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사라짐으로써 존재한다는 역설 - 존재하기 위해 사라지는 법

보이지 않는 상태의 가능성을 논하다
글 입력 2024.03.13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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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는 것과 나서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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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는 것보다 나서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그게 내 진짜 성향인지는 별로 고민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뭐든 남들이 알아줘야 가치를 획득하는 세상이었고, 나의 전체 중에서 가장 좋은 부분만 골라서 드러내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동경하는 사람들 역시도 각자의 역할이 눈에 띄는 사람들, 이른바 ‘활약상’을 보여주는 사람들이었지 보이지 않는 노력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아무리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일지라도 어디서든 주인공 위치를 차지하는 사람들이 늘 부러웠고, 그게 내 기질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존재하기 위해 사라지는 법』(2024, 멜라이트)라는 책의 제목이 눈길을 사로잡은 건 왜였을까. 사실은 안간힘을 쓰며 나를 드러내야 하는 세상이 피곤했을지도 모르겠다. 책의 원 부제 “Notes On Invisibility In A Time of Transparency”에서 ‘투명성의 시대’라는 표현이 특히 의미심장했다. 타고난 성격이라 여겼던 기질들이 사실은 시대상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것은 아닐까? 내 의도와는 무관하게 프라이버시가 공공연히 노출되고, 그것을 꺼려하지조차 않는 시대에 내가 그저 적응했을 뿐이라면?

 

 


사라짐으로써 존재할 수 있다면



 

“보이지 않는 모든 것과 무한한 가능성을 담은 품위 있고 지적인 안내서”


“해리 포터의 '투명 망토'가 없이도 보이지 않거나 사라지는 상태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는 매력적이고 흥미로운 가능성, 그리고 그로부터 얻을 수 있는 많은 것들, 눈에 띄지 않는 삶의 가치, 그리고 세계와의 연대”

 

- 출판사 서평 中

 

 

저자 아키코 부시(Akiko Busch)는 건축문화 잡지 〈메트로폴리스〉를 비롯해 〈뉴욕타임스〉, 〈아메리칸 크래프트〉 등 여러 매체에서 칼럼을 게재하며 문화, 자연, 건축, 디자인에 관해 다양한 글을 써왔다. 그의 풍부한 관심 분야에 걸맞게 이번 저서 역시도 자연이나 예술, 과학기술, 심리학, 혹은 대중문화를 도구 삼아 ‘보이지 않는 상태’의 의미를 다양한 시야로 고찰한다. 그에 앞서 서론부에서는 지금껏 익숙하게 받아들여졌지만 사실은 새삼스럽게도 기형적이었던 우리의 현실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짚어낸다.

 

 

“우리 시대에는 눈에 띄는 게 널리 통하는 자산이 되었고, 소셜 미디어와 감시 경제라는 두 가지 환경이 우리 삶의 방식을 재정립했다.(...) 한때는 사적인 공간으로 여겼던 집에서부터 노출이 시작된다. (p.16)


“‘보인다는 것’은 이제 수동적이라기보다는 능동적인 개념이 되었다.” (p.22)

 


저자가 지적하듯이, 인터넷을 활용하는 유아용 장난감은 소통에 도움이 되지만 아기에 대한 정보가 쉽게 해킹당할 수 있다. 사물 인터넷을 적용한 가전제품들로 장보기 습관 같은 개인 정보가 수집되고, 스마트폰은 서비스 제공자들에게 우리의 위치 정보를 보낸다. 사생활에 대한 전통적인 개념이 무너지면서, 이러한 디지털 감시에 있어 자발적 협조와 비자발적 협조의 경계마저도 흐려진 시대다.

 

 

“하지만 혼란스럽다. 공개적으로 이미지를 보여주는 데서 정체성을 찾는다면 뭔가 빠진 게 있는 것 같고 뭔가 정체성의 핵심이 약해지고, 뭔가 존엄성이나 내면성을 잃는 것 같다. 이제 ‘보이지 않기’와 ‘숨기’가 똑같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에 대해 의문을 가질 때다. 그리고 눈에 띄지 않는 삶의 가치를 재평가하고, 끊임없는 노출에 대한 어떤 해독제를 찾아내고, 이 새로운 세상에서 보이지 않고, 들키지 않거나 눈에 띄지 않는 게 얼마나 값진지 다시 생각할 때다.” (p.23)

 

 

시대가 발전을 거듭할수록 물질의 가시성이 중시되고, 그것이 정보 데이터로 치환되어 빛보다 빠른 속도로 퍼져나가는 세상에서 노출은 이제 선택의 몫이 아니다. 하지만 이토록 파괴적인 ‘드러냄’의 중요성 때문에 꾸밈없는 나 자신만의 고유성 위로는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눈에 띄지 않음으로써 누릴 수 있는 특권은 저편으로 밀려난 지 오래다. 위 문단에서도 말하듯, 이 책이 ‘끊임없는 노출에 대한 해독제’가 되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다음 장들을 읽어나갔다.

 

 


‘보이지 않는’ 상태를 이해하기


 

 

“우리 스스로 만들고, 형성하고, 관리하는 우정이 감정적으로 훨씬 충만한 깊이와 넓이를 가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소셜 미디어의 팔로어 수를 세는 것보다 상상의 친구를 만들 때 진정한 우정을 경험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 소셜 미디어로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디지털로 추적되고, 어디에서나 감시받는 세상에서 살고 있는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친구들은 우리에게 풍요로우면서 묘한 고독을 선사한다. 그들은 우리의 친구, 증인, 보호자가 된다.” (pp.72-73)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을 함의하는가? 저자는 책의 도입부에서 그 개념에 대해 먼저 소개한다. 아주 어릴 적 숨바꼭질을 통해 배우는 '숨기'의 경험부터 상상으로 만들어내는 가상의 친구에 대해 이론적으로 설명하고, 나아가 보이지 않는 상태로 얻을 수 있는 내면의 안정감에 대해 논한다. 아이들이 성장기에 인간관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활용하는 상상 속 친구가 지금의 우리에게도 위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짚고 넘어간다. 이렇게 보이지 않는 것이 가져다줄 수 있는 긍정적인 면모를 인지시킨 후, 저자는 차근차근 다양한 분야의 사례를 들어 보이지 않는 상태란 무엇인지 살핀다.

 

 

"물속에서는 바깥세상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우리와 세상의 관계는 제한되기도 확장되기도 한다. 물은 우리가 사물을 보는 방식을 바꾼다. 사물을 확대하면서 동시에 왜곡하고, 색깔도 바꾼다." (p.145)


"우리는 물속에서 주변과 하나가 되며 자유로워지고, 동시에 더 넓은 세상에 안기는 경험을 한다. 물속에서는 우리의 공간감뿐 아니라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도 바뀐다. (p.162)

 

  

스스로를 자연 관찰자라고 소개하는 저자답게, 다양한 접근 중에서도 자연의 관점에서 논하는 혼자됨이 유독 인상적이다. 그저 스스로가 전체의 일부에 불과함을 느끼게 될 때 우리는 역설적으로 마음의 평안함을 얻게 된다고 말하며, 자기중심적인 시야에서 벗어날 때 손에 넣을 수 있는 또 다른 관점을 제안한다. 그 아무도 나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는 곳으로 자발적으로 향하는 것 역시 삶의 염증을 치유하는 방식이 될 수 있겠다.

 

 

"보이지 않게 되는 건 존재하지 않는 것과 다르다. 창조적인 개인주의를 부정하는 일도, 우리를 독특하고 독창적이고 유일무이하게 만드는 특징을 포기하는 일도 아니다. 보이지 않는 상태는 짝을 유혹하고, 집과 서식지를 보호하고, 사냥하고, 방어하기 위한 전략이다. 자연계에서 위장은 미묘하고, 창의적이고, 세심하고, 영리한 특성이다. 무엇보다 강력한 특성이다. (pp.113-114)

 

"이 생물들은 자신이 어디에 속해 있는지 확실하게 이해하고, 주변과 공존하면서 어울리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조용히 순응하는 법을 보여준다. 그리고 우리 인간성의 척도는 세상에 우리를 얼마나 드러내느냐가 아니라 우아하고 조화롭게 우리 자리를 찾는 것에서 비롯될지 모른다. (p.140)

 

 

자연의 특성을 되새기면서 저자는 대자연의 품에 안기기도 하지만, 그 안에서 살아가는 작은 생명체들의 위장법을 소개하기도 한다. 주어진 환경과의 조화를 이루며, 철저하지만 포용적인 자연의 섭리의 일부로 살아가는 삶을 지켜보다 보니 우리 인간의 방식에 다시금 물음표를 새기게 된다. 인간만의 고유한 특성이 과연 자연의 방식에 조응했는가?  

 

그렇지 않다는 답변이 머릿속에 울리는 것 같다. 저자는 자연 말고도 예술가들의 발언, 과학적인 투명화 기술 등을 들어 책의 주제를 뒷받침하지만, 그럼에도 방점이 찍히는 것은 자연이다. 그가 첫 장에서 다음처럼 똑똑히 밝혀두었듯 말이다. "지구 온난화 때문이다. 세계 인구는 곧 90억 명이 된다. 이 세계에서 우리의 위치를 다시 돌아볼 수밖에 없는 시기다. (...) 우리 각자는 우리 생각만큼 그리 중요하지 않다."

 

 


잊고 살았던 내 삶의 균형, 나아가 지구의 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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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Unsplash, v2osk

 

 

책 전반에서 특정한 방향성이 뾰족하게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노출되는 삶의 피로를 중점적으로 다루기는 하지만 일방적인 비판의 논조는 옅다. 저자가 전하는 것은 그저 보이지 않을 때의 가치에 눈을 돌리는 것이다. 우리는 삶을 붙드는 매 순간마다 나의 존재가 드러나는 순간과 사라지는 순간 사이를 늘 오간다. 이 책은 그중에서도 후자의 소중함을 전달하며, 드러나지 않는 순간의 고유한 가치를 호소한다.


어떻게 보면 일상적인 메시지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에 가깝다. 저자는 개인 단위에서의 삶의 균형을 되새기라고 말하지만, 나아가 인류적 차원의 선회를 권고하며 경고의 어조를 숨기지 않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살필 수 있는 것은, 우리 하나하나의 방향성이 모여 인류의 흐름을 만든다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존재하기 위해 사라지는 법』의 표면적인 주제는 '보이지 않는 삶의 가치'이지만, 본질적인 핵심은 집단의 공기에 중독되지 말고, 끊임없이 자기 점검과 자기 의심을 거듭하라는 메시지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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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수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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