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작지만 큰 것들 [공연]

글 입력 2024.01.07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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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의 무의식에는 검은 캔버스가 있다. 검은 잉크로 마구 칠해져 더이상 아무 색도 덧칠할 수 없는, 끝나버린 캔버스. 헨리는 그렇게 스스로를 본다.

 

웨스트엔드 뮤지컬 ‘The Little Big Things’는 헨리 프레이저?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헨리는 17살에 다이빙 사고로 어깨 아래의 몸이 마비되지만 절망하고 무너지기보다 결국 장애를 극복하고 그림을 그리는 화가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The Little Big Things는 헨리의 극복 과정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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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처음부터 희망적인 미래를 기대하지는 않았다. 무의식에서 보는 검은 캔버스는 헨리의 심정을 대변한다. 어린 나이에 미래를 잃은 암울하고, 상실감에 빠진 헨리에게 내일을 기대하기란 쉽지 않았다.

 

하지만 가족과 친구들의 작은 선의 하나하나에 헨리는 점차 그 아래에 섞인 색을 발견한다. 편지 한 장에, 내민 손바닥에, 주방으로 내려온 발걸음에, 따뜻한 포옹에 병원에서 벗어나 나무의 초록을 발견하고 하트의 핑크를 찾고 햇살의 노랑을 맞는다. 그럴수록 사고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어했던 과거의 헨리는 자신의 현실을 하나씩 받아들이기 시작하고 ‘어떻게 돌아갈지’보다 ‘지금 무엇을 할 수 있을지’를 고민한다.

 

끝내 과거의 자신과 작별하고 화가로서의 도전에 뛰어든 헨리는 검은 캔버스를 다시 본다. 검은 잉크는 영원한 끝이나 버려야 하는 것 따위가 아닌, 그저 모든 색의 집합일 뿐이다. 거창한 의미 같은 건 자신이 부여하는 것일 뿐, 그것에 얽매여 좌절할 필요 없다.

 

장애도 마찬가지다. 몸이 불편한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 장애가 한 사람의 가능성을 막는 장벽이 되거나, 그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The Little Big Things는 그런 세상의 가능성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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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 중에는 총 세 명의 장애를 가진 배우들이 등장한다. 총 열댓 명의 배우가 참여하는 공연의 규모를 생각하면 상당히 높은 비율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나는 그들에게서 지금껏 관람한 그 어떤 뮤지컬과 비교할 수 없는 생동감과 활력을 보았다. 쪽 팔을 절단한 배우가 모두와 어우러져 춤을 추고 휠체어를 탄 배우가 자유자재로 무대를 활보했다. 헨리 역을 맡은 배우는 휠체어에 와이어를 달고 공연장 위로 떠올라 원을 그리며 날았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활공하는 배우는 너무나 행복하고 자유로워 보였으며 지켜보는 내내 알 수 없는 벅찬 감정으로 목이 갑갑하게 아프게 했다.

 

The Little Big Things는 플롯과 대사를 넘어 그 존재 자체로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공연예술만이 줄 수 있는 압도적인 현존감으로 다른 매체는 감히 줄 수 없는 경험을 선사한다. 텍스트나 이미지로 메시지를 전달받는 것보다 실제로 현장에서 목도하는 것은 비교할 수 없는 경험이기 때문이다. 내 눈앞에 살아있는 인간에게서만 얻을 수 있는 에너지, 그들이 증명하는 가능성 같은 것들 말이다.

 

그래. 장애는 그냥 그런 것이다. 검은 캔버스가 그냥 캔버스에 불과하듯, 장애도 그것뿐이다. 터부나 욕이 아니고 절대 언급해선 안 되는 볼드모트 같은 이름도 아니다. 헨리가 입으로 붓을 물어 그림을 그렸듯, 휠체어에 와이어를 타고 날아올랐듯, 장애가 있어도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물론 아직은 현실적인 제한이 있는 것을 안다. 극 중 의사가 말했듯, 장애가 있다는 건 남들보다 더 많은 장애물을 마주해야 하는 것이다.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거나 턱이 높거나 경사로가 없으면 그들은 어느 때보다도 더 장애인이 된다. 하지만 그건 is의 문제이지 should의 문제가 아니며 예술은 무궁한 인간의 가능성이 펼쳐지는 장이 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The Little Big Things는 진정한 문화예술의 가치를 지닌 뮤지컬이라 하겠다.

 

 

[박상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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