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나는 새해 첫날이 싫다

글 입력 2024.01.20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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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마지막 날의 밤이 저물고 2024년 1월 1일 새해가 밝았다.

 

작년 연말에도 큰 감흥 없이 지냈지만 올해 첫날은 더 마음이 뒤숭숭했다.

 

원래 특정 기념일을 잘 챙기지 않고 날짜나 시간에 의미 부여를 하지 않는 성향이다. 매년 새해를 대하는 나의 온도와 세상의 온도가 너무 극명하게 다르다는 걸 느낄 때마다 참 당혹스러웠다. 연초는 기분 좋은 설렘보다는 괜한 우울에 잠겨 보냈던 기억이 난다.

 

그래도 올해는 좀 심하다. 이렇게 우울한 새해 첫날이 있었나 싶다.

 

‘새해 다짐’, ‘새해 버킷리스트’, ‘새해 투두리스트’를 외치는 분위기가 나를 지치게 했다. 나는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모두가 저만치 앞서나가 있는 기분에 조바심이 나는 걸까. 아니, 나는 그냥 무기력했다. 새해 다짐이나 계획 같은 건 전혀 하고 싶지 않았다.

 

1월 1일이 뭐라고. 어차피 다짐은 1년 365일 중 언제든 할 수 있는 것인데. 괜히 심술 내는 나 스스로가 또 못나 보였다.

 

오후가 되도록 집에 있다 보니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생각이 길어지면 어김없이 부정적인 소리만 들린다.


‘새해 첫날’의 힘을 빌려 삶을 회고하고 재정비하는 시간을 갖는 건 좋은 건데. 그런 건설적이고 진취적인 삶을 따라 하지 못하는 게으른 너 자신을 보호하고 싶어서 괜히 방어기제가 발동한 거 아니야? 그냥 자격지심 아니냐고. 새해 첫날의 힘도 믿지 않는 너는 그러면 어떤 한 해를 보낼 건지 생각 안 해 볼 거야? 이대로 어물쩍 2024년을 맞이해도 괜찮겠어? 

 

안 되겠다. 나가야겠다. 

 

이대로 있다가는 괜히 불길하게 한 해를 시작할 것 같아서 옷을 챙겨 입고 나왔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불안하고 뒤숭숭한 첫날을 보낼 순 없지. 아이패드와 책 한 권을 챙겼다. 할 일은 많았다.

 

자주 가지 못했지만 좋아하는 동네 카페로 향했다. 경제 스터디를 시작하면서 소비를 줄이고 지출을 관리하다 보니 전보다 카페를 자주 가지 않게 되었다. 가더라도 타협해서 저가 카페를 가거나 쿠폰을 쓸 수 있는 카페를 가곤 했다. 나도 ‘새해 첫날’의 힘을 빌려 특별히 나 자신을 위해 오랜만에 비싸고 좋은 커피를 마시기로 했다. 새해 첫날의 힘은 이럴 때나 쓰는 거지. 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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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품이 풍성 가득 올라간 시나몬 카푸치노를 주문하고 앉았다. 경제 스터디, 글 쓰기, 책 읽기… 이것저것 하려고 가져왔지만 어느 것에도 쉽게 집중할 수가 없었다. 2024년은 시작부터 왜 이렇게 버거운 걸까.

 

작년에 큰 결심을 해냈다. 미루고 미루던 퇴사를 했고 ‘갭이어’라는 허울 좋은 이름을 내세워서 이것저것 해보고 있다. 2023년의 절반가량을 백수 상태로 보냈지만 아직 이렇다 할 수입원을 찾지는 못했다. 내 불안과 우울의 근원에는 그런 것들이 있다. 언제까지 시도만 하며 살 수 있을까. 나의 갭이어 기간은 진정 의미 있게 보내지고 있나. 돈은 어떻게 벌면 좋을까. 

 

나도 결국 새해 첫날이랍시고 한 해를 회고하고 앉아있다. 피식 웃음이 났다. 1월 1일이란 날짜가 주는 기운은 생각보다 강했나 보다. 

 

연초에 계획을 세우는 일을 옛날엔 했었던 것 같다. 가족끼리 모여 앉아 지난 해를 회고하고 이번 해의 목표를 다짐하는 시간을 가졌다. 엄마가 반강제로 시킨 일이긴 했지만 그렇게 하면 적어도 잔뜩 들떠있는 세계의 온도에 맞춰가는 느낌은 있었다. 

 

하지만 올해는 끝끝내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평소처럼 적당히 경제 공부를 하고, 책을 조금 읽고, 글을 썼다. 나의 새해 첫날은 그게 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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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때 웨이크보드를 탄 적이 있다. 웨이크보드를 잘 타려면 파도를 이기고 헤쳐나가야 할 때도 있지만 파도에 내 몸을 맡기고 잠자코 따라가야 할 때도 있다. 그 타이밍을 아는 것이 핵심이다. 

 

말하자면 나는 지금 파도에 내 몸을 맡기는 타이밍에 있는 것 같다. 일단 흘러가는 대로 따라가 본다. 물의 흐름이 나를 데려다주는 곳으로. 

 

어쨌든 무언가 계속 하고는 있다. 정확히 어딜 향하고 있는지,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아직 잘 모르겠지만. 

 

언젠가 내 힘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 같을 때가 오면 그때 헤쳐 나가도 괜찮아. 가라앉아 있는 것만 아니라면, 어딘가를 향하고만 있다면 괜찮아. 

 

새해 첫날 남들처럼 계획을 세우지 못하고 지나가버린 사람이 있다면 그렇게 말해주고 싶다. 

 

 

[황연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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