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중요한 건 우연도 운명도 아니라 [영화]

글 입력 2023.09.22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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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500일의 썸머'(2010)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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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하는 마음이란 건 


 

슬슬 아침마다 따뜻한 이불에서 나오기가 힘들어지는 것을 보니 과연 계절이 넘어가는 시기인 듯하다. 시간의 흐름을 자각하고 지금의 나는 어디쯤에 서 있는지를 새삼스레 가늠하는 일은 영 진부하지만, 사실 꼭 필요한 환기이기도 하다. 무수한 보통의 하루들을 대수롭지 않게 흘려보내다 보면 내가 고여 있는지 흘러가고 있는지조차 판단하기 어려워지는 순간이 온다. 

 

아무튼 거창한 얘기는 각설하고, 올해의 가을이 나에게 가져다 준 생각들은 바로 요즘의 서늘해진 아침 공기처럼 착 가라앉은 자각들이었다. 그저 순환하는 과정의 일환인 건지, 영구히 변화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예전에 비해 대부분의 일들에 무던해졌음을 느낀다(물론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여전히 예민을 떠는 부류일지도). 사람과 사랑과 세상에 기대하는 바가 줄어들었고 감정의 낙차를 한발짝 멀리서 관조하는 법을 알게 되었다. 

 

어쩌면 무뎌지고 건조해졌다는 얘기일지도 모르겠다. 다만 자기기만적인 냉소나 문제를 직면하지 않으려는 비겁함, 정체되어 있음에 대한 합리화를 하려는 건 아니다. 당장 작년의 나를 떠올려만 봐도 확실히 느낌이 다르다. 지쳤거나 방어기제로 인해 숨어들거나 하던 당시와는 조금 결이 다른 가라앉음이다. 그럼 그렇지,가 아니라 그럴 수도 있지,의 방식을 취하게 되었다고 해야 할까. 고작 1년 남짓한 시간으로 내가 완전히 바뀌었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확실히 사고가 흐르는 방식이 좀 더 다양해졌다. 

 

그렇게 새롭게 체화한 '그럴 수도 있지'의 방식이 적용되는 대상들은 주로 사람과 마음에 관한 것들. 상처받지 않기 위해 미리 속단하기보단, 그저 눈 앞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려는 경향이 생겼다. 서운해하지 않으려는 노력 없이도 앞뒤 맥락을 기꺼이 수긍하는 법을 익혀나가고 있다. 이왕이면 잘 가꾼 관계를 바라지만, 중요한 건 정말로 완벽해졌는가의 여부가 아니라는 생각. 그저 상대 역시 나처럼 이 관계를 잘 가꿔나가고 싶을 뿐인 걸 확인하고 나면 그 외의 것들은 부차적인 문제처럼 여겨지곤 했다. 완벽하고 이상적인 관계에 대한 기대가 옅어졌고 그 자리를 의식적인 노력으로 채우게 되었다. 노력. 그러니까 노력이다. 그건 비참한 게 아니라 당연한 것이었다. 필연적으로 얻어지는 건 없다. 

 

그리고 여기 나와 비슷한 깨달음을 마찬가지로 가을과 함께 맞이한 한 남자가 있다. 그의 이름 '톰'. 영화 '500일의 썸머'의 남자 주인공이다. 

 

 

 

우연 혹은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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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남자와 여자, 운명을 믿는 톰과 사랑을 회의하는 썸머. 직장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둘은 친구도 연인도 아닌 애매모호한 관계에서 설렘과 긴장을 주고 받는다. 톰은 썸머의 일상적인 말과 몸짓 하나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자신의 운명적 상대가 바로 그녀라는 낭만적인 비약을 한다. 반면 썸머는 자신이 누군가의 여자친구로 정의되고 구속되는 관계를 회피하며 둘의 사이를 단정짓기를 꺼려한다. 톰은 처음에 그런 썸머의 면모를 개의치 않아했지만, 점점 어정쩡한 상태에 불안을 느끼며 확신을 요구한다.  

 

결국 이 관계를 그만둘 것을 선언하고 자취를 감춘 썸머. 이별의 아픔에 힘겨워하던 톰은 지인의 결혼식에 참석하러 가는 길에 우연히 썸머를 마주친다. 톰은 먼저 자신을 알은 체 해오는 썸머를 거부하지 못한다. 그녀와 함께 춤을 추고, 그녀의 홈파티에 초대받으며 달콤한 재회를 꿈꾸는 톰. 하지만 썸머는 파티에서 자신을 다른 손님들과 다를 바 없이 대했고, 자신이 곧 결혼하게 될 것이란 소식을 전해왔다.

 

모든 것이 부질없어진 톰은 다니던 회사도 그만둔 채 포기했던 건축가의 꿈을 이루는 일에 열중하기 시작한다. 그러다 둘의 추억이 담긴 한 공터의 벤치에서, 이제는 유부녀가 된 썸머를 마주한 톰. 톰은 말한다. 그렇게 구속받기 싫다던, 사랑을 믿지 못한다던 그녀가 결혼 같은 선택을 한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고. 운명의 반쪽인 줄만 알았던 썸머와의 결별 이후 톰은 과거 썸머가 늘상 얘기하던 회의론을 그제서야 이해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썸머는 자신 역시 지금의 남편을 만나고 톰의 운명론을 그제서야 믿게 되었다는 대답을 내놓았다. 

 

 
내가 화나는 건... 네가 말했던 게 전부 옳았다는 거야. 그게 화나. 운명이니 반쪽이니 진정한 사랑 같은 거... 동화 속에서나 나오는 새빨간 거짓말이었어.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 깨달았어. 너랑 만날 땐 몰랐던 걸... 내가 식당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어떤 남자가 다가와 책 내용을 물었어. 그이가 내 남편이야. 내가 영화를 보러 갔더라면? 다른 식당에 갔다면 어떻게 됐을까? 10분만 늦게 식당에 갔다면? 우리는 만날 운명이었던 거야. 그때 생각했지. 네 말이 옳았구나, 알게 됐어. 단지 내가 너의 반쪽이 아니었던 거야.
 

 

처음의 입장에서 완전히 뒤바뀐 채 마주한 둘. 짧지만 그간 썸머의 모든 행동을 납득하게 하는 대화를 마지막으로 둘은 마지막 인사를 주고 받는다. 썸머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해주기는 어렵겠다던 톰은, 대화 이후 마음 속의 무언가를 정리해낸 듯하다. 그렇게 서로의 안녕과 행복을 온전히 소망하며 썸머와의 500일은 끝을 향해 달려간다. 세상엔 운명이 아닌 우연만이 존재할 뿐이며, 그 우연을 필연으로 만들 수 있는 건 다름 아닌 자신의 노력뿐이라는 확신과 함께.

 

 

톰이 배운 게 있다면 누구도 위대한 우주의 이치를 거역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연! 그것은 우주의 이치다. 그것보다 위대한 건 없다. 톰은 기적은 없다는 걸 배웠다. 운명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다. 그는 깨달았고 이제 확신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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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재작년에 재개봉까지 한, 워낙에 여기저기에서 많이 회자되었던 작품이다. 영화가 현실적인 로맨틱코미디의 정석으로 자리잡으며, 톰과 썸머의 입장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논의가 많이 쌓여왔기에 단순히 썸머를 '나쁜 x'로 보기엔 어렵다는 얘기는 여기서 더 덧붙이지 않기로 한다. 서두에서의 이야기와 비슷한 맥락이기도 하다. 썸머의 얘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적어도 썸머는 톰 앞에서 솔직했고, 그를 대하는 감정은 진짜였다. 그녀는 톰이 좋았고, 하지만 확신은 없었고, 다시 만났을 땐 인간적으로 반가웠고, 결혼식장에선 춤을 추고 싶었다.  

 

그리고 내가 조금 더 얘기하고 싶은 건 우연과 운명론을 다루는 영화의 태도에 대한 것이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헤어지는 일은 과연 우연일까, 필연적인 운명일까. 참 오랜 갑론을박의 대상이 되어왔던 주제다. 혹자는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인생의 대부분을 쏟기도 한다. 이번에야말로 내가 찾아왔던 바로 그 사람을 만나게 되었단 확신을 멋대로 가졌다가, 이번에도 틀렸다며 실망했다가, 사랑을 회의했다가, 또 다시 무언가를 믿고 만다. 몇 번의 반복적인 단계를 거치면서 나름의 결론을 만들어나가며.

 

언뜻 보면 영화는 모든 건 우연이라는 결론에 힘을 실어주는 듯하다. 하지만 이런 결론의 핵심은 우연과 운명 중 무엇이 정답인가를 가름해내는 데 있지 않다. 중요한 건, 그 질문에 대한 자신의 결론이 어떤 모순을 가지고 있는가를 깨닫는 것, 그리고 그를 기반으로 어떤 성장을 이루어나갈 것인가의 문제다. 

 

 

 

회의하기보단


 

톰은 낭만적인 운명론을 믿었지만, 그 운명이 실현되기엔 너무 순진했다. 그러니까, 그는 자신이 가진 환상에 썸머를 맞추어 생각했고 언젠가 썸머 역시 자신의 방식대로 자신을 사랑해주리라 믿었다. 좋아하는 상대가 자신에 대해 확신을 가져주길 바라는 건 당연한 마음이다. 하지만 썸머는 처음 연애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부터, 톰이 관계에 대한 정의를 원한다고 표현했을 때까지 줄곧 자신이 톰과의 미래를 따로 그려보진 않고 있음을 표현해왔다. 둘의 결말은 어쩌면 처음부터 예견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톰의 순진해서 일방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장면이 바로 썸머의 홈파티에 참석하는 장면이다. 썸머가 말하지 않은 그녀의 의중을 먼저 짐작한 채 선뜻 재회를 꿈꾸고, 건축 서적을 챙겨가는 톰. 여전히 자신에게 소중한 것이 썸머에게도 소중할 것이라는 예상은 어디까지나 톰 안에서의 결론이다. 물론 이런 톰의 모습을 남 일처럼 비판하기도 어렵다. 이건 우리 모두의 모습이다. 

 

하지만 톰은 썸머와의 500일을 통해, 사랑 앞에 순진하고 미숙해서 차마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고 한발 나아간다. 가만히 앉아서 하나부터 열까지 꼭 맞는 반쪽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는 게 아니라, 삶 앞에 놓인 모든 우연을 그저 우연으로 흘려보내는 것이 아니라, 삶을 만들어나가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톰. 그가 면접장에서 마주하고 티타임을 요청한 '어텀'은 공교롭게도 몇 번이고 옷깃이 스치는 정도의 우연을 공유했던 여자였다. 


 

우리는 불안에서 벗어나려고 운명이라는 것을 만들어낸다. (...) 아무도 우리의 이야기를 기록해두지 않았고, 우리의 사랑을 보장해주지도 않았다는 불안에서 벗어나려고. (...) 나의 실수는 사랑하게 될 운명을 어떤 주어진 사람을 사랑할 운명과 혼동한 것이다. 사랑이 아니라 클로이가 필연이라고 생각하는 오류였다. (...) 내가 클로이를 사랑했다는 것, 우리가 만나고 못 만나는 것은 결국 우연일 뿐이라고, 989.727분의 1 확률일 뿐이라고 느끼게 되는 순간은 동시에 그녀와 함께하는 삶의 절대적 필연성을 느끼지 않게 되는 순간, 즉 그녀에 대한 사랑이 끝나는 순간이기도 할 것이다.

 

- 알랭 드 보통, '나는 왜 너를 사랑하는가' 중에서

 


한창 마음에 대한 회의론에 푹 빠져있던 적이 있다. 사강, 라파예트, 알랭 드 보통의 글을 읽고 일시적인 감정의 덧없음과 환상의 부재에 격한 동의를 표하는 동시에 씁쓸해했다. 화수분처럼 끝없이 솟아나는 마음은 없고, 모든 관계는 노력으로 이뤄내야 한다는 것은 전혀 운명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건 곧 진정성에 대한 의심으로 이어졌으며, 나는 세상의 그 어떤 마음도 완전히 순결할 수는 없다는 것을 납득하기 어려워하고 또 억울해했다. 입으로는 환상을 믿지 않는다고 했지만 사실은 그 누구보다 그걸 믿고 싶어했던 셈이다. 

 

그런 믿음이 약간의 자취 정도로만 남은 요즘, 나의 시선은 이제 마냥 달콤하거나 유쾌하진 않지만 언젠가는 나에게 꼭 필요한 자세였을 테다. 모든 것이 잔잔히 가라앉은 듯한 평온함 앞에 나는 겸허해진다. 수면 밑에 도사리는 것은 나를 향한 드라마틱한 적의나 악의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금도끼와 은도끼를 들고 나를 구원해줄 신적인 존재도 아니다. 그 밑에 있는 건 그저 자신의 흐름을 이어갈 뿐인 존재들이다. 파도를 일으키고 싶다면, 그 존재들과 함께 호흡하고 싶다면 내가 바람이 되어 움직여야 한다.  

 

톰이 운명이 아닌 우연을 믿게 된 것이 그 자체로는 중요하지 않다는 얘기를 위의 발췌를 통해 마지막으로 한번 더 덧붙여본다. 보통의 글에서 화자는 똑같이 운명론을 부정하고 있지만, 그 부정을 통해 얻어낸 결론은 완전히 정반대다. 사랑과 우연성의 취약함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그렇게 미약한 우연을 쟁취해낼 것인가, 우연이기 때문에 모두 무의미하다며 등져버릴 것인가. 그리고 우리는 안다. 톰은 전자를 택했고 그런 그의 진취가 새로운 인연을 불러왔다는 것을. 

 

또 우리는 우리의 삶을 통해 안다. 여름 다음에는 가을이 온다는 것을. 

 

 

[황수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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