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당신] 우리를 앞서간 날들에게 전하는 편지

글 입력 2024.04.20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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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아, 너도 이따금 내 생각을 했겠지. 우리가 주고받았던 농담의 어조와 슬픔의 억양을 구분하는 것은 여전히 내게 힘든 일이야. 너무 자주 웃고, 자주 울어서일까. 그래서 모호해진 걸까. 그래서 난 너의 웃음소리와 울음소리만 기억하는 사람이 되어버린 걸까.

 

진아, 생각해 보면 우리가 했던 약속들은 하나도 지켜지지 않았어. 우리 만나기로 했잖아? 어느 계절에, 어느 모습이라도. 우리 만나서 함께 울기로 했잖아? 서로의 상처 부위를 밤낮으로 핥아주는 슬픈 짐승처럼. 넌 내게 절대 죽지 말고 살라고 했는데, 그건 약속이었나? 그것 역시도 제대로 지키지는 못한 것 같아. 미안해.

 

우리를 앞서간 날들이 있다는 생각, 넌 해봤어? 너와 헤어진 후로 달라진 점들 중 하나는 너무 먼 미래를 약속하는 일을 그만두었다는 거야. 잊혀진 날만이 버려진 날이 되는 것은 아닐 거야. 이루지 못한 날이 너무 많아서, 우리가 쉬지도 않고 토해냈던 언어들에 의해 유기된 날들이 떠올라. 왜 우리 사이에는 그처럼 많은 대화가 필요했을까? 그때의 난 너무 말이 많았는데 지금은 좀 줄였어.

 

원래 내 목소리는 이러지 않았던 것 같아.

 

진아, 여태껏 소식으로만 남아있던 사랑아. 너의 안부를 묻지 않겠다고 다짐한 순간들이 무색해. 나 다음의 사랑과 헤어짐은 어땠을까. 너에겐 또 무엇이 남았을까. 열아홉의 나는 너를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나이를 먹기 시작했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네가 이 편지를 읽게 되었으면 해. 하지만 발신인이 나라는 사실은 끝까지 몰랐으면 좋겠어. 이것 좀 봐. 난 여전히 너를 떠올리는 날에는 불가능한 상상만 늘어놓게 돼. 가능성의 틈을 조금도 허용하지 않는 상상들은 불온하다고 느껴. 지금의 난 그래.

 

진아, 너를 이해하기 위해 지긋이 눈을 감는 순간들이 늘어갈수록 나의 사랑이 질투로 비화했다는 사실을 너도 알았겠지. 알면서 모르는 척했겠지. 그러니까 난 한순간도 너를 이해하지 못했던 거야. 무언가를 이해하려고 하면 반드시 그 대상을 왜곡하게 된다는 문장을 최근에 읽었어. 넌 나를 얼만큼 이해하고 있을까.

 

네게 늦은 밤이면 곧잘 읽어주곤 했던 시들을 기억해? 넌 그때 내가 쓴 시들이 하나같이 난해하다며 솔직한 감상을 요구하는 내게 그저 웃기만 했지. 네가 나의 시들을 깊이 있게 이해해 주지 못한다고 생각했기에 다소 서운했어. 돌이켜보니 내가 전했던 문장들은 모두 너의 손이 닿지 못하는 곳에만 뿌리를 내렸나 봐. 뿌리가 굵어질수록 우리는 멀어졌나 봐. 난 시를 쓰지 않은지 꽤 됐어.

 

하나 알려주고 싶은 것이 있어. 나는 이제 더는 버릇처럼 죽고 싶다는 말을 입에 올리지 않아. 우리 관계의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네가 내게 했던 말을 기억해. 정말이야. 매일 같이 죽음을 상상하던 때와는 많이 달라졌어. 그럼에도 네가 바라는 만큼 보폭을 늘리지는 못했어. 다른 누구도 아닌 네가 나를 위해 울어줬다는 사실이 나를 이 자리까지 추동한 것이라고 믿어.

 

그러다 또 언젠가는 믿지 못할 거야. 우리가 한 사랑이 사랑이었을까? 그때의 관계를 정의할 수 있는 보다 더 자연스럽고 적합한 어휘들이 하나둘 떠오를 때마다 나도 모르는 웃음이 나와. 웃다가 울어. 그때의 너처럼.

 

진아, 우리는 우리가 반드시 필요로 했던 죄를 얻은 거야. 그 죄는 우리가 그토록 희구했던 거잖아. 우리는 이미 응당 받아야 할 벌을 받았나? 넌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 묻고 싶진 않아.

 

진아, 봄눈은 먼 곳에서 내리는 법이야.

 

살다가 한 번쯤 서로를 마주치더라도 끝내 알아보지 못한 채 지나치게 될 우리를 위해,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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