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우리는 모두 마음 맹인이야 - 비Bea [공연]

글 입력 2024.02.25 19:39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연극의 주인공 ‘비’는 정확한 병명도 모른 채, 만성 체력 저하 증상으로 8년째 침대에 누워 생활하고 있다. 엄마 ‘캐서린’은 그런 딸을 위해 동성애자 ‘레이’를 간병인으로 고용하고 비는 그런 레이와 함께 지내며 자유와 행복을 이루기 위해 캐서린에게 죽음을 원한다는 사실을 전하기로 한다. 편지로 그 사실을 들은 캐서린은 딸이 죽음을 원한다는 사실을 공감할 수 없다.


비는 지금의 자신처럼, 과거에 만성 체력 저하 증세를 앓았던 친구 조앤을 떠올린다. 조앤 앞에서 비는 상냥하게 대해주다가도 “엄살 좀 그만 부려, 누구나 다 피곤한 건 마찬가지야!”라고 말하고 싶었다고 고백한다. 시간이 흐르고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자신도 자기 일이 아니라고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 마음 맹인이었음을 알게 된다.

 

 

 

비와 캐서린을 이어주는 간병인 - 레이



그런 두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인물이 등장한다. 바로 동성애자 간병인, ‘레이’. 비의 진심을 캐서린에게 편지로 전달하기 위해 대필한 사람인데, 레이는 처음 비가 죽음을 원한다는 말을 듣고 놀라지만,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녀를 보살피며 점점 비를 이해하기 시작한다.


연극은 비의 방으로 꾸며진 세트장 안에서 진행된다. 공간이 한정적인 만큼, 비의 방 안에서 레이와 비가 빠르게 친해지며 가까워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대부분을 누워 보내는 비의 방에는 그녀를 위한 침대, 그리고 트레이에 쌓인 약들이 보인다. 또 취미로 하는 귀걸이 공예 조각들이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다. 800개가 넘는 귀걸이 공예 조각들은 흔들거리며 반짝거리는 모습이 아름답기도 하지만, 비의 외로운 마음이 800번이나 부서진 조각으로 보여서 한편으로는 얼음처럼 차갑게 느껴지기도 한다.


혼자 있을 비를 위해 레이를 고용한 캐서린은 일을 마치고 매일 일정한 시간에 돌아오는데, 그동안 레이는 열심히 비를 간호한다. 죽을 먹여주고, 꿀벌(Bee)처럼 들리는 비의 이름과 그런 그녀를 부르는 캐서린의 애칭 '붕붕이'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또 누구나 그런 것 같다며 공감하지 못하는 마음 맹인 이야기를 인형 놀이로 비와 함께 나눈다. 이뿐만 아니라 욕망을 느끼고 싶은 비의 속마음을 듣고 관련 소설책을 찾아 낭독해 주는 등, 비와 함께 생활하며 점점 더 가까워지고 진심으로 비가 편안하게 행복할 수 있도록 간병인으로서 최선을 다한다.


때로는 익살스럽게, 때로는 진지하게 병간호 일에 임하는 레이를 통해 캐서린에게도 조금의 봄빛이 스며들기 시작한다. 비가 원하는 행복을 공감하지 못했던 것처럼, 또 그건 살인 행위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던 것처럼. 캐서린은 경직되고, 미소 하나 없이 딱딱하게 레이를 대했다. 그랬던 그녀가 조금은 달라졌는데 그것을 알 수 있었던 건 비의 생일날이다. 연극 내내 차분했던 캐서린이 비, 레이와 함께 방안을 뛰어다니며 생일을 축하해주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춘다. 아니, 더 나아가 레이에게 짓궂은 농담을 하기도 한다. 그렇게 웃음이 만개하며 점차 세 사람은 하나가 된 듯 보였다.

 


24 비Bea_레이_강기둥.JPG

 

 

하지만 레이는 곧 떠나야 했다. 비가 아닌 자신의 누나에게, 비처럼 간병인이 필요한 요양원으로 가게 된 것이다. 그가 떠나기 전, 자신이 왜 간병인이 되고 싶었는지 무덤덤하면서도 담백하게 고백한다. 소년원에서 누군가 천을 매달아 생을 마감했고 그 순간 자기 신발에서 신발 끈을 찾았더라는 이야기다. 똑같이 죽어야겠다는 생각 대신 레이는 살아야겠다고 다짐한다. 그와 함께 간병인이 되는 선택을 한다. 그 누구에게도 드러낼 수 없는 이유였기에 '왜 간병인이 되고 싶냐'고 묻는 캐서린의 질문에 레이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연극 내내 관객들에게 웃음을 선사했던 캐릭터가 어두운 조명 사이 우두커니 앉아 다소 어두운 이 이야기를 풀어내는데, 그 모습이 어둡게만 보이지 않았던 것은 왜였을까? 어쩌면 레이의 진가가 그때 환하게 발했던 것이 아닐까?


소년원에서의 죽음을 보고, 누군가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수도 있었다. 내 일이 아니니까, 또 닥쳐올 미래라고도 생각해 본 적이 없으니까. 그렇게 타인을 남처럼 공감해 주지 못하는 사람들을 이 연극에서는 ‘마음 맹인’이라는 단어로 칭한다. 하지만 누구나 한 번쯤은 마음 맹인이 됐던 적도 있을 것이다. 사탕을 떨어트려 우는 아이를 보며 “고작 사탕인데 그 정도야 뭐.”라고 생각해 봤을 법하고, 전교 1등 친구가 모든 과목에서 하나 틀렸다고 우울해하는 모습을 보며 “1개밖에 안 틀린 게 저렇게 우울할 일인가?”라고 생각해 봤을 법도 하다.


그렇게 다른 사람의 아픔을 보고 “왜 저래? 정말 유난이야.”라고 말할 때, 레이는 “그럴 수도 있겠구나.”라고 공감하며 타인의 아픔을 들여다보고, 생각한다. 그리고 마치 제 일인 것처럼, 그 아픔이 또 다른 아픔으로 이어지지 않게 정성껏 병든 마음을 돌보는 선한 영향력을 펼친다.


생일 파티의 분위기가 고조될 무렵, 비의 발작으로 레이는 비가 곧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을 무의식적으로 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만둠과 동시에 비처럼 아픈 누나를 돌보기 위해 떠난다. 하지만 레이는 영원히 비를 잊지 않을 것이다. 아니, 잊지 못할 것이다. 함께 보냈던 시간은 레이가 더 타인을 공감하고 아픔을 나눌 수 있는 간병인으로 성장하는 데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리라.

 

 


죽음, 새로운 삶을 택하는 것


 

떠나간 레이의 영향을 받은 캐서린은 마침내 비 옆에 누워 딸의 행복을 공감할 수 있었다. 그토록 원하던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해준 것이다. 캐서린은 비가 약을 탈탈 털어 물과 함께 삼키도록 도우며 마지막을 지켜준다. 극의 마지막 장면에서 침대에 누워 슬픈 눈을 한 캐서린을 보면 비는 안락사를 선택해 결국 생을 마감한 것을 알 수 있다. 그간 자신을 공감해 주고 존중해주는 레이로부터 용기를 얻고 캐서린으로부터 도움을 받아 생을 마감할 수 있었다.


연극 내내 비가 움직일 수 있는 곳은 침대 위에서만이었지만, 마지막이자 처음으로 침대 밖에 나서서 두 발을 내디뎌 걷고 뛴다. 곧이어 올라가는 세트장 뒤로 푸른 초원이 보인다. 우뚝 솟은 사과나무 주위를 빙그르르 돌며 마음껏 뛰어다니는 비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마치 그곳이 살았던 삶이고 천국이었던 듯, 비는 한 마리의 새처럼 자유로워 보인다.

 

 

131 (2).jpg

 

 

“약을 그렇게 많이 털어먹었는데도 가만히 누워있지 않고 뛰어다니던데, 주인공이?” 연극이 끝나 공연장을 나오며 누군가는 극의 흐름을 되짚어보며 이렇게 얘기했다. “응, 그러니까. 죽음을 선택한 줄 알았는데….” 비는 죽지 않고 살았다. 살았으니 그렇게 자유롭게 뛰어다닐 수 있었다. 이는 결국 비가 죽음으로 또 다른 삶을 택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죽는다는 것은 항상 불행한 것이 아니다. 누군가에겐 이처럼 자유로운 세상으로, 마음껏 행복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비와 캐서린에게 설킨 ‘사과나무’와 관련된 일화가 떠오른다. 어느날, 사과나무 꼭대기까지 타고 올라간 어린 비는 엄마 캐서린을 보며 웃는다. 캐서린은 그런 비에게 호통을 치며 당장 내려오라고 말한다. 그러나 비는 듣지 않은 채 계속 웃을 뿐이다. 캐서린은 이 사과나무 일화를 꺼내며 나무 위에서 비가 내려오지 않자 호통을 치다가 그만 함께 웃어버렸다고 얘기한다.


죽음과 안락사, 그리고 그것에 대한 진심 어린 공감. 다소 무거운 주제로 시작된 연극은 캐서린이 사과나무 위에 올라간 비에게 호통칠 때처럼 경직되고 무거웠다. 하지만 끝에 다다라서는 캐서린이 비를 보고 마지못해 함께 웃은 것처럼, 나 또한 비의 존엄한 자유와 삶을 위해 마침내 호탕한 웃음을 보낼 수 있었다. 침대를 벗어난 두 발로 어디든 자유롭게 날아다닐 수 있길. 비, 꿀벌, 붕붕아!


 

[박정빈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8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