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미치광이 문학소녀들 - 뮤지컬 브론테

글 입력 2024.04.06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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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뮤지컬 <브론테>의 줄거리와

일부 장면 묘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뮤지컬 <브론테>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브론테 자매들의 이야기를 담은 창작 뮤지컬로 2022년 초연 이후 올해 재연을 맞이했다. 아마 뮤지컬 <브론테>를 관람하게 될 관객들에게 가장 큰 즐거움 중 하나는 같은 집에 사는 자매 샬럿, 에밀리, 앤이 글이라는 동일한 매개 속에서도 전혀 다른 기질을 가진다는 점과, 그렇기에 각 인물 간 관계가 무척이나 사랑스럽다는 점일 것이다.

 

 

 

그 길의 끝을 알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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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위 자매들의 사망으로 사실상 장녀인 샬럿은 어디에 내놔도 ‘잘 살 사람’이다. 진취적이며 동생들을 잘 다독일 줄 안다. 작가가 되려면 글을 세상에 어떻게든 보여주어야 한다며 남성의 가명을 통해 등단할 것을 동생들에게 제안하는 화통함도 지녔다. 결과적으로 주류 문학계에서도 가장 빠르게 호평받고 수용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차녀 에밀리는 약한 몸을 지녔다. 약한 몸은 그녀의 창작을 끊임없이 괴롭힌 원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세상에 없었던 글을 짓게 하는 관점을 그녀에게 남기기도 하였다. 막내 에밀리는 붙임성 있는 성격으로 개성적인 두 언니 사이에서 둘의 긴장감을 해소하는 인물이다. 세 자매 중 작가로서 가장 덜 알려지기도 했으나, 극 속에서 묘사되는 그녀는 누구보다 일상을 잘 살아내는 단단한 인물이다. 이들은 글이라는 공통의 꿈을 꾸며 매일 함께 글을 쓰고 합평한다.


그러던 중 받게 된 신원 미상의 편지로 인해 세 자매는 갈등을 겪게 된다. 해당 편지는 각 인물의 미래에 대한 문장이 담겨 있었는데, 에밀리와 앤을 향한 응원의 말과 달리 샬럿에게는 그녀의 오만함으로 인하여 사랑하는 것들을 잃을 것이란 악담이 적혀있었다. 특히 에밀리에게 보낸 ‘비난이 쏟아져도 멈추지 마. 오직 너는 너를 믿어야 해’라는 글귀는 에밀리의 건강이 극도로 악화하는 중에도 작업에 몰두할 힘이 되었다. 음울한 에밀리의 작품인 <폭풍의 언덕>은 등단 초기 문단으로부터 거센 비난을 받지만, 사후 재평가되어 독자 곁에 영원히 남게 된다.


극의 결말이자 절정에서 신원 미상의 발신인은 미래의 샬럿임이 밝혀진다. 인생의 어떤 순간은 성찰이라는 이름으로 씹어 삼킬 수 없어 후회가 된다. 후회가 될 것임을 다 알아도 다시 가야 하는 길이 있다. 그 길 위에서-그것을 인생이라고 하자-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을 말리는 것도, 모든 확신을 담아 응원하는 것도 나는 모두 힘이 된다고 생각한다. 결국에 그것은 자신조차 이해할 수 없는 자신의 행로에서 나를 외롭지 않게 하겠다는 타인의 다짐이기 때문이다.


샬럿의 ‘비난이 쏟아져도 멈추지 마’라는 말이 에밀리에게 힘이 된 까닭은 그것이 진심으로 에밀리가 믿고 싶었던 사실이기 때문이다. 샬럿은 그 말에서 사랑을 느낀다고 말했다. 샬럿은 자신의 동생을 잘 앎으로서 깊이 사랑했기 때문에 시간을 초월해서 에밀리에게 필요한 말을 해줄 수 있던 것이다. 그 말을 선택한 것은 결국 에밀리이다. 자신을 오만하고 사랑을 잃을 사람으로 야박하게 평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끝까지 남은 샬럿이었다.


가장 적확한 말을 해주고 싶었던 내내 슬플 샬럿과 그로 인해 마침내 끝을 아는 것처럼 달려 나간 에밀리의 행보 앞에 어쩐지 듣고 싶은 말을 들은 것 같다는 착각으로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미래에 샬럿이 쓴 편지가 과거 세 자매에게 닿게 되는 과정이 백 분 남짓한 뮤지컬에서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새 자매의 시간을 초월하는 결핍과 애정에 보다 주목한다면 세 명의 자매 작가라는 신기한 일은 오히려 설명될 것이다.

 

 

 

미치광이 문학소녀들



브론테 자매가 살았던 영국 빅토리아시기, 여성이 기대할 수 있는 삶이란 좋은 남편을 만나 결혼하고 아이를 낳거나 가정교사가 되는 길이었다. 흔히 인생은 선택이라 말하지만 실상 우리는 주어진 인생 앞에 궁색한 갈래 길들 위에 서 있을 뿐이다. 그중 어느 것도 온전한 나의 선택일 리 없다. 그리고 온전한 선택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주체성의 부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성의 단초를 밝히는 일이라고 나는 믿는다. 마치, 빅토리아시기 남성의 이름으로 글 쓰는 일을 발견한 브론테 자매들과 같이. 강제된 결혼이더라도 그 속에서 원하는 것을 하나라도 얻으려 일상과 거리에서 애쓰던 수많은 여성과 같이. 브론테 자매들은 불가능성 속에서 자신들의 이야기로 이 세계를 비집고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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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이들은 이야기를 짓고 서사에 자신을 의탁한다. 문학 중 소설은 흔히 fiction(허구)의 장르라고 말하지만, 현실에서 자기의 이야기를 찾지 못하는 이들에게 허구는 허구 이상의 의미를 지닐 수밖에 없다. 흔히 문학은 시대의 맨 앞에 서있는, 탄광의 카나리아라고 말 된다. 시대의 중핵에서 벗겨나 있는 개인들의 내밀한 이야기들은 불가능의 조건을 명백히 밝힘으로써 역으로 내일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시도가 된다. 그렇기에 세상의 변화는 문학의 몫이 아닐지라도, 모든 이야기는 시대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때때로 문학은 그 지평을 앞장서서 열어젖히는 마중물의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것을 바라는 사람들은 역사적으로 모두 미치광이 취급을 받았다. 취급을 받았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그들은 자신의 바람 때문에 실제로도 미쳐갔기 때문이다. 바뀌지 않는 현실과 타협할 수 없는 바람 속에서 개인은 그 둘 어디에도 제대로 속하지 못한 채 미쳐간다. 미치광이들은 각자 자기의 이야기를 중얼거린다. 그리고 이야기는 허구의 힘을 빌려 속삭인다. 허구를 등에 업어서 좀 더 당당하고 진실성 있게 말 걸기를 시도한다. 허구로 상정되었기에 거리를 두고 이 이야기를 바라봐주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재치 있게 웃어준다. “이 이야기는 허구예요. 그렇다고 거짓은 아니랍니다.”


문학이 약자의 이야기를 담는다면 바로 이런 지점에서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2024년 한국에서 사람들이 여전히 브론테 자매의 이야기를 공감하고 함께 눈물 흘리거나 벅차오를 수 있다면 바로 이런 이유에서지 아닐까. 연극을 좋아하는 사람들, 소설을 놓지 못하는 사람들, 이야기 속에서 숨 쉴 수 있고 삶의 여지를 발견하는 사람들에게 브론테 자매의 이야기는 어떤 순간의 자신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보며 각자가 의탁한 미래의 이야기를 중첩하는 순간 브론테 자매의 생애를 엿보는 이 연극이 자신의 생애에 대한 위안으로 가닿게 될 것임을 생각한다.

 

 

[진세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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