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굳은살

무뎌지는 것은 단단해지는 것, 단단해지는 것은 무뎌지는 것.
글 입력 2024.03.31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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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이 찢어졌다. 생각보다 깊게 베인 상처에 빠른 속도로 피가 흘러나왔고 아픔을 느낄 틈도 없이 순간의 공포에 몸이 잠시간 굳었다.

 

곁에 있던 동생 덕분에 겨우 정신을 차려 지혈을 시작했고, 상황 파악이 되자 미뤄두었던 고통이 밀려왔다. 주말이라 근처에 문을 연 병원이 없었고, 응급실을 갈 만한 부상은 아니라는 판단에 집에 있던 소독약과 연고로 응급처치를 했다.

 

방수 밴드를 붙여 놓은 상처에서 피는 계속 새어 나왔고, 가만히 두어도 욱신거리는 손가락은 쳐다보면 더 고통스러울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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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전부 아문 상처는 나만이 유심히 봐야 그 흔적을 아는 상태가 되었지만, 거의 한 달이 걸린 그 기간은 불편함 투성이였다. 내가 인정한 노고보다 훨씬 많은 일을 내 손이 해내고 있었다는 걸 절실히 실감한 시간이었다.

 

더군다나 오른손잡이에게 오른손 검지의 부상은 꽤나 치명적이었다. 물에 닿지 않아야 빨리 아문다는 것쯤이야 당연히 알고 있는 상식이었지만, 손가락이라는 부위의 특성상 최대한 피하려고 해도 상처의 회복을 더디게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중 가장 큰 물리적 고통은 필기였다. 펜을 잡을 때도, 타이핑을 할 때도, 검지 끝에 있는 상처를 공격하는 건 필수였다.

 

하루에 두 번 상처를 소독하고 반창고를 갈아줄 때 외관상으로 얼마나 아물었는지 그 경과를 살피게 됐지만, 손가락이 나아지고 있다고 실감한 건 어쩔 수 없이 눌리는 상처에서 수반되는 고통이 나날이 작아질 때였다.

 

찢어졌던 상처가 붙고 그 위로 새살이 꽤나 차오르자 지겨웠던 방수 밴드를 집어 쳐냈다. 하지만 아직 표피가 완벽히 덮이지 않은 여린 새살은 작은 물리적 자극에도 쉽게 피로해졌다. 반창고 없이 펜을 잡거나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는 건 아직 무리라는 판단에 무언가를 필기할 때면 다시 밴드를 붙였다 떼기를 반복했고, 접착제와 물기로 이중 자극을 받은 살 주변으로 한 겨울에 때아닌 습진이 생겼다.

 

껍질이 벗겨진 피부의 감촉은 새것과 오래된 것의 경계를 분명히 했고, 이전까지 외부 세계에 노출된 적 없던 피부는 상대적으로 그 이전의 것을 거칠고 투박하게 느끼도록 만들었다. 내가 의식하지 못했던 내 몸의 사용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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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중년 이후의 얼굴은 그 사람의 살아온 삶을 보여준다고들 한다. 단순히 잘 가꾸고 관리해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는 것뿐만 아니라, 수십 년의 세월 동안 쌓아온 성격이나 습관, 삶의 태도가 주름의 형태와 근육의 모양 등에 묻어나기 마련이라는 뜻이다. 노화를 완전히 막을 도리를 없겠지만, 그 말을 들으며 기왕이면 더 웃고 덜 인상 쓰려 노력해야겠다고 다짐하곤 했다. 물론 뜻대로 잘 되지는 않는 일이다.

 

갑자기 이 말이 떠올랐던 건, 어쩌면 손 역시 얼굴만큼이나 한 사람의 삶의 여정을 담고 있는 기록원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상처가 났던 내 오른손 검지는 그 옆의 엄지와 중지 손가락과 함께 다른 것들에 비해 좀 더 거칠고 단단한 살성을 가지고 있다. 스물일곱이라는, 세월을 논하기엔 여전히 같잖아 보이는, 나이에 이르는 동안 인생의 대부분의 시간을 펜을 잡아온 여정이 고스란히 손가락에 담겨 있다. 연필을 쥐는 손 모양대로 만들어진 굳은살이 그간의 내 삶을 일부 설명하는 듯한 기분이다.

 

아직 표피가 자라지 않은 새살에 얹힌 쓰라림과, 습진으로 생긴 경계 사이 피부 촉감의 차이를 느끼며, 나는 ‘굳은살’의 이중적인 의미를 생각했다.

 

대개 굳은살은 좋은 의미를 갖지는 않는다. 대표적인 예로 노화에 의해 생기는 발 각질은 거슬리고 벗겨내고 싶은 존재가 된다. 아직 세상에 노출된 지 얼마 안 된 어린아이의 여린 피부는 외부 세계의 작은 자극에도 쉽게 예민해지지만, 습관적으로 잡은 연필의 감촉은 굳은살 위로는 잘 느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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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부가 꼭 인생을 대변하는 것 같은 우습고 거창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린아이 때는 세상이 새롭고 신기한 것투성이였지만, 한 때는 특별한 의미가 되곤 했던 많은 것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의식조차 하지 않게 되었다. 굳은살처럼 내 몸에 쌓인 쓸데없는 부산물은 당연해진 많은 것들에 무감각하게 만든다. 더 많이 알고, 더 많이 경험할수록 세상이 재미 없어지기도 하는 불편한 진실이다.

 

무뎌지는 것이 꼭 나쁘기만 할까. 각질이 쌓이지 않은 새살에 묘한 이질감과 쓰라림을 느끼면서 굳은살이 꼭 무용하지만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이제 막 세상에 노출되기 시작한 피부는 고작 노트북 자판에도 고통을 받지만, 오랜 세월 단련되어온 굳은살은 연필에 찔려도 아프지 않다.

 

작은 행복에 무뎌지는 것은 씁쓸한 일이지만, 상처와 슬픔에 무뎌지는 건 우리가 스스로를 보호하는 방식이다. 살면서 수도 없이 마주쳐야 하는 위기와 고난을 지혜롭게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무뎌지는 법도 알아야 한다.

 

무뎌진다는 건 어쩌면 단단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굳은살이 생기면서, 우리는 그렇게 어른이 되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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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계기로 내 몸의 사용감을 인식하면서, 그동안 내면의 성장에 매몰되어 의식하지 못한 외관상의 세월의 흔적을 발견했다. 상처가 아물고 새살이 외부 세계에 무뎌지는 과정을 지켜보며, 내 스스로 내 마음을 단련시키는 동안 내 몸 역시 나를 지켜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됐다.

 

여전히 발뒤꿈치에 쌓이는 각질은 당연히 겪어야 할 노화를 씁쓸하게 만드는 거슬리는 존재이지만, 마냥 새것으로 보일 수 없는 손 위의 굳은살이 내 삶의 역사가 된다는 게 나쁘지만은 않다.

 

단단해지기 위해서 무뎌지는 것이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은살이 슬프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건 단단해지는 만큼 수도 없이 부딪혀야 했을 누군가의 삶의 여정 때문이다. 투박한 아빠의 손을 보며 나는 미처 다 헤아릴 수 없는 고된 삶의 역사와 그 여정에 있었을 시련과 고통을 떠올렸다.

 

몸의 다른 피부에 비해 유난히 거칠고 단단한 두 손은 내 손에 얼룩진 굳은살을 부끄럽게 한다. 나만을 지켜내는 내 손과 달리, 나까지 지켜내야 했을 손의 의미를 생각하며 부모가 된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했다.

 

손이 한 사람의 삶의 여정을 설명하는 거라면 투박한 손은 슬픔을 담고 있다. 단단해지는 만큼 무뎌지는 것이라면, 굳은살은 슬픈 것이다.

 

굳은살이 생기면서, 우리는 그렇게 어른이 되어 간다. 어른이 된다는 건 꽤나 서글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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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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