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영혼 전당포 - 플로리다 프로젝트

영화는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힘이 된다
글 입력 2023.10.15 2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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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 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여전히 같은 사람이면서도 아주 다르다. 그 오묘한 간극에는 5년에 가까운 물리적 시간이 놓여 있다. 그렇다면 5년 동안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길래. 시간은 거슬러 올라가 스무 살, 대학에 입학했고 독립을 했다. 이건 삶을 뒤엎은 근원적인 변화. 나는 태어난 이래로 처음 혼자가 되었다. 말 그대로 나는 뚝 떨어졌다. 이 사건은 실존적인 동시에 역사적이다. 학력사항에 기재될 단 한 줄에서 나의 역사가 새로 시작되었다. 상경한 첫날 뚜레쥬르 샌드위치와 덴마크 드링킹 요구르트를 사와 기숙사 방 안에서 입 안으로 욱여넣던 그 저녁 날의 고요한 공기. 그 고요함을 감지하지 못할 만큼 설렘과 두려움으로 두텁게 코팅된 나의 작은 마음. 나는 알이 어쩌다 깨져서 조금 일찍 세상에 나온 어리둥절한 아기 새 같았다.

 

지금 돌이켜보면 다소 기이한 것이다. 나는 돌연 혼자가 되었다. 이런 건 귀띔해 준 사람이 없었는데. 대학교만 바라봤을 뿐 서울과 고독과 관계와 사랑에 대해서 대비한 적은 없었는데. 세차게 내 안을 파고든 거대한 고독. 혹은 외로움. 이런 건 예상치 못했는데. 혼자 남겨진 나는 무얼 해야 하나. 누군가는 인파 속으로 파고들겠지만 나는 글을 쓰고 영화를 보기 시작했던 것 같다. 영화는 쉬운 자유였다. 자유의 작동 원리를 알려주는 미니어처 모형이었다. 나는 보고 싶은 영화를 내 마음대로 고를 수 있다. 본 영화가 쌓여갈수록 그것들이 모여 내가 만들어진다. 그렇게 만들어지는 나는 내가 되고 싶은 나. 나라는 사람은 캐롤과 패터슨과 문라이트. 이터널 션샤인과 바닷마을 다이어리까지 붙여서 조물조물. 짐 자무쉬와 셀린 시아마는 나의 조각가들. 이끌리는 대로 살고 바라는 사람이 되어가는 일련의 인생살이 과정이 영화를 감상하는 행위에서 생생히 시연되었고 나는 본능처럼 그게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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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나를 이해했다. 영화는 누구든 나올 수 있었다. 영화는 나의 것이 아닌 삶을 대놓고 훔쳐보라고 떠밀었다. 세계는 확장됐다. 커지고 커질수록 세상 속의 나는 작고 작아졌다. 세상 한 켠에 숨겨진 나는 무슨 짓을 저질러도 발각되지 않을 것이다. 세상에서 내가 제일 크다고 착각하고 살아도 그 착각의 크기는 아주 왜소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영화의 무거운 사유에 참여하면서도 러닝타임보다 긴 일상은 제멋대로 삼켜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남들보다 강한 마음의 중력이 작용하던 나는 영화 덕분에 가뿐할 만큼 중력을 잃었다. 영화는 나만 그러는 게 아니라고 일러주고 내가 그러지 않는 걸 그러는 사람들도 있으니 너도 네 멋대로 해도 된다고 타일렀다. 영화에선 희소한 사건들이 상습적으로 일어났다. 무엇보다 경이로운 사실은 그런 비전형적인 이야기들이 유성우처럼 반짝 떴다 사라지는 게 아닌, 쓰고 촬영하고 편집하는 고되고 오랜 노동 속에서 건설되어 각기 다른 사람들이 한뜻으로 하나의 이야기를 위해 공들인 창조물로서 명료하게 서 있다는 것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랜 시간 공들여 보살핀 이야기가 적막한 침대에서 홀로 누워 절박한 표정으로 재생 버튼을 누르는 사람에게 위로를 주는 모습을 나는 보았다. 그 사람은 (그리고 나는) 올라가는 크레딧을 쳐다보며 멍하니 중얼거렸을 것이다.

 

세상에 이런 이야기가 버젓이 있구나.

 

그건 몇 초간의 황홀함을 위해 평생에 걸쳐 화약을 발명한 불꽃놀이 같았다. 목격하러 밖으로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나도 영화의 태도로 당당히 지상에 두 발을 딛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곧 세상은 환해질 것이다.


시간은 휩쓸리듯 일 년 반이 지나 나는 군복을 입고 있었다. 왜냐면 입으라네. 군대는 아무에게도 찍히지 않는 영화였다. 삭막한 무대에서 짜여진 대로 연기를 하는데 찍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연기하는 동안 배우는 거짓임을 망각한 채 기어이 타인이 되고야 만다. 그리고 촬영이 끝나면 맹렬히 움직이던 하나의 영혼이 카메라 속으로 영영 자취를 감춘다. 영화는 내게 군인을 감추는 카메라. 아침 해가 뜨고 태양을 조명 삼아 연기하다가 해가 지고 보는 영화는 나를 다시 나로 복귀시켰다. 타성에 젖어 살다가도 지금보다 더 잘 살고 싶게 유혹했다. 내가 선망하는 삶을 일깨우고 정말 그리될 수 있다고 속삭였다. 이 곳이 아니라 저 곳도 분명 실재한다고 똑똑히 보여줬다. 나는 낮에 자유를 빼앗기고 밤에 다시 자유를 되찾았다. 이 치열한 공방전 속에서 나도 모르는 영혼이 움트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 그런 날들 중 하루였을 것이다. 어쩌다 <플로리다 프로젝트>를 보게 된 것도. 나는 이후 군생활 내내 나의 영혼 일부를 이 영화에 맡겨뒀다. 무슨 이야기이길래 이건 나의 영혼 전당포가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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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그리 위대한 영화는 아닌 것 같다. 더 탁월한 작품을 꼽으라면 수없이도 많다. 그냥 플로리다 디즈니랜드 근처 모텔에 사는 사람들 사는 이야기다. 여섯 살 꼬마 ‘무니’와 그녀의 스물두 살 엄마 ‘핼리’는 ‘매직캐슬’이라는 모텔에서 거주한다. 무니의 하루 일과는 노는 것이다. 그녀는 엄마와 놀고 모텔에서 함께 사는 친구들과 놀고 주변 어른들과도 논다. 그렇게 흘러가는 어느 여섯 살의 하루하루. 영화는 이야기를 휘어잡거나 조종하지 않는다. 사건이 일상처럼 이어진다. 일상의 순간순간은 기뻤다가 슬퍼지거나 슬프다가도 기쁘곤 하니 영화도 기쁜 장면과 슬픈 장면이 교차하며 흘러간다. 무니는 옆 모텔에 새로 들어온 차량한테 침을 뱉고 차주에게 온갖 험담을 퍼붓는다. 친구들과 돈을 구걸해서 아이스크림 하나를 쟁취하는 데 성공한다. 무료로 빵을 배급해 주는 차량에 익숙한 듯 찾아가 신나게 빵을 고른다. 놀거리를 찾아 친구들과 겁 없이 폐건물로 들어간다. 이 장면들이 혹시 슬퍼 보이나. 정작 무니는 아주 즐겁고 행복해 보인다. 

 

현실적인 영화에는 종종 연출자가 쏟은 정성이 엿보인다. 감독 숀 베이커는 영화감독 이전에 세심한 관찰자 같다. 그는 유심히 바라보고 왜곡 없이 담아낸다. 이야기를 진행시켜 줄 사건 정도만 의도적으로 배치해 준다. 잘 관찰하는 감독은 배우가 된다. 그가 맡는 배역은 홈리스가 되고 6살 꼬마가 되기도 한다. 모텔 관리인이 되었다가 모텔에 잘못 찾아온 신혼부부도 되어본다. 그들은 차례로 펜을 건네받으며 일기를 돌려쓰고 그것은 곧 시나리오가 된다. 감독의 임무는 인물들이 본인이 아닌 누군가로 곡해되지 않고 안전하게 호흡할 수 있게 옮겨 적은 작은 세계를 사려 깊게 보살피는 일. 그렇게 삶의 유별난 조각은 영화로 탈피한다. 현실을 담기로 결심한 영화는 영화이길 포기해야 하지만 보여주기 위해선 그것은 명백히 영화여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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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주로 영화에 소수자들을 담아낸다. 그들은 인간이라면 그러하듯 삶이라는 굴레 안에서 웃거나 울거나 화내거나 즐거워한다. 무니는 천사 같기도 악동 같기도 하고 핼리는 좋은 엄마 같기도 나쁜 엄마 같기도 하다. 숀 베이커는 그 모든 면을 포용한다. 특정 모습만 부풀리지 않는다. 함부로 단정 짓거나 고정관념에 따라 인물들을 다루고 나누지도 않는다. 그는 소수자를 사랑의 방식으로 대우하면서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세상에 그들을 소개한다. 그들과 세상 가운데에 선 매개자의 태도는 중립적일 수 없다. 그의 모든 영화는 결국 소수자를 응원하는 것 같다. 다만 세상은 늘 소수자의 편이 아니니 영화가 그들의 편이라는 건 삐딱한 지상의 균형을 바로잡는 일처럼 느껴진다. 그러면서도 숀 베이커는 관객을 한쪽으로 몰아가지 않고 우리가 자발적으로 감정을 느끼도록 부드럽게 인도한다. 영화의 질감을 경쾌하게 감싸는 위트도 늘 빼놓지 않는다.

 

인물들도 그가 쏟는 애정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는데 실패한다. 나는 도무지 그들을 미워할 수 없다. 핼리는 욕설을 입에 달고 산다. 그것은 그녀가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방식일 것이다. 무니도 엄마를 닮아 입이 거칠다. 두 모녀는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욕설부터 내뱉고 소리를 지른다. 무니는  위대한 사고뭉치다. 그녀는 친구들과 모텔 전기실에 들어가 손잡이를 내려 건물 전체를 정전시킨다. 상의 탈의를 한 채 일광욕하는 여인을 구경하며 온 힘을 다해 조롱한다. 폐건물 벽난로에 불을 지펴 건물을 불태우는 데 가담한다. 핼리도 호텔 안에서 향수 파는 호객행위를 하고 디즈니랜드 티켓 밴드를 훔치는 등 불법을 일삼고 심지어 성매매에까지 손을 댄다. 누군가는 이들에게 눈살을 찌푸릴 것이고 나도 가끔은 해탈한 듯 눈을 감고 싶지만 그럼에도 막바지를 달려갈수록 홀린 듯 이렇게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저 무니에겐 재밌는 놀이인 것이고 핼리에겐 고단한 생존을 향한 몸부림일 뿐이다. 이들이 이러는 건 불합리한 사회 구조 혹은 기구한 운명이 강하게 작용하는 탓일 것이다. 감독은 그늘에도 내리쬐는 볕뉘를 유독 아끼는 사람일 뿐 그들에게 드리워진 그늘을 숨기려고 들지 않는다. 오히려 명랑한 분위기에서도 여긴 여전히 그늘이라는 걸 관객들에게 지속적으로 상기시키고 어둠의 거처가 기어코 발각되도록 이야기를 끌어간다. 무력하게 끌려간 나는 무심코 그들이 더는 힘들지 않길, 사랑스러운 무니가 웃는 일만 있기를 이야기가 흘러가는 내내 초조한 마음으로 응원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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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인지 마지막에 무니가 울면 나도 모르게 같은 얼굴이 된다. 꾸밈없는 눈물에는 슬픔을 선물하는 힘이 있다. 그렇게 나눠 먹은 슬픔은 그가 직면할 미래를 끝없이 부풀린다. 앞으로 겪게 될 역경에 비하면 옆 모텔 친구 ‘잰시’랑 헤어지는 일은 아주 티끌만 할 텐데. 그 당돌하던 무니가 처음으로 펑펑 울어버리자 잰시가 갑자기 디즈니랜드로 데려갈 때. 노는 거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으면서 정작 바로 옆 전 세계 사람들이 모이는 놀이의 천국은 못 가봤을 무니에게. 신나게 동행하다가 디즈니성 앞에서 돌연히 멈추어 선 카메라는 이렇게 말을 건네는 것 같았다. 표가 없어서 들어가지는 못한다고. 표는 비싸고 관광객은 많고 너희는 이렇게 초라하다고. 대신 거대한 디즈니성에 주눅 들지 말고 자신만의 비밀 아지트들을 소중히 간직하라고. 매번 똑같이 삐걱대는 놀이기구들보다 비 오는 날 일부러 나가 엄마와 쫄딱 젖으며 뛰놀던 그 순간이 더 근사하다고. 무지개 끝에 있다는 황금을 찾아 무작정 달려가는 그 마음을, 너무 커버려도 아예 저버리지는 말라고.

 

무니가 그 여름에 받은 따스함들을 꾹 간직해 두고 버거울 때마다 한 입씩 꺼내먹기를 바란다. 그런 건 아무리 베어 물어도 닳지 않을 거니까. 다큐처럼 응시하고 졸졸 따라다니던 카메라가 디즈니성 앞에서는 몽상에서 깨어난 듯이 멈추어 버렸어도, 분수를 아는 그 겸손함이 좋았다. 숀 베이커 감독이 비주류를 다루고 세상에 소개하는 방식을 애정한다. 그래서 혼자 잘난 사람들과 텁텁한 세상 때문에 함께 사는 일에 눈이 감길 때쯤 이 영화를 카페인 마냥 챙겨 먹는다. 세상에 이런 영화가 있구나. 이런 영화를 만드는 이런 감독이 있구나. 이런 다정함이 존재할 수도 있겠구나. 그가 이야기를 다루는 태도와 영화의 포용성은 내가 삶을 무작정 긍정하는 마음을 포기하지 않게 만들었다. 그때부터 여전히 지금까지도.

 

내 영혼을 맡긴 날, 팍팍함으로 목이 메어 몽롱하던 그 날도 침대에 누워서 죽기 직전의 자세를 취한 채 재생 버튼을 눌렀다. 살고 싶다는 희망이 옮겨붙는 느낌을 받으며 잠에 들었다. 그 느낌을 갈망하는 건 지금도 유효하다. 영화는, 이런 이야기는 여전히 해낸다. 나는 시간 날 때마다 영화를 보는 성실한 시네필은 아니다. 그럼에도 영화 없는 세계를 상상하기란 힘들다. 내가 보지 않아도 영화는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힘이 된다. 영화는 멜로디컬한 인생사에서 중간중간 늘어진 카세트테이프처럼 작동한다. 끊어지진 않는다. 영화가 삶을 중단시킬 순 없기 때문이다. 다만 늘리고 늘려서 삶의 일정 구간을 엄숙하게 정체시킨다. 정지한 시간은 과거를 돌아보고 현재와 직면하고 미래를 다짐하게 한다. 끊겼던 노래가 다시 재생되면 나는 그 전의 나와 여전히 같은 사람이면서도 아주 다르다. 계절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반복된다지만 그런 변화는 오롯이 내 안에서 요동치며 매해 새롭게 다가오는 풍경에 감응하느라 나는 기쁜 마음으로 부지런해지는 것이다.

 

 

[문충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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