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증오는 증오를 낳는다 [영화]

혐오의 시대, 이제는 증오의 시대일지도 모른다.
글 입력 2024.03.20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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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의 시대라고들 한다. 무엇에 대한 혐오인가... 라고 묻는다면, 밤을 새워 대답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성별, 연령, 경제적 여건, 신체적 특성, 종교적 신념과 정치적 색깔까지. 도저히 특정해 낼 수 없을 정도로 만연해진 혐오를 떠올리면, 무거운 한숨만 나올 뿐이다. ‘혐오’라는 단어는 ‘바퀴벌레’ 정도에게만 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나. 언제 이렇게 다양한 단어가 되고, 문장이 되었을까나. 이렇게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혐오가 커지고 강해져서, 결국 증오가 되어버리면 어쩌나.


증오(disgust)와 혐오(hatred). 언뜻 보면 비슷해 보이지만, 분명한 차이점이 있다. 증오는 멸시와 조롱을 기반으로 한다. 내 눈앞에서 사라져 줬으면 하는 배제의 마음. 그러나, 증오는 더욱 더 능동적이고 집착적이다. 공격성을 띠는 매우 심한 반감의 상태라고 이해할 수 있겠다. 어느 순간부터 비정상적인 수준으로 발생하는 묻지마 범죄를 보며 이건 단순히 어쩌나-로 그칠 문제가 아님을 깨닫는다. 이미 우리 사회 속의 혐오는 오랜 시간 훈련되고 힘을 얻어서 증오가 되어버린 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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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증오의 시대를 고발하는 영화가 있다. 마티유 카소비츠 감독의 < 증오 >, 1995년에 개봉한 프랑스 영화이다. 파리의 외곽 지역인 방리유 (Banlieue) 에 거주하는 이민자 청년 3명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정부가 이민자 차별 법안을 통과시키자, 방리유에서는 이민자 청년들의 시위가 일어난다. 이 과정에서 과잉 진압으로 인해 16세 소년 압델이 사망하자 프랑스 사회 전체는 차가운 긴장감이 엄습한다. 경찰이 흘리고 간 권총을 손에 넣은 빈쯔는 압델에 대한 복수를 위해 경찰을 죽일 것이라 말한다. 

 

 

‘증오는 증오를 낳는다’고 배웠잖아

학교 때려친지가 언젠데. 난 거리에서 모든 걸 배웠어. 내가 배운게 뭔지 알아?

다른 뺨을 내밀면 곧 뒈진다는 거야.

 

 

흑백 필름에 잔뜩 얼룩진 증오의 흔적이 98분간 계속해서 짙어진다. <트레인스포팅>과도 견줄법한 스타일리쉬함과 세련됨. 다양하고 신선한 카메라 연출과 투박하지만 즐거운 사운드 선정. 당대 유행하던 디제잉과 비보잉, 힙합과 미국 브랜드를 엿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러나, 영국 스코틀랜드에서 찾아볼 수 있었던 멍청하지만 사랑스러운 청춘들을 이 곳 방리유에서 발견하기는 어렵다.

 

그들이 증오를 품고 있기 때문이요. 그 증오는 많은 방향성을 갖기 때문이겠다. 다른 뺨을 내밀지 않기 위해 죽기 살기로 살아가는 그들을 지켜본다. 그들의 증오는 압델을 때려죽인 경찰들에서 시작되어 인터뷰를 원하는 기자들을 거쳐 평온하게 문화생활 하는 사람들에까지 닿는다. 흑백필름이 새빨개지도록 싸우고, 욕하고, 조롱하지만 후련하진 않다. 오히려 은하수에서 길을 잃은 개미가 되어버린다.

 

빈쯔가 경찰을 죽이겠다는 선언에, 위베르는 크게 대척한다. 증오는 증오를 낳는다라. 사회가 빈쯔를 증오했고, 이민자를 증오했고, 황인을, 흑인을 증오했다. 그들의 증오는 그렇게 태어났다. 그렇게 태어난 증오가 무럭무럭 자라서 또다시 사회를 증오하고, 사회 속 누군가를, 혹은 어떤 것을 증오한다면. 그 증오는 또 다른 증오를 탄생시키겠지. 그렇게 시대는 증오에 물들고, 잔뜩 무거워진 사회는 추락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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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뜩 흥분한 채 스킨헤드를 겨냥하고 있는 빈쯔에게 위베르가 외친다. '쏴버리라고! 압델이 죽었어. 복수해. 어서 쏴!' 빈쯔의 눈동자는 그런 외침에도 확신을 갖지 못한 듯 하염없이 방황한다. 결국 누구도 쏴 죽이지 못하고, 빈쯔는 장전된 총의 무게감을 실감한다. 결국 너무도 무거워진 총을 위베르에게 넘기고, 그렇게 세 명은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는 듯 하는데…

 

그때 경찰이 나타난다. 분명 전날 발생한 소란에서 완전히 도망쳤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던 것일까. 몸싸움을 벌이고, 겁을 주는 과정에서 총이 격발된다. 그리고 그 총알에 빈쯔가 그대로 맞아 죽는다. 이를 눈앞에서 목격한 위베르는 경찰에게 총을 겨눈다. 경찰도 위베르에게 총을 겨누고. 누구를 향한 것인지 모를 총소리가 울려 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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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오는 사라지지 않는다. 사라지는 것처럼 보여도, 그저 잠시 숨어 있는 것이다. 어떤 자극에 어떻게 발현될지 모른다. 빈쯔의 사그라든 증오를 받아든 위베르가 결국은 다시 그 증오에 휩싸여 총구를 겨눈 것처럼 말이다. 위베르가 경찰을 쐈든, 경찰이 위베르를 쐈든. 중요한 것은 언제든 위베르는 장전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증오의 본질이 아닐까. 비록 그러지 않기로 다짐했었더라도. 악의 순환을 반복하지 않을 것을 수없이 되뇌었더라도 말이다.

 

 

추락하는 사회에 대한 얘기를 들어 본 적 있어?

한 층 한 층 떨어질수록, 다들 마음을 추스리려고 이렇게 말하지.

'아직은 괜찮아, 아직은 괜찮아, 아직은 괜찮아...'

하지만 추락한다는 건 중요한 게 아냐.

중요한 건 어떻게 착륙하느냐는 거지.

 

 

50층짜리 건물에서 추락했던 사람에 대한 얘기가 결말에서는 ‘추락하는 사회’에 대한 얘기로 변하며 병든 사회를 직접적으로 고발한다. 빈쯔와 사이드, 그리고 위베르를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과 그들을 담고 있는 사회는 추락하고 있다. 축축한 증오를 잔뜩 머금은 채 끝 없이 떨어지고 떨어진다. 분명히 떨어지고 있음을, 중력의 힘을 받고 있음을, 공기 저항을 느끼고 있음을 알고 있어도 그저 ‘아직은 괜찮아…’ 라고 중얼거릴 수밖에 없는 그들. 그리고 우리들. 이대로 가다가는 땅땅한 땅에 머리를 세게 부딪혀서 다시는 두 발로 서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니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생각해 봐야 한다. 우리는 어떻게 착륙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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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너희들 것이다 (Le monde est à vous)’라고 적힌 파리의 광고판을 바라볼 때면, ‘세상이 니들 거야?’ 라고 비꼬던 아파트 아주머니가 떠오른다. 굴러다니던 스프레이 통을 집어 ‘세상은 우리들 것이다 (Le monde est à nous)’ 라고 수정하는 사이드도 그랬을까. 그게 아니라면, ‘너희는 신을 믿냐? 그건 틀린 질문이야. 신이 우릴 믿냐고 물어야지’ 라고 말하던 화장실 칸 노인을 떠올린 건 아닐까. 그것도 아니라면, 바지가 내려가는 것이 부끄러워서 손을 내밀지 못해 얼어 죽어버린 그룬발스키가 스쳐 지나간 것 일수도 있겠다.

 

힘이 없는 그들의 증오는 그저 광고판의 글자를 스프레이로 바꾸는 데에만 그칠지도 모른다. 경찰을 죽이지도 못하고, 정부 세력을 바꾸지도 못하고, 사회 인식을 변화시키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 변화할 수 있다. 마음이 바닥날 때까지 세상을 경멸하고 사회에 화를 내다가도 본인들이 지닌 증오를 되돌아보고, 무게를 가늠해 보고, 결과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

 

‘너희’를 ‘우리’로 바꾸는 아이디어. 삶을 살면서 무언가를 부여받을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기만 할 순 없다. 그러다간 영영 아무것도 가지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태반일 테니 말이다. 사회가 만들어낸 프레임 속에 갇혀 지내지 않아야 한다. 사회가 정의내린 옳고 그름을 경계하고, 언제나 두 눈을 똑바로 뜬 채로 본인을 들여다봐야 한다. 그룬발스키가 되고 싶지 않다면, 문명이 지정한 수치스러움에 매몰되기보다는 '나'에게 중요한 것들에 대해 실제로 고민해 보는 연습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삶의 시작이자 착륙의 방법이 아닐까. 도저히 이 사회에서 발 딛고 서 있을 수 없는 청년들에게. 끊임없이 아래로 떨어지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그들만의 착륙은 그들 안에 있다! 고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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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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