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이야기를 발견하는 사람, '래빗' 고혜원 작가

글 입력 2023.09.24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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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이야깃거리는 많지만, 그 모든 게 다 이야기가 되는 건 아니다. 어떤 것들은 망각에 묻혀 이야기꾼이 발견해줄 때까지 오랜 세월을 기다린다. 사람들은 이야기꾼의 세계가 창작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창작이 있기까지는 수많은 발견의 순간이 먼저다.

 

한국전쟁때 활동한 소녀 첩보원도 이야기가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당시 이들의 작전명은 '래빗'. 저마다의 사연을 가진 소녀들이 모여 군사 훈련을 받고 피란민으로 위장해 군 기밀사항을 전달했다.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하는 수많은 이야기가 나오는 동안에도 좀처럼 다뤄지지 않던 이들은 고혜원 작가를 만나 비로소 이야기가 되어 세상에 나왔다. 소설 『래빗』의 탄생이다. 미래를 꿈꾸기 어려운 전쟁 시기, 두 소녀 첩보원의 꿈과 우정을 다룬 이 소설은 제2회 K-스토리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지난 11일, 고혜원 작가를 만났다. 앞으로도 계속 이야기 만드는 사람이고 싶다는 작가 소개글처럼, 고혜원 작가의 일상은 이야기와 뗄래야 뗄 수 없다. 회사에 출근해서는 다른 이야기가 완성되도록 돕는 스토리PD로, 집에 오면 자신의 작품을 쓰는 작가로 살아간다. 아트인사이트에서 7년간 글을 써 온 에디터이기도 하다. 여러 가지 일의 균형을 잡으며 작가로서의 삶을 이어가는 그는 새로운 이야기를 또 기다린다. 발견할 이야기도 들려줄 이야기도 아직 많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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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처럼 래빗의 존재를 모르던 사람들을 위해

래빗이 나오는 이야기를 써보고 싶어졌어요."

 

 

작가님, 안녕하세요! 첫 번째 책 출간을 축하드립니다. 소감이 어떠신가요? 

 

이전까지 영화나 드라마 작업을 더 많이 해서 책 출간은 새로워요. 영화나 드라마는 중간에 과정이 많다 보니 제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선보일 기회가 많지 않아요. 책은 영화, 드라마와 달리 제가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를 모두 책임지는 경험을 해볼 수 있어 인상적이었습니다. 완결된 한 편의 이야기를 써내고 사람들에게 공개했다는 데 의의가 있는 것 같아요.

 

 

영화, 드라마 작업을 주로 하시다가 소설을 쓰게 된 이유가 있었나요?

 

원래는 『래빗』의 이야기도 영화 기획안에서 시작되었어요. 현실적인 문제로 영화가 되기는 어려워졌지만, 어떻게든 완성을 해보고 싶어서 소설을 선택했죠. 초고를 완성하고 계속 수정하던 중에 공모전 소식을 알게 되어 지원했고, 좋은 결과를 얻게 되었습니다.

 

 

『래빗』은 한국전쟁 당시 활동했던 소녀 첩보원들의 이야기입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며 ‘래빗’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되었어요. 작가님은 어떻게 이 소재로 이야기로 만들 생각을 하셨나요?

 

저도 몇 년 전 한 예능프로그램에서 한국전쟁 당시에 소녀 첩보원들이 있었고, 이들의 작전명이 ‘래빗’이었다는 걸 처음 알게 되었어요. 겨울철 피란민으로 위장하고 흰 토끼처럼 산을 폴짝폴짝 몰래 뛰어다니는 여자아이들이 토끼 같아서 그런 작전명이 붙었다고 해요. 이 이야기를 지금껏 하나도 몰랐던 게 놀라웠어요. 저처럼 래빗의 존재를 모르던 사람들을 위해 래빗이 나오는 이야기를 써보고 싶어졌어요.

 

 

래빗이라는 소재를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다양한 이야기가 나올 것 같은데, 작가님은 래빗으로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나요?


서로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전쟁 속에서 외로워진 아이들이 친구가 되는 이야기를 생각했어요. 전쟁 중에는 미래를 꿈꾸기가 어렵잖아요. 이들이 친구가 되는 모습을 통해 그럼에도 미래를 상상하고 꿈꾸는 것이 의미가 있다는 것,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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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보니 결과적으로는 역사 속 숨겨져 있던

여성들의 이야기를 많이 썼습니다.

지금까지 지면에 발표한 세 작품의 공통점이에요."

 

 

잘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인 만큼 자료 조사가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이들이 활동했던 켈로 부대가 첩보 부대다 보니 자료가 너무 없었어요. (웃음) 국내에서 켈로부대를 연구한 논문이 9편이었고, 그중에서도 소녀 첩보원을 단독으로 다룬 건 한 편뿐이었죠. 심지어 미군 소속이었기 때문에 미군의 허가를 받아야만 열람할 수 있는 자료도 있었고요. 하지만 자료가 방대했다면 그만큼 고증하기가 어려웠을 거예요. 자료가 없으니 제가 상상으로 채워 넣을 부분이 많아서 오히려 편하기도 했어요.

 

 

주인공인 ‘유경’과 ‘홍주’는 어떻게 만들어진 인물인지도 들어보고 싶어요.

 

원래는 남한의 소녀 첩보원과 북한의 소녀 첩보원이 만나는 이야기를 구상했는데, 좀 더 생각해보니 아군과 적군이 더 모호했으면 좋겠더라고요. 마침 자료 조사를 하다가 당시 배우 출신의 소녀들이 군 간부의 애인으로 위장해 첩보 활동을 했다는 기록을 발견해서 인물 설정을 바꿨죠. 같은 래빗이지만 다른 상황에 처한 두 소녀의 이야기로요. 


아군인 두 소녀가 각각 상부에 보고한 정보로 서로를 위험하게 한다면 어떨까. 그런 와중에 성격도 상황도 다른 두 소녀가 친구가 된다면 어떨까 생각하며 지금의 이야기를 만들었습니다.

 

 

중공군인 장웨이라는 인물도 흥미로웠어요. 홍주나 유경에 비해 작가님과 심리적 거리가 먼 인물이었을 텐데, 이 인물은 어떻게 만들었는지도 궁금합니다.

 

전쟁 중 군인이 한 일을 군인 개인의 책임으로만 돌릴 수 있는가 자주 생각해요. 좀 더 구조적인 문제로 접근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그래서 장웨이도 국가가 일으킨 전쟁에 휘말려버린 한 명의 군인으로 그리고 싶었어요. 물론 굉장히 잔인한 면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애정을 갈구하는 인물이기도 하죠.

 

또 앞서 말씀드렸듯 고위 공직자의 애인으로 3년을 지내며 첩보 활동을 했던 래빗의 기록을 발견하며 그 두 사람의 관계도 계속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3년간의 연인 행세는 진짜 연기일 뿐이었을까, 둘 사이에 어떤 감정이 오갔을까 하고요. 그런 고민도 장웨이라는 인물을 만드는 데 반영되었습니다.

 

 

제가 본 작가님의 작품은 『래빗』 뿐인데요, 평상시 주로 어떤 이야기를 만드시나요? 원래 역사물을 자주 쓰시는지도 궁금합니다.

 

역사물을 써야겠다고 마음먹고 시작하는 건 아닌데, 하다 보면 역사물을 쓰게 돼요. (웃음) 숨겨져 있는 얘기를 발굴해내는 걸 좋아해서 그런가 봐요. 숨겨져 있는 이야기는 주로 역사, 그중에서도 여성의 이야기가 많잖아요. 그러다 보니 결과적으로는 역사 속 숨겨져 있던 여성들의 이야기를 많이 썼습니다. 지금까지 지면에 발표한 세 작품의 공통점이에요.


신춘문예 당선작이었던 『경희』는 경성시대에 있었던 최초의 패션쇼 이야기에요. 우리나라 패션쇼의 유래를 찾아보니 당시 신여성들이 ‘의복 감상회’라는 걸 열었더라고요. 신여성이 입는 옷에 좋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사람이 너무 많았기에 우리가 입는 옷이 이상한 옷이 아니라는 걸 알리려고 연 행사였다고 해요. 


밀리 오리지널에서 연재했던 『연화의 묘』도 어느 날 제가 본 뉴스에서 시작되었어요. 신라시대 공주의 묘에서 바둑돌과 약재가 출토되어서 학자들이 병약한 공주가 바둑을 뒀을 거라 추측한다는 내용이었죠. 이전까지는 남성만 바둑을 뒀을 거라 생각했기에 신선했어요. 그걸 토대로 바둑밖에 둘 줄 모르는 병약한 공주 이야기를 썼습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것에 관해 쓴다는 것은 내가 나서서 열심히 찾아야 하는 거잖아요. 평소 아이디어를 얻으시는지도 궁금해요.

 

평상시에 무얼 보든 메모를 꾸준히 해놓는 편이에요. 그중에서도 특이한 직업군이나 잘 몰랐던 역사적 사실은 꼭 기록해두죠. 각 잡고 자료를 찾아야겠다는 마음으로 디깅을 할 때도 있는데요, 그러면 오히려 잘 안 찾아지더라고요. 좋은 아이디어는 우연히 발견할 때가 훨씬 더 많아요. 『경희』의 소재는 대학교 때 과제를 하다가, 『래빗』의 소재는 예능프로그램을 보며 발견했죠.

 

그렇게 발견한 새로운 사실에 저의 기억이나 관심사가 합쳐져 이야기가 만들어져요. 『연화의 묘』도 공주가 바둑을 뒀다는 역사적 사실을 알게 된 것만으로는 어떤 이야기를 할지 알 수 없었을 거예요. 제가 어렸을 때 바둑을 배웠고, 바둑의 규칙이 익숙했기 때문에 쓸 수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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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떠나지 않는 일을 계속하겠다는 생각은 분명합니다.

앞으로도 이야기를 만드는 일을 하고 싶어요." 

 

 

작가 소개글을 보면 ‘계속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고 나와 있어요. 언제부터 그렇게 마음먹었는지 궁금해요.

 

원래 제게 글쓰기란 팔 아픈 일이었어요. (웃음) 중학교 때 usb랑 피자빵을 준다고 해서 백일장에 나갔다가 정말 우연히 글쓰기의 즐거움을 알게 되었죠. 글을 쓰는데 심장이 되게 빨리 뛰더라고요. 글쓰기가 재미있다는 걸 온몸으로 느낀 순간이었어요. 그 후로 막연히 언젠가 내 서재가 생긴다면 거기에 내 책을 한 권 둘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본격적으로 작가가 되어야겠다 마음먹고 창작을 하기 시작한 건 스무 살 때부터였어요. 그때는 소설보다 드라마나 영화 쪽 작가를 생각했기에 대본과 시나리오를 보면서 독학을 했습니다. 그러다 휴학을 하고 쓴 시나리오가 신춘문예에 당선되었어요. 그 이후로 계속 이야기와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도 전업 작가는 아니에요. 회사에서는 스토리PD로서 다른 작가님들과 협업해 하나의 이야기가 완성되도록 돕는 일을 하고, 집에 오면 제 이야기를 만들죠. 둘 다 각각의 성취감이 있어요. 앞으로 스토리PD로 더 많은 일을 하게 될지, 작가로서 더 많은 일을 하게 될지는 계속 고민하겠지만, 이야기를 떠나지 않는 일을 계속하겠다는 생각은 분명합니다. 앞으로도 이야기를 만드는 일을 하고 싶어요. 

 

 

작가로 살아간다는 건 많은 사람의 꿈이지만 쉽진 않은 일인 것 같아요. 


빨리 성과가 나오는 일이 아니기에 더 그런 것 같아요.저도 이제는 그만둬야 하나 생각할 때마다 조금씩 성과가 나오더라고요. 휴학하고 이제는 취업 준비를 해야겠다 생각했는데, 그때 쓴 글로 신춘문예 당선이 되었어요. 그게 계기가 되어 시나리오 작가로 일을 했는데, 거기 계약 기간이 끝나갈 때쯤 또 『래빗』으로 대상을 받았고요. 


하다 보면 어떻게든 된다는 걸 경험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작가’라는 호칭은 아직 어색해요. 그 호칭에 자신감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제가 더 잘해야겠죠.

 

 

작가님이 그토록 이야기에 매료되었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이야기란 사람들을 몰입시키고 휴식의 순간을 선물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일상에서 1시간 정도 어떤 이야기에 몰입해서 일상과 나를 분리하는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게 참 멋있죠. 그런 이야기를 만드는 게 제 업이라면 좋겠다는 생각이에요.

 

 

지치지 않고 계속 이야기를 만드는 동력은 무엇인지도 궁금해요.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무엇보다도 큰 동력은 재미라고 생각합니다. 이야기를 상상하고 생각해내는 게 아직은 즐거워요. 계속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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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는 이야기,

잘 알려지지 않았던 사람들이 조명받는 이야기면 좋겠습니다."

 


작가님이 앞으로 만들고 싶은 이야기는 어떤 이야기인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는 이야기, 잘 알려지지 않았던 사람들이 조명받는 이야기면 좋겠습니다. 지금껏 만들었던 이야기도 결이 비슷해요. 어려운 상황에 있던 이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고(『래빗』), 옷을 만들고(『경희』), 바둑으로 나한테 강요된 선택을 바꾸죠(『연화의 묘』). 앞으로도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요즘은 현대물을 구상 중인데요, 역시 잘 알려지지 않은 ‘진술조력인’이라는 직업에 관한 이야기가 될 거예요. 진술조력인은 미성년자거나 장애를 가진 피해자가 법정에서 진술을 해야 할 때 검사의 요청으로 진술을 받아주는 직업이에요. 예전에 뉴스로 알게 된 이 직업을 본격적으로 다뤄보고 싶습니다.

 

 

작가를 꿈꾸는 분들에게 줄 수 있는 팁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누군가 제게 어떤 이야기를 갖고 있냐고 물어봤을 때, 소재를 말하는 건 답이 될 수 없어요. 기승전결이 존재하는 이야기가 있어야 하죠. 그런 의미에서 일단 완성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끝을 봐야 합니다. 완성을 해야만 어떤 부분을 수정해야 할지 더 잘 보이기도 하고요. 완벽한 작품을 쓰겠다는 마음으로는 영영 아무것도 못 써요. 저도 매번 ‘초고는 쓰레기’라는 마음가짐으로 글을 씁니다.

 

 

작가님은 아트인사이트에서 오래 활동하시기도 했는데, 그 시간이 작가님이 지금의 작가님이 되는 데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도 막간을 이용해 들어보고 싶습니다.

 

얼마 전에 확인해보니 제가 아트인사이트에서 쓴 글이 200편을 넘었더라고요. 저도 놀랐어요. (웃음) 200편의 글을 쓰며 콘텐츠를 깊게 보고 사유하는 힘을 기를 수 있었어요. 글 쓰는 과정이 없다면 무엇을 보든 재미있다, 없다 정도로 끝났을 텐데 어쨌든 글을 써야 하니 200개의 생각을 한 거죠. 

 

 

마지막으로 『래빗』을 읽게 될 독자분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이 책을 읽고 한국전쟁 때 ‘래빗’이라는 존재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아요. 더 나아가 독자분들이 언젠가 꿈꾸는 미래에 가닿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래빗』의 아이들은 전쟁 때문에 미래를 꿈꾸는 걸 어려워해요. 지금은 전쟁 중은 아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더 나은 미래, 더 나은 자기 자신을 상상하기가 어려울 때가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더 나은 미래를 상상할 자격이 있다는 응원을 보내고 싶어요.

 

 

[김소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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