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그래도 말하는 편이 낫다 - 이상한 나라의 아빠

우리는 모두 발화가 요망하다
글 입력 2024.02.13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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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리뷰에는 공연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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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부터 지하철에서 독백하는 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대체로 판매 또는 선구나 선교를 목적으로 하며, 청자의 의중은 안중에 없이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지하철 칸칸마다 쩌렁쩌렁 뿌려 대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사람들 말이다.

 

일말의 호응도 없는 차디찬 푸른 조명의 무대에서 열정적인 독백을 뱉는 그들을 보며 발화의 정량에 대해 생각했다. 각자의 이야기는 눅진해져 엉겨 붙기 전에 저렇게라도 반드시 발화되어야 하는 속성의 것이라고. 정량을 채우지 못하고 억누른 발화는 언젠가 이런 식으로라도 새어 나온다고.

 

요즘은 분명 몸도 마음도 피곤한데 이상하게 잠이 잘 안 온다. 불면에 직빵인 녹턴을 틀어보아도 이젠 내성이 생긴 건지 효과가 별로다. 당장 그제는 천장을 보고 누우니 배기는 어깨와 등이, 옆을 보고 누우니 짓눌리는 팔이 거슬렸다.

 

한참 자세를 고치며 뒤척거리다 자정이 지난 시간, 긴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라도 생각난 사람처럼 이불을 걷어차고 책상 쪽으로 팔을 뻗어 휴대폰 음성 녹음을 켰다. 그리고는 불도 켜지 않은 채 규칙 없는 말들을 토하기 시작했다. 몇 주 전부터 가슴 께를 막고 있던 소화되지 못한 상념과 그로 인한 체기. 영 몰랐던 건 아니다.

 

나는 토사물을 조금이라도 남기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신물이 올라올 때까지 목젖을 손가락으로 푹푹 찔러대며 말들을 쏟아냈다. 저장되지도 못하고 삭제된 그 발화의 청자는 나뿐이었지만 상관없었다. 부동의 목적은 오직 거칠게 헝클어져 구분할 수 없는 감정들의 추방이었다. 나는, 그들은, 그러니까 우리는 모두 발화가 요망한 것이다.

 

공연 <이상한 나라의 아빠>에도 이야기를 발화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이들이 등장한다. 아빠 병삼과 딸 주영이다.

 

동화 작가를 꿈꾸며 편의점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버는 딸 주영. 그녀는 어릴 적 감명 깊게 읽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같은 동화를 쓰고 싶어 한다. 하지만 세상은 주영의 이야기에 시큰둥하다. 진행될 것 같았던 프로젝트는 코앞에서 엎어지고 후배는 주영보다 먼저 작가로 등단한다.

 

가로막힌 여러 현실에도 굴하지 않고 글 쓰는 일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던 주영은 설상가상 오랜 시간 연을 끊고 지냈던 아빠 병삼이 아프다는 소식을 듣는다.

 

당장 서울에서 해야 하는 일들을 어쩔 수 없이 제쳐두고 아빠를 간병하러 고향 부산에 내려가는 주영. 그녀에게 이 모든 상황은 번거롭기만 하다. 아마 가장으로서 역할을 다 하지 못한 아빠에 대한 원망이 깔끔하게 해소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가족이 뭔데 항상 내 발목을 잡아.

전부 지나갈거야. 금방 다시 돌아갈거야.

 

- 극중 주영

 

 

아빠 병삼과 딸 주영은 서먹한 재회를 한다. 고지식하고 꽉 막힌 병삼은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다. 번번이 무너지는 꿈 앞에서 아등바등하는 딸을 응원하지는 못할망정 동화 작가의 꿈을 나무라기만 하는 그. 주영은 아빠와 자신은 맞지 않는다며 함께하는 시간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무료 간병을 알아본다.

 

한편, 병삼은 뇌로 암이 전이되어 나타나는 증상, 섬망으로 스스로를 19살로 착각하며 주영을 알아보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다. 그렇게 주영은 자신의 인생에 갑자기 들이닥친 젊은 날의 병삼과 만나게 된다.

 

 

아빤 누구야. 알고 있는 줄 알았어.

 

- 극중 주영

 

 

알고 보니 시를 좋아했던 19살의 병삼. 주영은 자신과는 딴판이라고 여겨왔던 아빠와의 공통점을 발견하며 굳게 닫았던 마음을 차츰 연다.

 

 

웃기에는 좀 아프고 울기에는 좀 아까워.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이상하고 아름다운 시간.

 

- 극중 주영

 

 

폐쇄적인 병원의 공간적 특성 그리고 다가온 죽음이라는 시간의 재촉으로 허심탄회하게 각자의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게 된 부녀. 그간 주고받았던 상처는 잠시 뒤로 한 채, 둘은 즐거우면서도 아픈 시간 속에서 이전보다 가까워진다.

 

사실 죽음 앞에서 부랴부랴 애틋해지는 서사엔 감흥이 없다. 사랑하는 이들의 소중함을 뒤늦게 깨닫는 부녀의 모습이 내겐 한탄스럽기만 했고, 그래서였는지 고된 역사를 가진 병삼과 그런 아빠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고 미워했던 주영의 새로운 관계 국면에는 큰 방점을 찍지 않았다.

 

다만 그럼에도 눈물이 났던 건 주영과 병삼이 대사와 선율 그리고 노랫말로 감정을 토하는 행위 자체에서 카타르시스를 느꼈기 때문이다. 응고된 감정 뭉치를 낱낱이 쪼개어 다양한 언어로 게워내는 주인공들의 모습을 보며, 화자인 그들뿐 아니라 나를 포함한 관객 모두가 그간 눌러온 좌절과 무력함, 미움과 죄책감 등의 감정을 마주하고 정성을 다해 애도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을 거라 예상한다.

 

 

우연히 작은 섬에서, 뜻밖의 그대를 만나기를

한번도 해본 적 없는 노래, 그대와 조용히 흥얼거리며

한번도 가본 적 없는 곳으로, 그대와 단둘이 떠나

 

- 극중 병삼

 

 

19살로 돌아간 병삼은 주영에게 계속 여행을 가자고 하지만 끝내 여행을 가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다. 극은 서울로 돌아가 자기가 쓰고 싶은 동화를 구상하는 주영을 비추며 막을 내린다.


뱉는 행위는 이야기를 하는 화자인 동시에 그것을 가장 애잔하고 기특하게 들어주는 청자가 될 기회를 우리에게 제공한다. 나보다 내 이야기를 잘 들어줄 이 없다. 단순히 말하는 것만으로 흘려보내듯 자연스레 딱한 과거를 배웅할 수 있다는 걸 해본 이들은 안다. 그러니 결론이 없어도, 성과가 없어도, 들어주는 이 없어도 삼키지 않고 말하는 편이 낫다. 


주영은 성공적으로 등단할 수 있었을까? 그녀의 동화를 과연 세상이 반겼을까? 만약 그렇지 못했더라도 자신을 위해 어디에선가 꿋꿋이 써 내려갈 주영을 난 상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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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기선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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