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무지 스케치북 정착 일기 [문화 전반]

생각 많은 사람이라면 공감할지도 모를 이야기
글 입력 2024.03.13 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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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많은 사람은 공감할 것이다. 우리는 누구보다 머릿속 노트를 잘 활용한다. 생각이나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머릿속에 폴더를 만들어 라벨을 붙이고 그 안에 생각을 집어넣는다. 머릿속은 수많은 폴더로 가득 차 있다. 특히 종이나 노트가 없을 때 이 머릿속 노트는 더욱 빛을 발한다. 어쩌면 생각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지 않기 위한 우리의 생존 전략일지도 모르겠다. 어찌 되었든 나에게 다른 어떤 노트보다 유용한 것이 바로 이 머릿속 노트다.

 

하지만 생각이 많은 사람이라면 이 말에도 공감할 것이다. 머릿속 노트의 용량만으로는 한계가 있어, 어떤 형식으로든 다른 노트와 생각을 나눠 담아야만 삶이 편해진다는 것을.

 

생각이 많은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 나도 다양한 곳에 내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눈에 잡히는 종이 조각부터 일기장, 휴대폰 메모장까지. 세어본 적은 없지만 이곳저곳에 적힌 글들을 합치면 수 만 개가 넘을 것이다. 생각이 떠오르면 가까운 곳에 있는 종이나 휴대폰에 적어 두었고, 없다면 잊지 않도록 머릿속에 꾹꾹 눌러 담았다.

 

올해 나는 소속된 곳이 몇 군데 늘어나고, 책임을 부여 받은 일이 더 많아졌다. 다니는 길이 바뀌었고, 하고 싶은 일도 늘었다. 그 바람에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더 빠른 속도로 증식했다.

 

그러나 나같은 사람들은 생각의 개수가 곧 기록의 개수인 사람이다. 이 상황에서 무언가 빼먹지 않으려면 분산된 생각들을 한 곳에 모아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만약 한 가지 노트에 정착할 거라면, 그것은 수기노트가 아닌 디지털 어플이나 프로그램이어야 한다고. 그렇게 느낀 가장 큰 이유가 있었다. ㅇㅇ노트, ㅇㅇ다이어리 등의 이름을 가진 스마트폰 어플부터, 트렌드를 넘어 스테디가 되어버린 노션(Notion)까지 등장한 마당에 왜인지 그런 것들을 쓰지 않으면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한 것 같다. 하지만 ‘그런 것들’ 중 하나를 고르는 일은 꽤나 어려웠다.

 

노트 어플이 이렇게 많다니. 한 달 넘게 노트 어플을 찾아 헤맸지만 결과는 실패였다. 

 

우선 선택지가 너무 많았다. 앱 스토어에 ‘노트’를 검색하면 수 백 개의 앱이 나타났다. 내 기록 스타일과 맞는 것을 찾기도 어려웠다. ‘다이어리 유목민, 이 앱에 정착합니다.’ 찬양 가득한 리뷰를 발견하면 곧바로 앱을 다운로드했다가, 나와 잘 안 맞네, 하며 금방 삭제해 버리기 일쑤였다.

 

고민하는 동안에도 기록은 계속 쌓여갔다. 만약 머릿속 노트가 눈에 보이는 노트라면 고민할 필요가 없을 텐데. 나의 노트 유목민 생활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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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책장에서 작은 크기의 검은 스케치북을 발견했다. 작년 전공 수업에서 사용했던 무지 스케치북이었다. 손보다 조금 큰 크기에, 무선 제본이라 종이를 찢을 수도 없으며, 텅 빈 흰색 종이들로 이루어진 스케치북. 열어보니 역시나 어디 하나 찢긴 부분 없이 그대로였다. 수업의 필수 준비물이라 구매한 것이었지만 나는 꽤나 그것을 좋아했고 손때가 묻도록 잘 썼다.

 

생각해보니 무지 스케치북은 머릿속 노트와 가장 닮아 있었다. 처음 기록을 시작할 때 아무런 제약이나 정렬이 없는 공간을 내가 구조화하며 채워 나가는 점이 그러했다. Delete 키를 눌러 쉽게 삭제할 수 없는 것도 비슷하다. 머릿속 노트가 눈에 보인다면 그것이 바로 무지 스케치북일 것이다.

 

나는 내 기록 행태를 모조리 디지털로 바꿔야 한다는 생각에, 그리고 모든 기록을 디지털화해야 한다는 생각에 이 사실을 미처 떠올리지 못했다. 결국 다시 스케치북을 손에 익히기 시작했다. 그 날 발견한 스케치북은 80 장 중 절반만 쓴 채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바로 다음 장부터 이어서 썼다. 스케치북이 채워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얼마 되지 않아 종이를 다 써서 이제는 내 생각이 담긴 온전한 한 권의 책이 되었다.

 

예고 없이 여기저기서 생각이 솟아나는 사람이라면 무지 스케치북보다 적합한 기록 노트는 없을 것이다. 내가 결국 어떤 앱도 선택하지 못했던 이유를 하나 더 뽑자면, 그들이 너무나 잘 정돈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깔끔하게만 써야할 것 같았다. 레이아웃도 정해져 있었다. 마구잡이로 발산되는 생각을 스케치북처럼 낙서하듯 휘갈기는 게 어려웠다. 대각선으로 글씨를 쓰거나, 글자와 그림을 마구 겹치거나, 그 지저분함에서 나오는 새로운 생각을 적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러나 무지 스케치북은 하얀 공간을 내 마음대로 채울 수 있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나는 새로운 무지 스케치북을 포함해 다양한 기록장을 함께 쓰고 있다. 비록 단 하나의 노트에 정착하지는 못했지만 대신 스케치북을 늘 가지고 다니게 되었다. 마음이 바뀌어 또 새로운 노트 앱에 도전해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건 내가 창작을 하는 한 계속해서 무지 스케치북을 채워갈 것이라는 사실과, 그렇게 완성한 스케치북들이 모여 나의 일부가 될 거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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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유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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