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가녀장의 시대 [도서/문학]

가녀장에 가려진 그녀
글 입력 2023.11.09 1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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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만 보고서는 감을 잡기 어려웠다. ‘가녀장’은 숨어있는 순우리말인가.

 

“아비 부父의 자리에 계집 녀女를 적자 흥미로운 질서들이 생겨났습니다. 이 질서를 겪어볼 기회를 소설에게 주고 싶었어요. (...) 작은 책 한 권이 가부장제의 대안이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저 무수한 저항 중 하나의 사례가 되면 좋겠습니다.” (작가의 말 中)

 

아하, 이런 뜻이 있었구나. 박진솔 에디터의 후기처럼 “기존의 체제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상처받지 않도록 어루만지며 변화를 선도하는 일. 그 여정에 있는 우리에게 소설 <가녀장의 시대>는 새로운 시도가 될” 수도 있겠구나. 그러나 나를 포함하여 많은 이들이 이슬아 작가와 이 작품이 주는 시사점에 집중할 때에, 다른 한 인물이 눈에 아른거렸다.

 

장. 복. 희. 그녀는 작가의 어머니이다. 소설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내가 울고 웃으며 끝까지 읽을 수 있었던 이유는 복희님 때문. 그녀가 내뱉는 말과 행동은 평이하고 때로는 모자란 듯 느껴질 수 있지만 여기 그 어떤 등장인물보다도 그녀는 지혜롭다.

 

“남이 훼손할 수 었는 기쁨과 자유가 자신에게 있음을 복희는 안다.” (p.142): 복희는 힘이 있으나 가모장이 되길 기대하지 않는다. 자신이 노동한 만큼의 대가만 잘 받는다면 누가 이 집안의 가장이 되어 잘난 척을 하든 그녀에게는 중요하지 않다. 자신의 중심이 오롯이 섰을 때에만 나올 수 있는 이 초연함. 내가 생각하는 ‘가진 자’의 여유.

 

“복희는 웬만해선 인스턴트식품을 먹지 않는다. 직접 차려먹은 집밥만이 제대로 된 삶을 살게 한다고 믿는다.” (p.221): 과거의 나는 집밥의 중요성을 모르고 각종 인스턴트식품을 의지하곤 했다. 집밥은 무료하고 언제든 먹을 수 있는 널리고 널린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현재의 나는 안다. 너무나 일상적인 특별할 것 하나 없는 한 그릇이 쌓여서 한 사람의 일상을 지탱한다는 것을. 이 문장을 읽고서 나는 다시 쌀을 씻기 시작했다.

 

“확실한 건 복희가 사십 년째 해온 일이 그와 비슷한 노동이라는 것이다.” (p.228): 쌀알 한 톨은 노동이다. 커피 한 모금은 노동이다. 소설 한 장은 노동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의 ‘노동’을 우리는 기억하지 못하고 있나. 기억하려는 노력/시도를 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나.

 

“그는(복희는) 기쁨과 슬픔이 마치 반죽처럼 엉겨붙어 있다고 오랫동안 생각해왔다.” (p.230): 슬픔을 감추고자 주체할 수 없는 슬픔에 웃음이 터질 때도 있고, 너무나 기쁜 나머지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 것처럼.

 

“바꿀 수 없는 일에 관해서 복희는 오래 생각하지 않는 편이다.” (p.266): 얼마나 많은 세월과 한숨을 ‘바꿀 수 없는 일’에 우린 쏟고 있나 싶다. 바꿀 수 없다면, 받아들이자.

 

“슬아는 복희의 단단한 상냥함에 대해 생각한다. 그 상냥함은 살아 있는 것들을 잘 살아 있게끔 만들어왔다.” (p.306): 단단한 상냥한 사람이 될 수 있다면. 나는 그녀가 부럽다.


읽다 보면 그녀의 각 장면을 따라 나의 행간을 채우게 된다. 복희님이 있어 이 책이 마냥 늠름하지 않을 수 있고, 그녀를 그녀다울 수 있게 풀어낸 작가가 있어 ‘가녀장의 시대’는 더욱 경이롭다. 소설에 대한 나의 편견을 깨준, 새로운 시대를 기대하게 해준 이 책은 단단하고도 상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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