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상대의 세계가 궁금해질 때

굴 국밥과 낯선 언어가 담긴 친절한 세계
글 입력 2023.12.25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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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의 세계가 궁금해질 때 연애는 시작된다. 새파랗게 추웠던 어느 겨울날 J를 처음 만났다. 우리는 성수동의 바 테이블에 나란히 앉아 백차와 보이차를 마셨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나는 속도 제한 없이 J의 세계로 달려가고 싶었다. 그가 서울에서 구천 킬로 떨어진 도시에 태어나 내 옆에서 차를 마시는 그 순간까지, 그가 살아온 모든 이야기가 궁금해서 견딜 수 없었다. 그를 울린 영화, 가까이 두는 문장, 마음을 흔든 음악, 질리지 않을 음식, 속수무책으로 슬펐던 순간, 원하고 원하지 않는 것, 기억하고 잊고 싶은 장면, 사랑하고 증오하는 것, 떠나거나 가고 싶은 도시를 묻고 싶었다. 어색한 첫 만남. 대화 사이로 자주 공백이 놓였다. 갈 곳 없는 눈이 서로 마주칠 때마다 J는 나를 보며 찡긋 웃어 보였다.

 

그해 겨울 J는 처음으로 굴 국밥을 먹어봤다. J의 나라에서는 해산물이 비싸서 자주 먹을 수 없다고 했다. 굴을 씹는 표정이 오묘해 뱉어버리지 않을까 했지만 이내 신기한 맛이라며 한 그릇을 뚝딱 비웠다. 나는 요즘 J의 모국어를 배운다. 외계어 읽듯 난생 처음 발화하는 음성. 혀는 있는 힘을 다해 당황하지만, 낯선 언어를 감각하는 일은 역시 흥미롭다. 마치 복잡한 문장 퍼즐을 푸는 것 같달까. 첫 시도는 대부분 장렬하게 실패하고 말지만 단어의 위치를 요리조리 옮기다 보면 어느새 문장이 완성되고 낯선 조합은 내 것이 된다. J는 발리로 요가 여행을 가는 나를 따라와 수풀이 우거진 요가원에서 처음으로 요가를 했다. 나는 구글어스맵으로 J가 다녔던 생경한 도시의 대학교 거리를 들여다본다. 이제 우리는 서로의 세계를 대담하게 활보한다.

 

J는 내가 아는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다. 나는 종종 J에게 다음 생에는 J로 태어나고 싶다고 말한다. 네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으로 살고, 네가 말하는 방식으로 말하고, 네가 나를 사랑하는 방법으로 너를 사랑하고 싶다고. 어제는 자식에게 어떻게 살라고 할 거냐 물었더니 1초의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남들과 달라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 것, 항상 타인에게 친절할 것." 나는 나를 지독히 싫어하는 인간이지만 J와 함께라면 그럭저럭 괜찮겠다는 착각에 빠진다. 너를 만났으니 영 수확 없는 인생은 아니었다고. 이제까지 많은 연애를 겪었지만 J의 세계는 특별히 더 탐이 난다. 욕심쟁이처럼 혼자서만 그의 세계를 마음껏 누리고 싶다. 굴 국밥과 낯선 언어가 담긴 이 친절한 세계에.

 

 

[최은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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