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포스트 아포칼립스 사이의 고요와 사랑 [영화]

<터미네이터4>의 장면 비평
글 입력 2024.02.17 13:22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하나의 장면에만 집중한 비평


[포맷변환]다운로드.jpg

 

 

우리들이 흔히 영화를 비평하다 보면 영화 한 편, 혹은 한 감독의 필모그래피, 하나의 시리즈물, 더 넓게 나아가서는 한 장르 전반을 다루게 되는 경우가 많다. 영화 한 편, 감독 한 명, 장르 하나마다 할 이야기가 많고 긴 역사와 다양한 특징들이 있으니까 말이다. 허나 영화에서 찾은 장면 딱 하나에만 집중해 비평을 하는 경우는 쉽게 찾아보기 힘들다. 벌써 수 년째, 10여 년 가까이 영미권 유튜브를 봐온 사람으로서, 하나의 장면을 분석하는 영상들을 조금씩 찾아볼 수 있었다. 허나 한국의 영화 계열 유튜브나 기타 영화 비평글, 리뷰어들의 글에서는 장면 하나에만 집중하는 글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장면 비평'을 생각하게 된 영화의 장면을 이 글을 통해 다루어 보도록 하겠다.

 

 

 

선정한 영화와 시리즈에 대한 간단한 배경


[포맷변환]다운로드 (1).jpg

 

 

장면은 바로 맥지 감독의 2009년작 <터미네이터: 미래전쟁의 시작> (이하 '터미네이터4' 혹은 '샐베이션')의 삭제 장면 중 하나이다. 장면 설명과 분석에 들어가기 전, 영화 자체에 대한 설명을 간단히 해 보자. <터미네이터> 시리즈는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1,2편 이후 큰 성공을 보지 못하고 계속해서 좋지 못한 모습을 보여준 시리즈다. 그런데 그 후속작들이 계속해서 반복해 온 실패가 한 가지 있는데, 바로 '3부작을 시작하기'다. 원래는 <터미네이터4>를 시작으로 미래를 다룬 삼부작이 시작됐어야 하나 취소되었고, 이후 리부트 <제니시스> 역시 삼부작을 기획했으나 (2017, 2018년에 두 속편의 개봉일까지 잡아놨었다) 부진한 성적으로 다시 한번 삼부작이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이후 정통 속편 <다크 페이트> 역시 개봉 전 본작이 흥행할 경우 삼부작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했으나, (제작진은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다크 페이트>의 참패 이후 삼부작은 취소되고 터미네이터 시리즈는 사실상 종결 나게 되었다. 다른 속편들이 계속 혹평을 받고 실패하면서, 새로운 이야기를 시도했다는 점 등으로 인해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는 <샐베이션>은 개봉 전 결말 유출 등으로 인해 삭제되거나 편집된 요소가 굉장히 많은 작품이다. 허나 여기서 다룰 장면은 그러한 굵직한 장면들은 아니고, 영화 개봉 이후 감독판으로 공개된 장면이다.

 

 

 

어떤 장면인가?

 

[포맷변환]다운로드 (2).jpg

 

 

본작의 중반부에서 주인공 중 한 명인 마커스 라이트 ( <아바타> 시리즈의 제이크 설리로 유명한 샘 워싱턴 )는 저항군의 여성 파일럿 블레어 윌리엄스 ( 한국계 여배우인 문 블러드굿이 연기했다. ) 를 구해주고, 그녀와 함께 저항군 기지까지 동행하게 된다. 어느덧 날이 지고 비까지 내리자, 그들은 한 주유소에서 밤을 보내게 된다. 블레어는 마커스에게 태울 만한 것들을 찾아보라 말하면서도, 계속해 옷을 들추며 왼쪽 어깨와 가슴을 확인한다. 블레어가 다쳤음을 알아챈 마커스는 그녀에게 물어보지만, 괜찮다는 대답만이 돌아올 뿐이다. 마커스는 땔감을 찾아 빗속으로 떠나고, 그런 마커스를 말없이 바라보던 블레어는 겉옷을 벗는다.

 

이후 극장판에서는 비가 그친 후 물가 근처에서 옷을 입은 블레어의 모습으로 전환하지만, 이 사이 삭제된 장면이 존재한다. 마커스가 땔감을 찾아 차량들을 확인하는 와중에, 블레어 역시 빗속으로 들어가 공터 중심의 우물로 향한다. 그곳에서 자신의 블라우스를 벗은 블레어는 이후 브래지어 후크까지 풀어헤치고 알몸이 된다. 이후 손으로 물을 퍼서 가슴을 적신 그녀는, 마커스의 존재를 느끼듯 천천히 뒤를 돌아본다. 그와 거의 동시에 마커스 역시 뒤를 돌아보고, 빗속에서 두 사람은 잠시 동안 말없이 거리를 두고 서로를 바라본다. 이후 블레어가 먼저 고개를 돌려 다시 몸을 씻기 시작하고... 마커스 역시 자신이 하던 일을 계속한다.

 

 

 

왜 삭제되었을까?


 

[포맷변환]terminator-salvation-20090515111940777.jpg

 

 

본 장면이 극장판에서 삭제된 이유를 생각해 보자. 크게 두 가지가 있을 것이다. 첫째는 바로 이야기의 흐름. 블레어가 샤워를 마친 이후 괴한 여러 명이 등장하고, 이후 마커스에 의해 한 명씩 나자빠지는 장면이 있는데 블레어의 샤워나, 마커스와 눈을 마주치는 장면이 이야기 흐름상 크게 필요하지는 않다고 제작진이 판단했을 수 있다. 둘째는 선정성, 등급 상의 이유일 것이다. <터미네이터4>는 PG-13 등급의 영화다. 기존 터미네이터 영화들은 다 R등급을 받아 오긴 했지만 대규모 스케일의 <샐베이션>은 더 많은 관객들을 끌어 모으기 위해 이런 선택을 하지 않았나 싶다.

 

물론 PG-13 영화라도 어느 정도의 폭력성이나 선정성은 포함시킬 수 있으나, 여성 캐릭터가 브래지어를 벗고 알몸이 되어 등이 적나라하게 보이는 장면은 조금 부담스럽고 불필요하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이 두 가지 이유가 가장 타당성 있고 실질적인 이유에 가까울 것이다.

 

 

 

페미니즘적 시각으로 바라보기, 장면의 명과 암


[포맷변환]psycho-spying.jpg

 

 

그래서 삭제된 샤워씬을 천천히, 여러 가지 측면에서 뜯어보도록 하자. 먼저 여성 캐릭터가 주가 되는 장면인 만큼, 페미니즘 이론을 가져와 비평을 해 보도록 하자. <터미네이터4>에서 블레어 윌리엄스는 조연 캐릭터에 지나지 않는다. 존 코너와 카일 리스, 마커스 라이트가 주가 되는 서사에서 블레어는 자신만의 서사나 순간을 가진다고 보기는 어렵다. 허나 그녀가 주가 되고,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는 장면이 단 하나 있는데 바로 이 샤워 장면이다. 샤워를 하는 그녀의 모습이 홀로 프레임에 담기고, 상대를 눈치채고 뒤를 돌아보는 것 역시 블레어다. 2분도 되지 않는 샤워씬, 1분도 되지 않는 삭제씬을 단편 영화로만 본다면 블레어가 주인공인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삭제장면은 다른 장면들과는 조금 다르게 다가온다.

 

하지만 그런 그녀를 담는 카메라의 시선은 '메일 게이즈'의 그것을 대변하는 듯하다. 한 마디로 영화와 같은 영상 매체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취급하고 상품화하는 시선 말이다. 비록 이 샤워 씬보다 더 노골적으로, 여성 캐릭터의 몸을 훑고 클로즈업하는 장면들은 더 찾아볼 수 있다. 와이드 숏, 미디엄 숏, 미디엄 클로즈업을 번갈아 사용하는 이 장면은 상대적으로 대상화의 정도가 약한 것으로 다가올 수 있다. 허나 속옷까지 벗고 몸을 씻는 블레어의 모습에서 대상화의 시선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하기에는 어렵다. 특히 블레어가 뒤를 돌아본 이후, 마커스가 뒤를 돌아보면서 카메라의 초점이 바뀌어 상의를 탈의한 블레어를 보여주는 장면은 메일 게이즈를 확실히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분위기와 인물 - 이 장면이 좋은 장면이자 필요한 장면인 이유


[포맷변환]다운로드 (3).jpg

 

 

그렇게 단순히 브래지어를 벗고 몸을 씻는 것만 보여줬다면 이 장면은 메일 게이즈에 범벅이 된, 여성의 몸을 대상화하고 감상하는 장면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이 장면은 그것이 다가 아니아. 여기서 멈추지 말고 살펴봐야 할 중요한 요소가 몇 가지 더 있다. 그중 첫째는 바로 분위기다. 이미 언급했듯이 삭제장면에서는 대사가 전혀 없다. 장면의 등장인물 둘이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의 일을 하다가, 역시 말없이 상대방을 바라보는 장면이기에 관객의 귀를 채우는 것은 쏟아지는 빗소리뿐이다.

 

물방울의 소리인지, 속옷의 끈과 후크가 풀리는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미묘한 작은 소리들도 들린다. 이런 상황 속에서, 장면은 자연스럽게 ASMR과도 같은 효과를 내게 된다. 과격한 액션이나 폭발도 아닌, 지루한 대화도 아닌, 쏟아지는 비 한가운데서 등장인물들과 함께 빗소리와 분위기를 관객은 함께 즐기게 된다. 이런 액션 블록버스터 영화에서 중간에 잠깐 삽입된 이 장면은 관객의 긴장을 풀면서도, 안정감과 몰입감을 강화시킨다. 보고 나면 액션 씬보다 더 기억에 남을 수도 있다. 이 샤워 삭제씬이 중요한 이유는 또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 장면이 삭제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불필요한 부분을 삭제하고 흐름을 빠르게 하기 위해서라고 언급하였다. 하지만 이 장면은 그렇게 불필요한 장면은 아니다.

 

비를 맞으며 서로 눈을 맞추는 블레어와 마커스. 이 장면에서는 앞으로 점차 끈끈해질 두 인물의 관계, 그들의 로맨스를 암시하고 시작해 주는 장면이다. 이후 따라오는, 모닥불 옆에서 마커스와 블레어가 대화를 나누는 장면, 그리고 후반부 마커스의 희생 등까지 생각하면, 이 삭제씬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것만은 아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장면 자체로만 놓고 봐도 ASMR스러운 분위기뿐 아니라, 둘 사이에 흐르는 오묘하고 애틋한, 야릇한 분위기 자체가 인상적이고 돋보이는, 좋은 장면이다. 분위기도 좋고, 인물들 사이의 관계와 기류도 인상적인 장면이다.

 

 


플롯과 스토리의 차이점


[포맷변환]Writing-Aesthetic.jpg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유튜버이자 내 글에서 자주 인용하는 인물인 패트릭 윌렘스는 작년 '분위기 영화'들을 다룬 영상을 제작했다. 영상에서 마이클 만 감독의 2006년작 <마이애미 바이스>를 예시로 들며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플롯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그 사이사이의 분위기나 연출, 느낌 같은 것들도 중요하며 그런 요소들이 핵심적으로 작용하는 '분위기' 영화들이 있다고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터미네이터4>를 '분위기 영화'로 분류하지는 않겠지만, 이 글에서 다룬 삭제장면은 비슷한 맥락에서 읽어 볼 수 있을 것 같다.

 

윌렘스는 영상에서 '플롯'과 '스토리'가 다른 것임을 역시 언급했는데, 그와 비슷하게 <터미네이터4>의 샤워 장면을 플롯과 스토리 측면에서 나누어 보자. 플롯은, 단순히 영화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나열한 것이다. 장면들과 사건들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일 뿐이다. 따라서 샤워 장면의 플롯은 블레어가 브래지어를 벗어 빗물에 샤워를 하고, 마커스와 눈을 마주친다는 것이 되겠다. 스토리는 조금 다르다. 플롯과 의미가 혼용되어 사용되는 경우가 많지만, 스토리는 그보다 더 넓게 캐릭터의 서사와 변화, 영화의 주제, 창작자가 말하고 싶은 것 등을 포함한다. 즉 샤워씬의 스토리는, 블레어가 빗물 속에서 샤워를 하다가 마커스와 눈을 마주치고, 둘 사이에 오묘한 기류가 흐르며 이후 둘의 관계가 발전하고 가까워지는 계기가 된다,라고 할 수 있다.

 

 

 

마무리하며


[포맷변환]50935abc7d7388dbe2171bd5f0e589b4.jpg

 

 

윌렘스는 영상에서 현대 관객들이나 영화 팬, 영화 비평가들은 지나치게 플롯에만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 플롯 구멍들을 찾아내려 애쓰고, 시리즈의 로어나 설정들을 신경 쓰는 모습 말이다. 물론 그는 플롯이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하지는 않지만, 그는 영상미나 분위기 등 다른 중요한 영화의 요소들에도 역시 주의를 기울여야 함을 역설한다. 그런 의미에서 <샐베이션>의 삭제된 샤워씬은 많은 이야깃거리가 있는 장면이다.

 

불필요하고 늘어지는 장면 같으면서도, 블록버스터 영화 속에서 독특하고 안정되는 분위기를 제공하고, 차후 인물들의 관계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장면이다. 기능적인 이유들 외에도, 장면 자체가 좋고 느낌이 독특한 장면이다. 영화에서는 (뿐만 아니라 예술 자체는) 논리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느끼는 감정이다. 이것이 필요하냐 아니냐도 중요하지만, 궁극적으로 우리가 무엇을 느끼느냐가 더 중요하다. 이런 작은 삭제장면들에서도 더 많은 것들을 읽어낼 수 있다. 본 글에서 다 하지 못한, 이 삭제장면에 대해서 그리고 블레어에 대해서 할 말은 다음 글을 통해 다루어 보도록 하자.

 

 

[하지석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7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