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낭만에 대하여 - 히든 스테이지

낭만이 무어라 생각해, 그때 파도가 치고 있었다.
글 입력 2023.12.05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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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든스테이지 웹포스터.jpg

 


오늘은 토요일. 전시, 히든 스테이지에 다녀온다. 아니, 사실 그저께 다녀왔다. 아니, 그저께 다녀오려 했다. 목요일 퇴근 후 설레는 마음으로 가닿은 예술의전당, 한가람 미술관은 차갑게 닫혀 있었다. 목요일은 날이 아주 추웠다, 이 추위를 뚫고 올만큼의 기대감, 내가 하루 종일 얼마나 고대했는데… 황망한 감상에 젖을 새도 없이 누군가 밭은 소리를 지른다. 지상 층 출입구는 다 닫혀 있었는데, 지하로부터 올라온 나를 보고 수위 아저씨가 화들짝 놀라셨다. 감상은 바스러졌고, 새카만 로비에서 손전등을 든 수위와 마주치고 있는 지금이, 어딘가 웃기다고 생각했다. 이번 전시와 무관하게 한가람 미술관은 10시부터 19시까지만 운영한다. 앞으로 참고해야지, 어디 가서 아는 척할 게 하나 늘었구나, 심심하게 생각했다.


귀로, 버스에 올라서 이런저런 생각을 해. 다른 건 모르겠고 식사가 조금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어. 이럴 거면 그냥, 간만에 집에 일찍 가서 마라샹궈나 한 그릇 시원하게 말아먹었으면 참 좋았겠는데…  평일 문화초대 일정이 있는 날에는 끼니를 가볍게 때우곤 한다. 퇴근 후에 문화초대 시간에 맞추려면 밥을 거하게 때리기에 시간이 넉넉하지 않아. 종로의 회사 근처 먹자 골목 변으로는 간단히 혼밥할 곳마저 마땅치 않아, 그래서 이럴 때면 늘 가는 곳이 있어, 내가 하나 찾아두고 요긴히 애용하고 있지. 

 

한국은행 앞 소공동 지하도, 계단 구석에 임시로 만들어 놓은 허름한 김밥집. 계단의 밑면 부 조금 비는 공간에다가 샷시로 대충 막음질 한, 어딘가 따습고 친근하며 마음 끄는 구석이 있는 곳. 테이블은 2개이다. 오늘 같은 날이면 늘 거기서 김밥에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한다. 명동 상권은 완전히 재기에 성공했더군, 외국인 관광객들이 아주 많이 지나다니고, 또 회사원들도 더러 지나다니지. 요즘에는 바로 앞 명동 신세계 백화점의 화려한 크리스마스 치장 덕에 내국인 나들이객들이 부쩍 많이 보이곤 해.


밥을 다 먹고 지하도 맞은편으로 올라오면 명동 신세계 백화점이 커다란 전광판을 환히 비추고 있지. 사람들은 건너편에서 사진을 찍는 데 여념이 없더군. 횡단보도를 기다리며, 저기 참 크고 밝구나 생각했어. 내 옆에 사진찍기에 여념이 없는 치들을 멀찌감치 바라보면서, 참, 이런 추위 속에서도 다들 해밝구나, 이렇게만 생각했어. 빼도 박도 못하게 이제는 겨울이군. 날이 부쩍 추워졌다.

 

목요일이 딱 좋은 날이었어. 왜냐면 요즘 좀 바쁘거든. 운동 갈 시간도 잘 안 나, 허구한 날 외근에 밀려드는 약속에 결혼식에 … 더구나 요즘 흥미로운 문화초대가 쏟아지는 덕에 정신없이 내달리고 있지. 주말은 다 일정으로 가득 차 있어서 못 보게 된 것들도 더러 있었다, 목요일, 그러므로 적당한 날이라고 생각하며 신청 버튼을 눌렀더랬다. 

 

다시 목요일 당일, 한가람 미술관 앞 흡연 부스, 잠시 담배를 하나 피면서 이번 문화초대를 어떻게 해야 하나 난감해했다. 한가람 미술관은 19시까지만 운영해, 칼퇴하고 내달리더라도 평일엔 관람할 수 없지. 덮친 격으로 전시는 이번 주 토요일까지군. 대표님께 문자를 했다. '이래저래 여차저차 되었습니다 ... 토요일은 관람이 가능하신가요 ... 일정을 한번 조정해볼게요.'


엄청 망설였다. 왜냐면 토요일에는 결혼식만 두 탕 뛰어야 했거든. 더구나 전날 금요일은 술 약속이야. 숙취를 안고 정장에 코트와 구두 차림으로 이른 전시회를 왔다가, 성남 찍고 미아 찍고 밤 늦게나 복귀하는 일정을, 망설임 없이 맞닥뜨릴 수는 없는 것이지. 하지만 어쨌든 잘 다녀왔고요, 덕분에 여러모로 사이드 스토리가 많이 생산되었다. 그리고 전시를 보고 리뷰를 쓰게 되는 덕에, 이런 이야기까지 다 뱉어볼 수 있게 되는 건 기쁨이다. 요즘은 글 쓰는 맛에 사는 듯해. 막 귀가를 하고 녹초가 된 심신을 안고 키보드 앞에 나앉습니다. 내일은 또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 오늘 안에 리뷰까지 해치우고 말겠다. 여느 때와 같이 서론이 길었군. 자, 이제 리뷰 시작.

  

*

  

나는 전시를 잘 가지 않는 편이지만, 문화초대 제안서는 전부 다 꼬박꼬박 챙겨 보곤 한다. 전시는 결정에까지 꽤 시간이 드는 편이야, 책이면 내 사랑이 감응하기 전에 얼른 뒤로가기를 눌러버리는 편이고, 흠흠, 차설. 히든 스테이지는 그 제목만으로는 별다른 감이 오지 않았어, 링크를 눌렀고, 나는 곧잘 사랑에 빠져버렸지. 이 그림을 한번 봐봐. 나는 대번에 몹시 그리운 냄새를 맡았다. 일정을 망설이는 순간에조차, 나는 내가 여기 오리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 

 


[드림그림x배준성 콜라보레이션]on the stage-hidden stage_some picnic, 2023, Oil on canvas, 181.8 x 227.3cm.jpg

배준성 (b.1967)

On the Stage - Hidden Stage-Some Picnic

2023

Oil on canvas

181.8 x 227.3 cm


 

어딘가 뭉클한 구석을 찔러서 일깨우는 느낌. 첫 눈으로 보았을 땐 낭만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어둠과 모노톤을 엎질러둔 가운데, 가장 낭만적인 것들만을 조망하는 이 명료함과 집중감에 단번에 매료되어버렸다. 잊고 있던 것이 깨어나기 시작해, 이럴 땐 유년 생각이 나지. 이렇게 채도와 밀도가 높은 상상이 허락되는 건 유년의 심상뿐이거든. 그 있잖아, 동화적이고 낭만적인 것들만 마구마구 모아서, 한 폭의 상상 안에 전부 다 몰아넣고서는 기뻐하는 얼굴. 현실적인 것, 그런 건 나는 모른다, 나는 아이니까. 한없이 좋고 좋은 것들만을 잔뜩 몰아넣고서는 흡족하여 기뻐하는 미소, 그런 상상과 그런 상상을 가진 자의 얼굴을 연상시키지. 그 꿈이 깨지 않기를 바래. 


허나 꿈은 깨어지는 것이지, 낭만적이기만 한 꿈들은. 예나 제나 나의 상상력은 무궁하였기에, 나는 상상을 현실화하는 아이다움에 있어서는 제일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동우야, 너도 이따금 우리를 추억할는가. 어른들이 다 빠져나가버린 너네 아버지 공장, 사무실에서 아이스 커-피라는 것을 처음으로 먹어본 기억은 잊히지가 않는다. 베어링 탄 내음과 아르곤 용접의 독한 내음이 아직 대기 중에 섞이어 남아 있는, 그 시커멓고 무뚝뚝한 공장에 즐거울 것이 무엇 있었겠니. 우리가 그때, 땅에 구르는 너트 따위를 주워들고선 무슨 상상을 했지? 대중 변신로봇에 탑승하는 상상이었겠거나, 가오가이거의 용맹함을 자신에게 투영하는 상상이었겠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에네르기파를 쏘아대는 손오공과 크리링의 역할놀이가 아니었겠느냐. 지금 어디에 있니, 너도, 그때 너와 더불던 우리 상상의 세계도. 그 모든 것은 진정, 손에 잡힐 듯이 선명하지 않았더냐. 우리에게 공간 따위는 중요치 않았다. 그런 납작한 세계, 아르곤 냄새가 흐르는 대지는, 우리가 진정으로 노니는 환상에 비하자면 느껴지지도 않을 정도로 무취할 뿐이었다. 



[크기변환]Tree Story 2.jpg

배준성 (b.1967)

On the Stage - Tree Story 2

2023

Oil on canvas

162.2 x 130.3 cm 



꿈은 슬며시 깨어지는 것이지, 낭만적이기만 한 꿈들은. 그땐 너트 하나 주워들고서도 8단 변신 합체로봇 따위를 그려낼 수 있었다. 현실성은 저리 가라지, 우리는 아이였으니까. 그리고 우리는 차차 어른이 돼, 바라지 않더라도 그런 상상은 어려운 것이 되어 있지. 기억은 언제나 상상의 질료, 내 상상의 캔버스 위로는 너무 많은 것들이 자리해 있고, 이 순간에도 계속해서 쏟아지고 있어, 어쩜 어느 것도 집중하여 바라보지 못하던 것이다.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아름다운 것들, 어쩜 모든 것들은 그런 식으로 사랑스러워지는 것이었으니까. 


그러나 나는 아직, 그것을 아주 보내버리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 이따금, 그 비슷한 것들 옷깃만 스쳐도 내가 이렇게, 단숨 단걸음에 돌아오는 것이 아니었겠니. 나도 어른이 다 되었다. 상상은 아직도 줄창 내 안을 흐르고 있으나, 대신하여 나는 그 안에 현실적인 것들을 마구마구 집어넣고 있었다. 내가 그리 한 건 아니야. 그저, 그렇게 되어 있을 뿐. 아, 낭만적인 꿈과 상상, 그 낭만은 어디로 가버렸지. 우리가 그 안에 살았더랬다. 어디에 흘리듯 두고, 그저 앞으로 앞으로 밀려나듯 살아온 것이지? 언젠가 친구와 낭만에 대하여 이야기했던 기억이 떠오르는군. 그날 하필이면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 영상을 본 까닭, 친구, 낭만이 무어라 생각해, 그때 파도가 치고 있었다. 


 

[크기변환]Fall Story 2.jpg

배준성 (b.1967)

On the Stage - Fall Story 2

2023

Oil on canvas

193.9 x 130.3 cm



낭만, 그건 무엇이길래 이리도 답답하고 감미롭게, 가슴 옥죄는 가운데의 황홀한 예감만으로 나를 간절히 간지럽히나. 답해줘, 너는 낭만을 그리워하지 않느냐, 이리 가슴 타게 애닳지 않으냐. 낭만이 무엇이지, 무어길래 이렇게 까마득히 그리웁더냐 말이야, 어디에 잃어버린 지도 다 모를 갑갑함만을 남기고서. 친구는 잃어버린 것이라 하였다. 무엇을? 기대감을. 아니, 아직도 나는, 내 안에는 인생에 대하여 거는 기대들로 가득하다. 무엇을? 막연한 기대감을. 아니, 아직도 나는 나의 인생에 오지 않은 것들을 대하여 그저 고대하고 기다리며 살아가고 있다, 어쩜 그것으로, 그것만으로 살아가고 있다! 무엇을! 번쩍이고 눈부시며, 아름답고 황홀한 것에 대한 오로지 기대감을! 오지 않으리라, 닿지 않으리라는 일체 걱정 따위 없어, 이미 여기에 있고 있었으며 가득 차 있노라고 감각하는 사람의 환상을. 우린 이제, 기대치 않은 방식으로만이 그것을 느낄 수 있어... 오지 않은 것들이, 너무 많았어... 


그리하여 또한, 새로와 신비롭고 낯선 세계와 그 안으로 전율하듯 접어드는 모험의 감각, 늦잠을 깨우고 동맥을 틔우는 환희감마저... 우린 이제, 기대치 않은 방식으로만이 그것을 느낄 수 있어, 이미 다른 모습으로 와버린 것이, 너무 많았어... 너무도 많은 것들은 익숙해졌고, 기대와 다른 방식으로 굳어져 익숙해졌고, 훤히 들여다보이는 듯이 예견되지. 이미 익숙히 여기는 것들이 우리의 기억을 가득 채워 흩트리고 있어. 그때 절묘한 파도가 치올랐다. 


그래도 나는 아직 그때 그 시절을 아주 잊어버린 것은 아니, 보낸 것은 더욱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아직도 그것을 찾고 있으니. 그러니 이따금, 그 비슷한 것들 옷깃만 스쳐도 내가 이렇게, 단숨에 돌아오는 것이 아니었겠니. 나도 어른이 다 되었다. 기대하지 못하는 것들이 더욱 많고, 기억하는 것들이 너무 많아. 만물은 그 모습이 아닌 기억으로 내게 닿는다, 패턴화되어 내게 닿고 있었다. 내 이성의 저울 위에 닿기도 전에, 모든 것들은 이미 예상되는 결과의 표찰을 옷꼬리에 달고서 내 눈앞에 내리 앉는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효율적이고 신속하게 분류 처리해버리지. 내가 그것을 뜯어볼 겨를 따위는 나로부터 없었던 것이다. 

 


[드림그림x배준성 콜라보레이션]on the stage-hiddn stage_playing in some town, 2023, Oil on canvas, 162.2 x 130.3cm.jpg

배준성 (b.1967)

On the Stage - Hidden Stage-Play in Some Town

2023

Oil on canvas

162.2 x 130.3 cm



애초에 그림은 내게 묻고 있었다. 네가 익히 아노라 여기는 것을, 내 대신하여 가려주면 어떻겠느냐고. 그것이 내 묘연한 그리움이 숨은 곳이냐, 나는 반문하듯이, 심상 속에서 저 그림 위의 어둠을 지워보았다. 아무것도 어둠 속에 가려지지 않아, 만사 모든 것이 선명하게 되어버린 세계. 그곳엔 우리의 지루한 일상만이 남겨져 있었다. 너무 많은 것들이 동시에 다가와, 그 어떤 것에도 어여쁜 조명과 관심 어린 집중이 기울어지지 않는, 대낮의 세상. 

 

너무 자주 보아, 아무런 새로움도 없이 쨍하니 드러나 버린 세상. 가리운 어둠을 치워버리자 지금 작고 선명하여 아름다워 보이는 것들은 빛과 사물 속으로 녹아들어 지워져 버렸다. 반대로 모조리 어둠 속에 가라앉혀도 보았다. 만사 푸른 어둠 속에 가리어버린 상상. 그러자 정물은 새벽 3시 완전한 잠에 빠져들어, 집중을 기하고 끌 만한 무엇도 없는 고요한 적막이 되어버렸다. 


그래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보고 기억하느라 어떤 것에도 새롭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어쩜 집중치 못했고, 들여다보지 못했고, 기대치 못 했던 것이다. 슬며시 그림에서 눈을 떼, 나의 세계를 둘러보았다. 1인칭의 낮은 시야를 따라, 내 낮은 키를 따라 납작하게 엎진 지루한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익숙한 낯익은 세상. 곁눈으로도 그것을 모조리 그려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곁눈으로도, 곁눈으로도. 


새하얀 전시관, 인적은 하나 없었고 스태프만이 홀로, 자리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는 낯설게, 그립게 바라보고 싶어지다, 동시에 나의 심상은 저기 멀리 높이서 내려다보는 관점으로 나와 이 적막한 전시관과 이른 토요일 오전, 무료함을 달래고 있는 스태프와 액자들을 그려내기 시작했다. 배준성의 화풍을 따라,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라이트 오프, 조명을 낮추었다. 졸고 있는 스태프가 다정한 어둠의 배려 아래 슬며시 배경 속으로 녹아들었다. 색전환, 배경을 가리고 덮는 어둠에는 은근하고 미스틱한 바이올렛 칠을 해주는 것이 좋겠군. 그리고 스포트라이트, 전시관 가운데 있는 내게로 빛이 비추인다. 그 안의 담긴 나는 어딘가 뭉클함으로, 내게로 찬찬히 스미듯 다가왔다. 

 

**


나는 더 바라보고 싶어, 요 며칠 나의 시선을 되짚어보았다. 광막한 전시관 로비의 칠흑 같은 어둠, 계단 유도등 아래 서서 당황한 나와 손전등을 든 수위 아저씨의 광경이 배준성의 화풍을 따라 상상 속에 인화된다. 커다란 오페라 하우스의 바로 옆에 따개비처럼 붙어 있는, 조그마한 흡연 부스에서 혼자 담배를 피우며 골몰하던 나의 모습 또한 제3의 시선으로 포착된다. 새카만 밤의 가운데, 서초대로를 관통하는 파란 버스 안, 마라샹궈 생각을 하며 창틀에 턱을 괴고 있는 나의 모습이 위에서 비스듬히 내려다보는 듯이 구성된다. 나의 상상은 기억 속 밤의 모노톤 위에다가 가느다란 빛을 비추기 시작했다. 


또 무엇이 있었지, 계단 밑에 웅크려 김이 서린 차창을 앞에 두고 김밥을 먹고 있는 내 모습이 잇따라 보인다. 나는 눈을 감고도 커다랗게 볼 수 있다. 내 상상력은 무궁하였으니, 내가 아직 잃어버리지 않고 더욱 고이 다듬어내는 것은 이것이더냐. 무심히 김밥을 써는 아낙과 외국인 관광객들의 웃는 얼굴과 오래된 텔레비전의 액정 속 6시 뉴스 앵커의 얼굴이 다정한 어둠과 정적 속에 가리워지니, 내 얼굴만이 선명해진다. 그때 나는 무슨 하릴없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 어딘가 쓸쓸하나, 한없이 따사로운 광경. 또, 또, 더 보여줘, 더 보고 싶다, 구름처럼 뭉개 치는 입김에 분연한 설렘과 신세계 백화점의 커다란 전광판과 빼곡한 알 전구와, 횡단보도와 신호등, 트래픽 잼과 경적 소리와 ... 사람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멍하니 구경하는 내 모습이 그려지누나. 어딘가 적요하나, 그런대로 애틋한 광경.


그리움에 탐닉하는 듯이, 나는 리뷰를 쓰며 기억과 상상의 만화경을 좌우로 돌려댄다. 은근한 어둠이 깔린 웨딩홀, 버진로드를 걷는 신혼부부와 좌측 구석에서 박수를 치는 나의 오늘에마저 스포트라이트가 비추인다. 오늘 두 쌍의 신혼부부가 탄생했구나. 식장의 불빛은 그대들만을 비추고 있었으나, 내 기억 속에서는 그들에 하염없으며 해맑은 박수를 건네는 내게도 원형의 불빛이 비추는 것만 같아. 부부는 손을 꼭 잡고, 식장 입구를 향하여 손짓하며 걸어나가는 때, 천정으로부터 꽃잎은 나리누나. 꽃잎과 나란한 사선 위로는 비스듬한 각도의 빛이 두 쌍의 부부와 그들의 앞날을 비추고, 그런 그들을 축복하는 내게도 공평히 비추인다. 


어둠과 스포트라이트. 극적 대비의 구성 아래에서, 이 사소하고 개인적인 순간들이 조금 더 낭만적으로 채색되는 듯한 기쁨을 찾는다. 무료하고 어딘가 단조로우며 적요한, 어디 가 말해보기엔 새로울 것 하나 없는, 나의 사소한 하루, 모노톤의 일상에 부러 불빛을 끌어대었다. 

 

나를 사랑하는 신이 있다면, 나의 수호천사, 혹은 나의 할아버지, 그 눈에 비칠 나와 나의 세계가 이런 모습이리라는 생각에 미친다. 그건 어딘가 가슴 뻐근하도록 아련하게 다가왔다. 어둠을 반쯤 가리놓은 세계, 대낮에 가려진 곳, 히든 스테이지, 이제야 나는 작가를 이해하겠다. 그대가 잊어버린 것들을 되찾기 위하여 택한 것은 새로움이 아니라 가림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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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관을 나서고, 성남의 웨딩홀로 가는 길. 날은 우중충했고, 이제 다 떨어질 일만을 기다리는 퇴색한 이파리들을 다시 보았다. 겨울세상이 이처럼 칙칙한 모노톤이었다는 사실이, 색채의 대비감이 너무 깊이 와 닿았다. 몹시 쓸쓸하기 싫어서, 그런 건 지겹고 지겨워서 오늘 밤이 이 거리를 가리고, 뽀얀 전조등 아래에서 다시 수줍어 보일 그 이파리들을 대신으로 상상했다. 

 

그러자 이내 거리는 조용한 밤의 비밀과 가로등의 축복을 기다리는 것들로, 조금 더 흥미진진한 것과 기대할만한 것으로 달리 들었다. 나는 잠시 낭만에 대하여 곱씹는다, 낭만은 객체가 아닌 오직 느끼는 주체를 위함. 나는 이 무료하고 사소한 것들이, 조금 더 낭만적으로 채색되는 듯한 기쁨을 누리며, 멀고 긴 하루에 올랐다. 


 

 

아트인사이트 컬처리스트 태그.jpg

 

 

[서상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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