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명절 부정론자는 아닙니다만

노는 게 제일 좋아
글 입력 2023.10.06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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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었던 연휴였다. 해야 할 일을 하고 약속을 잡아도 비는 시간이 생겼다. 연휴가 시작되기 전에는 드라마 한 시리즈를 끝낸다거나 평소에 시간이 없어서 안 해봤던 걸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는데 연휴의 시작과 함께 늘어졌다. 언제나 한 주의 마지막 근무일은 금요일과 같은 피로를 안겨주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수요일 밤부터 기절하듯 잠에 들었다는 건 수면 부족이거나 피로가 원인일테니 이참에 하루 쉬어가기로 했다.


연휴 당일은 몹시 바빴다. 바쁜 건 내가 아니라 세상이라 온종일 길바닥에 갇히고 휴게소에서 정체되었을 뿐이겠지만. 추석 당일에 성묘부터 요양원까지는 하드코어 코스였다. 큰집이라 예정된 노동만 오래 해왔고 차례가 없어졌을 비로소 한가로운 명절을 만났는데, 난데없는 명절 코스를 경험하고 나니 이거고 저거고 반복해서 할 일은 아니라고 느꼈다.


납골묘 앞에 잠시 놓이기 위해 준비되었던 산적과 샤인머스캣은 맛이 있었다. 사실 명절은 이래야 하는 거 아닐까? 평소에 먹지 않던 음식을 명절을 구실삼아 먹으면서 즐거워하는 것. 하루 종일 기름 냄새 맡으면서 전을 부치느라 하나씩 야곰야곰 가져가서 먹는 손가락이 얄밉게 느껴지는 것 말고. 명절이니까, 원래 그런 거니까 라는 내 것이 아닌 남들의 생각과 말을 빌리는 것보다 내가 좋아하는 명절을 취사선택하는 것.

 

*


명절을 늘 서울에서 보냈는데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문을 연 곳이 늘어나고 거리엔 사람들이 많아졌다. 명절에는 문 닫고 일을 쉬는 분위기가 만들어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거리에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건 기존 방식의 명절을 지내지 않는 사람이 늘어났다는 뜻이니 그에 따라 상점 분위기도 달라진 걸지도 모른다.

 

나 때는 그 명동 거리도 명절 당일이면 한산했는데 이젠 배달앱을 켜면 영업하는 동네 음식점이 한가득이다. 자연스럽게 명절 당일에만 문을 닫는다는 걸 알고선 식당을 예약하고 핫한 카페에 가기로 했고 예정대로 실천했다. 음식점 오픈 시간에 맞춰 예약한 팀은 나밖에 없었지만, 밥 먹고 카페에 가니 마지막 자리를 차지한 손님이 되었고 대기 줄이 생기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서울 어느 거리에 복작복작 모여 있었다.

 

이런 명절이든 저런 명절이든 증후군을 남긴다. 차례상을 준비하는 대로의 피로감, 자차 이동은 최소 평소의 두 배의 시간을 두고 움직여야 하는 피로감, 내가 정하지 않은 약속, 편하지 않은 감정 등 쉬어야 할 시간에 쉬지 못하고 무언가를 생산한다. 때로는 좋은 방향으로 흐르기도 하지만 어떨 때는 전혀 아닌 방향으로.


오래전 떠돌았던 말이다. 조상 덕 본 사람들은 명절에 해외여행 떠나고 아닌 사람들만 남아 차례를 모시고 있다고. 올해는 다른 방향으로 업데이트되었다. 명절 연휴에 좋은 곳 가서 밥 먹으면 사람 없어서 이래도 되나 싶은 부모님이 계시니 차례를 생략한다면 사람 많은 곳에 가서 밥을 먹으란 이야기. 명절이 달갑지 않은 사람들. 누가 그런 명절을 만들었을까?

 

*


더 이상 차례상을 준비할 필요가 없지만 명절 음식을 하는 엄마들의 이야기는 흔하다. 나는 그걸 그들만의 의식이라고 생각한다. 해야만 마음이 편하다면 굳이 말리지 않는다. 가만히 앉아서 명절이니까 이런저런 것들이 있길 바라는, 되도 않는 태도는 전통이 스치지도 않은 구시대적 산물이 남긴 폐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말하면 명절 부정론자 같은데 나는 명절을 좋아한다. ‘몸과 마음이 편한’이라는 전제조건이 갖춰진 그런 명절. 명절을 구실 삼아 누군가의 안부를 묻거나 달이 크다는 이야기를 주고받는 건 할 만 한 일이다. 때로는 상황이 내 등을 떠밀어줘야 되는 일도 있으니까. 다만 나에게 추억이란 기름 냄새 맡고 손에 밀가루 묻혀가면서 부친 전이 아니라 명절날 외가댁 부엌에 가면 언제나 쌓여있던 녹두전이다. 추억은 준비된 명절에서 한 조각씩 쌓였다.


그래서 명절이 남기고 가는 게 증후군을 넘어 트라우마 같은 현실이라면 조금 바꿔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명절이니까’라고 참고 넘어가기에 때로 스트레스가 과도하다. 하지 않았을 때 몸이 편하고 마음이 불편하다는 사람도 있지만 최근 몇 년 나는 몸과 마음이 모두 편하다. 적당히 명절 분위기 내고 친척들과 밥 한 끼 정도. 명절이니까 과일을 사 들고 가는 어른으로 진화했음을 보여주는 순간.


요즘 차례상에는 보라색 포도 대신 조상님은 드셔보시지 못한 낯선 이름의 샤인 머스캣이 올라간다. 차례상은 시대를 반영한다. 이거냐 저거냐부터 있거나 없거나까지.

 

저희는 명절 아침 사람 모아서 하는 차례상을 없앴습니다. 예전에는 신새벽부터 모였다면 어느 순간에 아침이 되었고, 언제는 사정에 맞추다 보니 아침을 넘은 어느 오전일 때도 있었습니다. 올라가는 음식은 달라질 때가 있었는데, 한 해에 두 번이라도 오랜 기간 먹다 보면 질리기 때문에 변주를 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차례상도 사라졌습니다. 더는 챙길 수 없는 상황이 되어서요. 차례는 그렇게 상황이 되지 않으면 생략할 수 있는 것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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