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엽서를 찾습니다.

여행지마다 엽서 보내기 프로젝트
글 입력 2023.09.29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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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지의 흔한 기념품 중 하나는 엽서다. 가격도 저렴하고, 짐도 되지 않는다. 미술관이나 서점에서도 쉽게 볼 수 있고, 길거리 기념품 가게나 기차역, 공항에도 흔하다.


엽서는 정말 많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엽서들이 모두 누군가에게 보내지는 것은 아니다. 굳이 우편을 선택할 이유 없이 바로 연락이 가능한 이 시대에 엽서는 소통용보다는 관상용에 가깝다.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6개월간 유럽으로 떠나기 전, 아빠에게 여행지에 가면 엽서를 보내 달라는 요청을 받았고 나도 재밌을 것 같아 흔쾌히 수락했고, 그렇게 나는 16장의 엽서를 보냈고 아빠는 14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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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여행 도중에 엽서를 보내는 게 이렇게 번거로운 줄 알았다면 그렇게 신이 나서 고개를 끄덕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위에 적은 대로 엽서를 구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이지만, 우표는 생각보다 잘 보이지 않는다. 우체국을 찾아가면 좋겠다마는 관광객인 내가 주로 다닐만한 시내 관광지에는 우체국이 잘 없어서 따로 찾아가야 할 때가 많았다. 그래서 주로 기념품 가게나 담배 가게에서 샀는데, 안 파는 곳도 많아서 여러 번 허탕을 치며 다녀야 했다.


우체통도 은근히 골칫거리였다. 분명 길목마다 있는 것 같던 우체통들은 갑자기 내가 필요할 때만 되면 몇 블록을 걸어도 보이지 않아서 굳이 검색해 찾아다녔다. 그래봤자 종이 한 장 밀어 넣는 일이니 시간을 많이 잡아먹지는 않지만, 여행 막바지까지 우체통을 찾지 못하면 마음도 급해지고, 실제로 엽서를 부치고 오느라 도시를 떠나는 버스를 아슬아슬하게 탄 적도 있다.


혼자 여행을 다닐 때야 나 혼자 부산을 떨면 된다지만, 친구들과 함께하는 여행에서도 엽서와 우표와 우체통을 제때 찾느라 정신없이 굴 때는 약간 민망하기도 하다. 여행지마다 아빠에게 엽서를 쓰는 게 낭만적이라는 말도 많이 들었는데, 그때마다 실상은 아주 귀찮고 고생스럽다고, 한 번쯤은 해볼 만해도 꼬박꼬박 보내는 것은 품이 꽤 든다고 했다.


하지만, 그래서 낭만 아닐까? 아주 귀찮고 고생스럽고 품이 들지만, 한 번쯤 해볼 만한.


브뤼셀에서는 더 예쁜 엽서가 있을 것이라는 이유로 그럭저럭 평범한 엽서들을 사지 않고 버티다가, 결국 떠나기 직전 기차역에서 유일한 선택지였던 정말 못생긴 엽서를 반강제로 샀다. 슬로베니아에서는 펜이 없어서 기차역에서 기다리던 다른 관광객의 초록색 펜으로 글을 썼고, 파리에서는 우표 스티커가 떨어지지 않아 비상용으로 들고 다니던 본드로 붙였다. 마지막 도시였던 프랑크푸르트에서는 국제 우표 하나 달라는 말을 독일어로 하는 데 마침내 성공했다.


이건 낭만이 맞다.


여행이 끝난 뒤 돌아와서 쓰는 편지도 재밌지만, 당장 여행지에서 써 보내는 엽서의 묘미는 또 다르다. 손바닥만 한 공간에 두서없이 써 내려가는 엽서에는 정말 그때 하고 있던 생각이 적히기 때문에 실없는 소리가 대부분인데, 그래서 더 진심이기도 하다. 브리스틀에서는 정말 좋아하는 밴드의 공연을 보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엽서를 썼는데, 브리스틀이라는 도시에 관한 내용보다도 그 공연이 얼마나 좋았는가 하는 감동밖에 담겨 있지 않다.


또 여행 도중에 편지를 쓰니 의도치 않은 거짓말쟁이가 되기도 한다. 엽서에는 오늘 이런저런 구경을 할 계획이라고 적어 보냈는데, 그 엽서를 쓰자마자 갑자기 이후 계획이 다 틀어져서 엽서에 적은 내용과는 전혀 다른 하루를 보낸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나중에는 이게 징크스인가 싶어 부러 엽서에 다음 일정을 안 적기도 했다.


즉각적인 이메일이나 문자와는 달리 엽서는 아빠에게 닿는데 2주 안팎의 시간이 걸리는데, 이 간격을 두고 신기한 에피소드가 생긴 적도 있다. 아빠에게 줄 기념품이 곧잘 떠오르지 않아 고민이라는 말을 파리에서 적어 보내니 그 엽서를 2주 정도 지나 받은 아빠가 영국에서 비틀즈 액자 같은 것을 사 오면 좋겠다고 알려줬는데, 놀랍게도 나는 아빠가 그 엽서를 받기 일주일 전에 런던에서 지내며 이미 비틀즈 엽서를 보낸 것이다! 아빠와 내가 통했다고 말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지만 아빠가 실물로 비틀즈 엽서를 받았을 때 놀라게 하고 싶어 참느라 힘들었다.


하지만 엽서의 진짜 묘미는 여기서 드러난다. 이 엽서가 잘 도착할지 중간에 사라질지 아무도 알 수 없어 끝까지 긴장을 놓을 수 없다는 점이다(사실 내가 긴장을 하건 말건 달라지는 건 없다. 차라리 반쯤 잊고 있는 게 마음이 편하다). 국제 우편은 분실 사고가 워낙 잦다고 해 걱정이 많았는데 다행히 내가 아빠에게 보낸 엽서는 대체로 잘 갔다. 딱 두 개만 빼고. 위에서 말했듯 내가 보낸 16개의 엽서 중 14개만 아빠에게 안전하게 도착했는데, 그 사라진 두 엽서가 바로 위에 이야기한 브리스틀 공연 엽서와, 런던 비틀즈 엽서이다.


무슨 엽서를 잃어버려도 다 아쉬웠겠지만, 하필 저 두 엽서라 더욱 아쉬움이 크다. 두 엽서 모두 런던의 한 기념품 가게에서 산 우표를 사용했는데 그 우표가 문제였던 걸까. 아니면 잉글랜드 우체국을 원망해야 하는 걸까.


이제는 한 달이 더 지나가는 시점이라 저 엽서들을 다시 볼 가능성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그래도 국제 우편물들은 정말 한참 지나서, 뜬금없이 등장하는 경우도 있다던데 나도 그런 상황이길 기대한다. 사실 이 글을 쓰는 이유도 엽서들을 꼭 받고 싶은 마음에 있다. 물건을 잃어버리거나, 상황이 잘 안 풀릴 때 동네방네 징징대며 소란을 떨고 나면 갑자기 물건이 돌아오거나 문제가 해결돼서 사람 민망해지게 하는 경험을 자주 했는데, 혹시 이번에도 이 글을 쓰고 나면 기적처럼 엽서가 도착하지 않을까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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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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