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영화라는 자각몽, 영화 '애스터로이드 시티' [영화]

의미 따위 아리송해도 삶은 현현하게 흐른다
글 입력 2024.01.03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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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 앤더슨 감독의 <애스터로이드 시티>가 얼마 전 넷플릭스에 올라왔다. 작년 여름에 극장에서 관람했던 나는 다시 한번 재생 버튼을 눌렀다. 한번 보고는 해결되지 않았던 의문들이 아른거렸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다시 보고 싶은 영화였다. 이렇게 나의 2024년 첫 번째 영화가 된 <애스터로이드 시티>. 꾸준히 곱씹는 중이고 영화를 본 후 생각해 볼 만한 지점을 함께 나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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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지 않으면 깨어날 수 없다


 

웨스 앤더슨 감독 특유의 정교하고 인위적인 미장센은 <애스터로이드 시티>에서도 어김없이 돋보인다. 대칭과 강박은 이제 그의 영화의 불문율이 되었다. 그는 화면 속 모든 요소를 통제하고 억압한다. 부자연스러움은 그의 영화에서 아름다움으로 읽힌다.

 

카메라는 주로 수평으로 이동하고 정면을 바라본다. 수평과 정면은 일반적인 구도로 보이지만 카메라의 움직임은 주체적이다. 인물은 카메라를 이끌기보단 카메라의 지시를 받는다. 마치 카메라는 곧 감독이고 감독이 큐 싸인을 내리면 대사를 시작하듯이. 이런 부자연스러움은 영화의 몰입을 방해해 관객이 자신이 보고 있는 건 영화임을 지속적으로 상기시킨다. 스크린 속으로 표류되어 앉아있는 극장 좌석의 촉감을 잊는 일을 그는 원치 않는다. 그는 영화라는 매체를 그의 영화에서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싶어한다.

 

왜냐하면 그의 영화는 꿈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그의 이야기, 색감, 미장센은 현실보다 꿈이나 동화의 풍경에 밀접해 보인다. 그리고 꿈은 꿈으로 남을 때 존재가치를 갖는다. 현실이 아님을 인지시키기 위해 그는 부자연스러움을 택한다. 비억압적인 세상을 강조하기 위해 화면을 억압한다. 꿈을 환상으로써 명백하게 만드는 방식은 ‘애스터로이드 시티’라는 누가 봐도 비현실적인 배경에 개연성을 부여한다. 관객들은 마음 놓고 잠옷으로 갈아입는다. 하룻밤의 단잠을 만끽한다. 현실을 포기한 사람처럼 몰입해도 곧 내일 아침이 밝아올 터이니. 그렇게 깨어난 내일은 오늘과는 반드시 다를 것이다. 관객의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영화는 존재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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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임을 눈치채며 영화 보는 일


 

<애스터로이드 시티>에서는 두 가지 형식이 병치된다. 연극 창작의 전 과정을 보여주는 TV 쇼와 TV 쇼에서 창작한 연극이다. 쇼의 진행자는 친절하다. 중간중간 등장해 창작 상황을 설명해 준다. 흑백의 TV 쇼와 컬러의 연극은 순차적으로 번갈아 가며 진행된다.

 

그러니까 우리가 메인 플롯이라고 인식하는 연극 자체는 TV 쇼에서 찍은 것이다. 여기서 연극은 곧 영화이고 TV 쇼는 영화의 제작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즉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영화를 영화 제작 과정과 함께 보여주는 영화이다. 영화 속에 메이킹 필름이 함께 삽입된 셈이다. 영화는 자꾸 서사와 관객 간의 거리를 벌려 영화라는 매체 자체를 상기시킨다. 영화의 바깥에서 영화를 바라보게 한다.

 

영화는 영화임을 알고 보아도 영화일 것이다. 종종 관객은 모른 척하고 영화에 몰입하곤 한다.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게 이 세상에서 유일한 이야기라는 듯이. 그게 관객의 기본 도리라는 듯이. 영화는 본디 허구지만 그 사실이 우리를 실망시키진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믿는 대로 여길 수 있다. 다짐한 대로 속아줄 수 있다. 영화에 있어서 진실이란 무엇이고 그 진실이 주는 의미가 중요한가. 거짓임이 노골적으로 들통나더라도 무의미해지지 않는 게 영화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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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건 없이 흐르는 삶


 

<애스터로이드 시티>의 서사에는 규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유도 없다. 도시는 어떻게 생겨났고 원자폭탄은 언제 터지며 외계인은 어디서 온 건지 아무도 모른다. 아이들은 야외에서 수업하고 사막의 색감은 산뜻하며 밴드까지 등장해 음악은 연주된다. 등장인물 ‘오기 스틴벡’은 같이 살면 이제 어떻게 할지와 같은 일상적인 문제에 대해서 장인어른과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자 오기의 아들인 ‘우드로’는 말한다. “지금 그런 말 할 때예요? 이제 세상이 변했어요. 모든 게 불확실해요. 외계인이 또 올지, 오면 무슨 말을 할지, 왜 소행성을 훔친 건지, 그게 우리 것은 맞는지. 우린 아는 게 없다고요. 어쩌면 저 우주에 뭔가 우리 삶의 의미가 있을지도 몰라요. 아빤 외계인 사진도 찍었잖아요.” 그러자 오기가 말한다. “난 사진작가야.”

 

‘밋지 캠벨’ 역시 외계인 때문에 격리되어 있는 와중에도 본업인 연기 연습을 계속한다. 극 후반부에 외계인이 한 번 더 찾아와 격리 해제가 취소되자 사람들은 흥분하고 난장판을 벌인다. 그때 오기는 문을 열고 세트장 밖으로 탈출한다. 단숨에 ‘오기’에서 ‘오기’를 연기하는 배우 ‘존스’로 자아가 변한다. 화면은 흑백으로 전환된다. 그리고는 연출자를 찾아가 연극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고 의미를 알려줄 수 있냐고 묻는다. 오기는 왜 버너에 손을 데었나.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존스’는 잘하고 있는 배우이다. 다시 한번, 객관적인 의미는 중요한가.

 

마지막 에필로그, 아침에 눈을 뜨니 오기의 가족 말고는 다 사라지고 없다. 모든 사건이 한순간에 종결되고 다시 예전으로 돌아갔다. 엄마의 재는 아이들의 바람대로 이름 모를 선인장 옆에 묻었고 오기는 밋지의 주소를 받았으며 천재 소년인 우드로는 장학금을 여자 친구에게 쓴다고 한다. 마지막까지 이해 안 되는 일들 투성이다. 오기 가족은 함께 차를 타고 애스터로이드 시티를 떠난다. 과거는 정리되었고 이제 미래로 향한다. 의미가 없다면 직접 만들면 된다. 의미 따위 아리송해도 삶은 현현하게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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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충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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