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그러다가, 죽어버리고자 한다

죽음이 축복으로 느껴지기 시작한때
글 입력 2024.01.31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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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기꺼워지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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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당연하게도 죽음이 두려웠다. 죽음 이후를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죽는 순간 겪는 고통은 그 어떤 고통보다 크다는 이야기를 초등학교 때 들었다. 공부를 열심히 해도, 기쁜 일이 있거나, 슬픈 일이 있어도 항상 허무함이 들었다. ‘어차피 죽을 텐데’. 죽음을 진지하게 마주 보게되고 처음 갖게 된 감정은 허무함이었다. 모든 게, 심지어 나뿐만이 아니라 외부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까지도 허무해 보였다.

 

마냥 허무함과 두려움만을 품고 살기에 생각보다 시간은 길많았다. 또 그 긴 시간 동안 허무함과 두려움을 파고들기엔 그렇게 집요한 성격도 아니었다. 나는 인간이, 그러니까 내가 죽는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죽는다는 것은 변함없지만 어떻게 살 것인가는 내가 결정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등학교 때였다. 똑똑하고 죽이 잘 맞는 친구와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참 많이 이야기했다. 어차피 끝에 죽음이 기다리고 있으니 그 과정에 있어 우리는 최대한 즐겁게 살기로 했다. 서로 방식은 다를 수 있겠지만 자기 자신이 원하는 걸 해야만 한다고 결론을 냈다. 그때부터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참 많이 고민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한다는 것‘이다. 이건 참 곤란한 일이다. 무얼 원하냐고 타인에게 물어볼 수는 있겠다. ’나는 너가 무엇을 원하는지 묻는다’라고 말이다. 이건 자연스럽다. 하지만 ‘나는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고민한다’라는 문장은 이상하다. 원하는 주체가 나인데 무엇인지 묻는 주체도 나다. 궁금해하는 것도 모르는 것도 모두 나라는 것이다. 답을 알 수 있을 리가 없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내 기질과 쾌락을 좇으면 될까? 나는 그런 부분에 있어서 탁월하게 잘 알고 있다. 내 몸은 술, 담배, 섹스를 원한다. 게임과 맛있는 것, 특히 자극적인 것을 좋아한다. 늘어지게 자는 것을 좋아하고, 밤을 새워 낮과 밤이 뒤바뀌고 그 상태에서 또 밤과 낮이 뒤바뀔 때가 되어 느끼는 성취감을 좋아한다. 사실 인간의 몸은 고만고만해서 대체로 이런 걸 좋아할 테지만. 하지만 이런 1차원적인 결론이 정답은 아니라는 사실을 확정 짓는 데는 채 하루가 걸리지 않았다. 대안이 될 만한 다른 답이 없어도 말이다.

 

 

 

'나는 -을 의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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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에 와서야 명확히 말할 수 있다. 질문이 잘못됐다고.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가? 라는 질문 자체가 말이다. 딱 원하기까지만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래야만 한다. ‘나는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고민한다’에서 단 하나의 주체만을 남겨야 한다. 그리고 의문이나 물음도 버려야 한다. 그저 ’나는 -을 원한다‘아니면 ’나는 -을 의지한다‘ 혹은 ’나는 –을 하고자 한다‘ 와 같이 온전히 주체의 바람으로 완결되어야 한다.

 

어려서 배부른 돼지와 배고픈 소크라테스라는 비유를 처음 들었을 때 나는 당연히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좋은거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애초에 배부른 돼지를 비판하기 위한 말이기도 하고 돼지와 소크라테스를 선택의 대상으로 놓는 게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배부른 돼지를 선택하겠다는 사람이 많았다. 심지어 더 많았다. 나는 한 번도 배부른 돼지가 낫겠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아쉽게도 배부른 돼지가 되기 싫다는 마음이 나를 소크라테스로 만들어주지는 않지만 말이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나에게 죽음이 없을 수 있다면 반드시 배부른 돼지를 선택하게 될 것이다. 내가 만약 영원히 살 수 있다면 죽는게 너무 아까울 것이기 때문이다. 귀한 나의몸, 삶으로 붙잡아 두고있는 모든 것들이 무엇보다 중요해질 것이다. 지금의 나는 당장 내일 사고로 죽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두려워 밖을 못 나가지는 않는다. 하지만 만약 ’인간은 죽는다‘는 명제가 참이 아닌 세상이라면 나는 사고 날게 두려워 밖에 나가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배고픔과 괴로움, 생존의 위협이 내 모든 것을 잠식할 것이다. 그곳에서 나는 절대 배고픈 소크라테스를 선택할 수 없다. 그러기엔 삶이 너무 귀하니까. 또한 영원히 살 수 있는 세계에서는 모든것들이 곱절로 괴로워진다. 나의 기질적인 조금의 흠조차 영원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곳에서라면 나는 영원히 멍청하고 영원히 이 빠진 컵일 것이다. 상상만 해도 괴롭다. 하지만 다행히 나는 죽는다. 그래서 문제가 없다. 괜찮다. 그래도 된다.

 

나는 그저 할 수 있는 것, 하고자 하는 것을 하다가 죽으면 된다. 그러니까, 나는 그게 뭐든, 언제까지고, 하고자 하는 것을 하다가, 죽어버리고자 한다. 나는 비로소 죽음이 축복이라는 말을 이해한다. 나에게 죽음을 피할 가능성이 일말이라도 있으면 더 이상 주체로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영원한 삶에서 몰입할 일을 죽음 있는 삶에서 몰입하는건 바보다. 반대로 이 삶에서 그런 것들을 돌보지 않아 죽어버린다면 너무나도 기쁠것이다. 영원히 산다면 배부른 돼지가 될 테지만 언제든 죽을 수 있는 인간이기에 곧 죽을 소크라테스를 고를 수 있다.

 

 

[김윤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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