만 결국 시간의 순환성을 확인해 버렸달까. <영원주의> 워딩을 보고 섣불리 떠올렸던, 그러나 급하게 집어넣었던 니체의 영원회귀가 다시 고개를 든다. 애초에 과거의 것이 있느냔 말이다. 더 이상 굳건히 서있지 못하고 무너져버린 시간의 기준을 처참히 밟고서는. 수직적인, 혹은 원형의 시간을 긍정하는 나. 전시를 잘 이해한 것이 맞을까? (아무렴 상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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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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